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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상

등록일 2012-05-29 21:10 게재일 2012-05-29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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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오신 객원 논설위원 국제로타리 공공이미지 코디네이터

히말라야는 세계의 지붕이다. 해발 6천m가 넘는 구름층을 통과하면서 부운기(浮雲起)와 부운멸(浮雲滅)을 읊조려 보았으나 생사(生死)가 말처럼 환원(還元)되지 않을 뿐 아니라 늙는 것도 병드는 것도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서산대사는 생과 사를 그렇게 읊었다. “삶이라는 것은 한 조각 뜬구름이 일어나는 것이요(生也一片浮雲起)” “죽음이란 한 조각 뜬 구름이 흩어지는 것이다(死也一片浮雲滅)” 허망하고 무상하다.

세상일은 다 그렇게 허망하고 무상한 것만은 아니다. 봄에 지천으로 피는 꽃이 그렇고 한 시대를 풍미했던 권력이 그렇다. 꿈같은 사랑인들 흘러가지 않고 남을 수 있는가.

부귀영화도 마찬가지다. 세상일 어느 것 하나 허망하지 않고 무상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여산여수(如山如水)의 삶이 가장 빼어나다. 산을 닮고 물을 닮는 것이 지혜로운 삶이나 세상 사람들이 모르고 살기 때문에 허망하고 무상하다고 서글퍼한다.

성리학이 지배했던 조선시대와는 달리 고대사회에선 윤회정신이 강했다. 당나라 때 편찬된 것으로 알려진 수서(隋書)엔 고대 한반도의 장례풍습은 `북치고 춤추고 노래 부르며 운구 했다`고 적혀 있다.

다시 돌아오는 삶을 약속하기 때문에 슬퍼 할 일이 없다. 금강경에 적힌 짤막한 법구는 세상잡사에 매달리는 사람들에게 무릇 큰 가르침이다.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무릇 눈에 보이는 것으로서 허망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만일 이런 모든 현상들이 거짓임을 깨우친다면 그 때가되면 부처를 만나리라.” 부처가 말한 “생자필멸(生者必滅) 회자정리(會者定離)”도 마찬가지다. 이 법칙을 피해가는 생명체는 이 지구상에서 아무도 없다.

가끔씩 국립경주박물관에 들르면 무조건 에밀레종 앞에 선다. “일승원음(一乘圓音)으로 뭇 생명들은 모든 괴로움을 여의고 극락을 가지며 부처의 진리 바다에 들어 생령이 구원받기를 발원합니다.”

에밀레종 가장 육중한 몸체에 돋을새김을 한 이 법구가 천둥처럼 들리니 내 지낸 생이 너무 허망(虛妄)해서인가. 이래도 부질없는 욕망의 끈에 매달릴 건가. 삶의 번뇌는 시장 채소장사에게도 있다.

석가모니는 가장 위대한 상속을 포기했다. 8억4천만 명에게 공양을 하고도 지칠 줄 몰랐으며 평생 동안 남에게 한 차례도 화를 내지 않았다. 석가모니가 화를 내었을 경우는 제자들이 공부를 게을리 했을 때였다.

극락에 이르면 다시 하 세상으로 내려와야 한다. 사실 중생으로서는 인간을 만들어가는 과정인 지옥을 통과하는 기쁨이 으뜸일 것이다. 석가모니부처가 태어나신 인도는 종교의 나라다. 힌두의 진리는 하나이지만 거기에 이르는 길은 여러 갈래다. 그만큼 다양하다는 얘기다. 3대신 가운데 죽음의 신 `시바`가 으뜸이듯 인도인들의 말년은 참 아름다워 보였다. 2천500년 전에 크게 깨달음을 얻으신 석가부처님도 그 진리가 텃밭이 되었을 것이다.

우리나라 불교는 원효가 일으켰다. 1세기 윈난성· 미얀마와 히말라야 설산을 넘는 두 길을 통해 중국에 들어온 불교는 4세기쯤 해동으로 넘어 왔다. 출가해서 공부가 익어갈 무렵 원효는 한 때 화엄사상을 용궁에서 가져 왔다고 생각했다. 철이 들어서 보니 겨자씨보다 적은 내면의 세계에서 가져온 것을 알았다.

원효는 무의식의 세계에서 자기 마음을 꺼내 오기까지 밑바닥에서 피 땀을 흘리면서 내공을 쌓는 치열한 삶을 통해 화엄학이란 큰 깨달음을 세상에 내놓은 해동 성자다.

원효는 삼한시대에 들어온 불교를 해동불교로 만들었다. 그 불교 정신을 고려에 들어서는 보조국사가, 조선시대에는 서산대사· 진묵대사로 이었다. 근대불교는 경봉스님이 선맥(禪脈)을 잇는 등 뛰어난 수행자들이 여전히 이 땅을 단단히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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