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추(初秋)의 양광(陽光)은 돌담위로 누렇고 세월 먹은 누렁호박을 매달았고 새끼줄이 흘러내리는 지붕 한곳에는 흰 박꽃이 저물고 있다. 여산여수(如山如水)의 삶이다. 한옥은 산을 닮고 물을 닮듯 느긋하고 담담하게 살아갈 정겨운 집이다.
2010년 8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오른 경주 양동마을은 조선시대 양반들의 집성촌과는 달리 두 가문이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 온 것이 특이하다. 양반은 다른 성씨들과 섞여 살지 못한다는 관례를 깬 마을이다. 월성 손씨(月城孫氏)와 려강이씨(驪江李氏)는 대대로 한 마을에 살긴 했었지만 날아갈 듯 뽐내는 고옥들이 평화롭게 보이는 겉과는 달리 내부적으로는 대립과 경쟁이 끊이지 않았다.
가문간의 경쟁의식은 모든 건축물의 완성도를 높이는데 크게 기여 했다. 두 가문이 벌인 건축 경쟁의 백미는 관가정(보물 442호)과 향단(香壇· 보물 412호)이다. 관가정이 단손하고 명쾌하게 보이는 반면 향단은 개성적이고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방법을 선택했다.
양동에는 손씨 종택 서백당(書百堂· 중요민속자료 23호)이 가장 먼저 지어지고 그 후에 지어진 이씨 종가집 무첨당(無?堂· 보물 413호)도 비교적 잘 보존돼 있다.
양동은 성주봉에 오르면 주산이 될 설창산에서 흘러내린 물(勿)자 형의 능선이 뻗어 난 곳에 지금도 150여 채의 기와집과 초가집들이 숲과 어울려있어 `와` 하는 탄성이 절로 나온다.
고도 경주는 양동과 하회마을이 국내에서 10번째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에 앞서 1995년에 석굴암과 불국사, 그리고 2000년엔 경주 역사유적지구 가 지정 됐다. 경주는 우리나라에 지정된 열 곳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4곳이나 되니 자긍심을 가질만하다.
1700년대에 지어진 경주 교동 최부자집도 이채롭다. 원래 99칸이었으나 1970년 사랑채와 별당은 불탔다. 안채는 口자형, 대문채는 一자형, 그리고 사당은 사랑채와 서당으로 이용된 별당 사이에 배치해서 공간적 깊이를 느끼게 한 특징을 지녔다.
얼마 전 1928년 일본 건축화보에 실린 최부자집 배치 평면도가 발견되어서 이 고택의 화재 이전 모습을 짐작할 수 있게 됐다. 이 평면대로라면 지금 남아있는 고옥들은 원래 규모의 반쯤으로 보면 될 것 같다.
몇 년 전에 복원이 된 사랑채를 중심으로 서편에 별당을 두었고 안채 동편과 솟을 대문 바깥에 큼지막한 곳간을 배치했다. 안채 쪽 곳간은 과객 치송에 바쁜 부녀자들의 도방 살림을 배려한 위치에 세워졌다.
최부자집은 이 집터의 안산이라 할 도당산이 풍수상 창고자리다. 남산 주봉에서 흘러내려 교동 앞에서 멈춘 도당산은 바로 산허리가 곳간형세다. 북쪽으로는 집 기운이 새어 나가는 것을 막으려는 듯 쌍으로 심은 나무가 집 분위기를 더 살려준다.
조선시대 철학자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은 고향 안동에서 손수 설계도까지 그리면서 지산와사(芝山蝸舍) 도산서당 등 다섯 채를 지었다. 도산서당은 고졸하다.
반면 회재 이언적은 도덕산 등 주변 4개의 산을 독락당과 양동으로 끌어들여 천년미래를 설계 했다. 독락당의 빼어난 미는 주인의 성품 같다. 보길도에서 시가(詩歌) 생활로 말년을 보낸 고산 윤선도는 세연정 녹우당 낙서재를 짓고 길을 내어서 수레를 타고 섬 곳곳을 누비는 자연 속의 호사를 누린 은둔자 였다. 이들이 지은 고옥들은 학문적 성향이 그대로 드러난 듯하다. 자연을 정복한다는 서양의 논리와는 달리 자연에 들어간다는 동양인의 정신이 고고하게 녹아있다.
영덕 괴시리 한옥도 볼만하다. 한옥에서 담을 허물거나 낮추는 것은 서로 소통하고자 함이다. 돌담이나 토담에서 사진을 담으면 더 편안한 모습으로 나온다.
“효율성이 높은 온돌 난방 시스템은 지속 가능한 개발모델”이다. 전통한옥과 마을의 구조는 자연과 한껏 어울리는 아름다움과 효율성을 지니고 있으며 한옥에서 숨 쉴 나무 치장과 목가구의 배치는 미래 공간에서 한국을 드러낼 문화적 소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