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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도자의 생산과 소비

등록일 2012-02-17 22:10 게재일 2012-02-17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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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아름답다. 예술은 멋있다. 예술은 특이하다. 또 예술은 무엇일까. 예술에 대한 논의가 예술가뿐만 아니라 미학자나 철학자들을 통해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지만, 어찌 보면 대중들에게 예술이란 아주 간단한 것이다. 즉 예술은 보기 좋고, 훌륭하고, 완벽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랬을 때 그들은 흔히 예술적이라고 말한다.

예술의 경제적 가치에 대해 또는 경제활동으로서의 예술 행위에 대해 이야기 하는 자체가 불경스러운 일일는지도 모른다. 만약 경제적 보상책으로 예술을 수단으로 삼고 있다면 그것은 순수하지 못한 것을 받아들여질 것이다. 일반적으로 예술을 일반적인 사회적 생산물과는 다른 어떤 고상한 것, 초월적인 것, 예술 이외의 어떠한 목적에도 부합하지 않은 순수한 그 자체로의 미적인 것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경제 행위를 예술 행위에 대입시킨다는 것 자체가 예술을 모독하는 일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과연 예술이 경제적 가치와 전혀 무관한 것인가.

우리나라의 공예품 중에서 가장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것이 무엇인가. 도자기다. 크리스티 같은 경매에서도 백자 등은 중국·일본의 것들보다 훨씬 비싼 값에 팔린다. 지금 우리는 한국 음식문화의 세계화에 열중하고 있다. 그러려면 우리의 대중음식이 세계화돼야 하고, 그러기 위해 필수적으로 국내 대중음식점에서 모두 우리의 도자기를 사용해야 한다. 우리보다 아직도 일인당 소득이 적은 중국도 어느 시골 식당에서나 이가 빠졌을지언정 도자기를 쓰고 있다. 일본은 심지어 각 지역마다 패턴이나 색상이 다른 것으로 지역성을 대표하는 도자기를 사용하고 있다.

인도이지정(因陶以智政)이라 했다. 그릇을 보면 그 나라의 형편을 알 수 있다는 옛말이다. 한 시대의 문화의 높낮이를 가늠하기에 그릇이 좋은 지표가 되는 셈이다. 문화사의 중심 학문인 미술사와 고고학의 주된 연구 대상이 당대의 그릇 양식이고 보면 이 말이 실감난다. 당대의 기술과 예술의 총화로 빚어 써온 것이 그릇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따라서 그릇다운 그릇을 쓰는 시대는 문화적이다.

도예는 다시금 일상적인 삶의 세계를 축으로 한 사회적인 문화 생산물임을 자부해야 한다. 그리하여 경제활동으로서 도예가의 생산 활동이 장인정신에 올바르게 기초해 이윤추구에만 연연하는 자본주의 경제법칙의 비도덕성을 견제하는 문화적 파수꾼임을 자처한다면 이는 지나친 기대일까.

예컨대 자동차나 옷을 고를 때는 자신의 취향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면서도 정작 쓰임의 빈도가 가장 높은 그릇에 대해서는 격을 따져 선택하는 일을 번거롭게 여긴다.

값이 질을 담보하지는 않으니 반드시 비쌀 필요가 없다. 문제는 값보다 안목이다. 일정한 수준의 문화 인식이 필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좋은 그릇을 분별하려면 써봐야 한다. 좋은 그릇을 만드는 도예가와 그 가치를 아는 눈 밝은 수요층이 우리 시대의 생활문화를 영혼이 담긴 아름다운 그릇이게 하는 힘이다.

창조적 대상으로서 도예는 구체적인 형태보다는 봄날의 화사한 산수유나 풍란처럼 은근한 향기로 배어난다. 문화가 특수한 능력을 지닌 천재 예술가의 작품에 붙는 훈장이 아니라 일상적인 삶의 실천이라는 데 동의한다면, 예술도자의 문제는 특정한 전문가의 영역으로 미룰 일이 아니다.

옛 것을 본받는 `법고`는 때묻을 병폐가 있고, 새로이 창조하는 `창신`은 상도(常道)에서 어그러지는 병폐가 있으니, 법고하되 변화를 알고, 창신하되 전거(典據)에 능해야 한다고 주장한 북학파 학자 박제가의 법고창신(法古創新)은 우리문화를 대하는 오늘의 자세를 설득력 있게 전해준다. 계승하되 시대의 옷으로 갈아입고, 창조하되 전통에 원형을 두는 지혜를 잃지 않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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