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에도 일종의 법칙이 있다면 우선 이름난 문화재를 둘러보며 식견을 넓히는 것이다. 그 횟수가 쌓여 어느 정도 안목이 생기면 이제는 허물어진 폐사지를 둘러보는 것이다. 이때 와 닿는 느낌이야 말로 진정한 답사의 묘미가 아닐까 한다. 대부분 전란에 불타버린 폐사지에 들어서면 유명한 국보나 보물에서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느낌, 가슴 막히듯 쓸쓸한 그 무엇인가를 느끼는 것이다.
대륙과 해양의 교량역할을 하는 우리나라는 그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수많은 전란을 피해가지 못했다. 왜구의 노략질에서부터 몽고의 침입과 임진왜란, 6·25 동란까지 겪으면서 당대 가장 유명했던 문화재들이 화마의 희생물이 되었다. 그래서 지금껏 텅 빈 체 남아있는 폐사지들은 민족의 애환을 고스란히 담은 어찌보면 처절한 역사의 현장일지도 모른다.
몽고와의 전란 속에서 희생물이 된 황룡사 절터에 가보았는가? 주춧돌만 덩그러니 놓인 황량한 절터에서 무엇을 생각해 보았는가. 신라인들의 함성이 들려오지 않던가. 이 절에는 목탑으로 된 소위 황룡사 9층 목탑이 있었다. 선덕여왕 때 만들어졌다고 하는 탑은 현대 기술로도 어려운 80미터 높이의 목탑이었다고 한다. 탑은 전쟁의 화마에 사라지고 찰주를 받치던 심초석 만이 한 때 화려했던 신라왕조의 영화를 전달해 준다.
선덕여왕은 아버지 진평왕의 왕생극락과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법광사로 향하는 길에 오르지 않았을까?
잊지 못할 또 하나의 폐사지가 있다. 포항시 북구 신광면 상읍리에 있는 법광사터가 바로 그곳이다.
이 절은 신라 진평왕의 원당 사찰이었다. 신라왕실이 멸망할 때까지 왕실에서 보살피던 몇 안 되는 국찰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원래 절은 현재는 없다. 예사롭지 않은 연화대좌와 쌍귀부 당간지주만이 그 넓은 폐사지를 지키고 있다. 남겨진 석물(石物)들의 조각솜씨는 당대 신라 장인들의 돌 다루는 솜씨를 여실히 보여주기에 아깝지 않다. 이 절은 또 왜 불에 탔을까. 지질이도 깨어진 귀부와 허물어진 좌대의 범인은 과연 누구일까. 영조 26년에 건립되었다는 석가불사리탑중수비는 적어도 이 절이 조선 영조때까지는 불보사찰의 명성을 간직하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할 따름이다.
현존하는 유물로는 석탑과 불상연화대좌·쌍귀부 등이 있다. 현재 4층까지만 남아 있는 사리석탑은 1968년에 도굴되었으며, 도굴 뒤 탑 속에서는 탑지석 두 개가 발견되었다. 이는 신라 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길이 10.8㎝, 두께 1.5㎝, 너비 4㎝의 석회석으로 만들어졌으며 대좌와 옥개까지 갖춘 돌비석이다. `법광사석탑기`라고 제목을 붙인 이 유물은 법광사의 자세한 내력을 밝히고 있으며,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불상연화대좌는 지름 2.2m, 둘레 7.3m이며, 이 대좌 위에는 거대한 불상이 봉안되어 있었음을 추정하게 한다. 이밖에도 이 절에는 사리탑중수기, 당간지주(幢竿支柱), 수많은 주춧돌 등이 있다.
들녘에는 하루가 다르게 봄의 기운이 움트고 있다.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는 법구경의 어느 구절처럼 이제는 사라지고 없는 폐사지를 둘러보면 영화로운 상상과 비움의 미학, 그리고 민족의 애환까지 함께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