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에도 14세의 꽃다운 여학생의 자살 소식이 가슴을 아프게 한다. 우리나라는 OECD국가 중 인구 10만 명당 32.1로 단연 자살률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나라 자살자가 2010년 한해 1만5천566명에 이르고, 하루 평균 자살자 수가 42.6명에 이른다니 할 말이 없다. 통계 수치로만 보면 우리나라는 이미 불명예스러운 `자살 공화국`이 돼 버린 셈이다.
유명 연예인의 잦은 자살은 말 할 것도 없고, 자살은 바로 우리의 이웃 나의 이야기가 됐다. 내가 잘 아는 교육자의 딸이 달포 전 자살하였지만 조문도 하지 못한 실정이다. 이웃에 사는 모 대학의 교수도 연구비 스트레스로 몇 해 전 자살했다. 부도난 후배도 자살을 시도했지만 구사일생으로 생명을 구했단다. 지금도 우울증으로 병원 신세를 지고 있는 선배도 있지만 찾아가 위로하기도 쉽지 않다. 허기야 전직 대통령까지 자살하는 나라이니 할 말이 없다.
일찍이 사회학의 아버지 칼 만하임은 `자살 유형론`을 써서 한 때 명성을 날렸다. 자살은 이기적 자살, 이타적 자살, 아노미형 자살이라는 3가지 유형이 있다는 것이다. 이기적 자살은 미운 사람에 대한 보복 심리에서 남을 원망하면서 보라는 듯이 자살하는 경우이다. 이타적 자살은 남을 위한 희생적인 죽음이다. 한말 민영환의 우국충정, 전태일의 노동자를 위한 분신, 이한열의 민주화를 위한 투신자살이 이에 속한다.
오늘날 우리사회의 대부분의 자살은 `자기 혼돈`에 의한 아노미적 자살이다. 왕따, 실연, 이혼, 배신, 부부 싸움, 입시 낙방, 신병 비관, 사업 실패 등 자신에게 닥친 스트레스를 극복하지 못한 데 원인이 있다. 자살자가 조금만 생각을 바꾸면 아무런 문제도 아닌데 자기 착각과 혼돈이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다. `자살`을 거꾸로 하면 `살자`가 되는데 말이다.
세계의 최빈국 방글라데시는 자살자는 적고 오히려 행복지수가 가장 높다는 통계가 있다. 세계 경제 10위권이라는 우리의 자살은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 우리 사회의 악의적인 경쟁구도가 스트레스를 낳고, 그것이 자살의 요인임은 분명하다. 신자유주의적 악의적 경쟁구조는 승자독식(勝者獨食)의 구조이며 낙오자는 바보로 취급되는 사회이다. 이 나라의 유치원부터 시작되는 입시 경쟁, 취업 경쟁, 출세 경쟁, 심지어 외모와 명품 경쟁에 이르기 까지 지나친 경쟁구도는 집단 히스테리를 유발하고 있다. 수능 성적이 장래 연봉까지 결정한다는 이상한 경쟁 사회에서 꼴찌에게 관심을 두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조급한 우리 한국인들이 전쟁과 같은 경쟁을 스스로 자초한 결과는 아닐까.
자살은 개인의 문제이고, 그것도 운명이니 어찌할 수 없다는 통념은 옳지 못하다. 우리는 우리 사회의 만연된 자살 방지를 위해 긴급 처방책을 마련해야 한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우리사회의 악의적 경쟁구도를 선의의 경쟁 구도로 바꿔 가야 한다. 선거철의 선심성 복지 논쟁 보다는 `더디 가도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법과 제도를 통해 `함께 사는 사회 안전망`을 시급히 구축해야 한다. 여기에 예산을 대폭 투입한다는 대선후보에게 표를 줘야 한다.
우리 사회의 자살이 경쟁적인 구조나 나쁜 환경에만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개개인이 우리의 조급성부터 버려야 한다. 교과서에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다`고 가르치고 있지만 우리는 언제부터인지 성취 욕구가 유달리 강한 민족이 돼 버렸다.
우리는 모두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적만 성취하려는데 문제가 있다. 이러한 조급하고 왜곡된 가치관이 스트레스를 가중시켜 그것이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학교와 시민 단체도 생명의 존엄성 교육과 운동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우리 모두가 주변의 어려운 자, 소외된 자, 고통 받는 자에 대한 관심부터 가져야 한다. 우리가 타인에 대한 배려정신을 발휘할 때 아노미적 자살은 충분히 예방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