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향우 정신”으로 알려진 고 박태준 포스코 전 회장의 말씀 큰 울림이 되어온다. 사명감과 헌신의 자세는 바로 책임정신의 발로였다고 본다. 오늘날 그 책임의 정신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정치라는 침몰하는 배에는 선장이 보이질 않고 삿대질 하는 모습과 너도나도 뛰어내리는 모습으로 안타깝다. 배를 띄울 수도 있지만 배를 뒤집을 수도 있는 게 민심이라지만 그 민심을 바라보고 민심을 다독이려는 진정성이 어디에 있는가.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은 죽음의 위기를 몸소 겪으면서도 결코 피해가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향하였다.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아무도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지 못한다. 내가 스스로 그것을 내놓는 것이다” 이순신 장군의 필생즉사 즉사필생과 스스로 죽을 각오를 하고 허허벌판의 모래바람을 맞으며 제철산업을 일으켰던 고 박태준 명예회장의 삶에서 진정성을 발견할 수 있다.
이해하다(understand)라는 말에는 아래(under)에 선다(stand)는 뜻이 포함돼 있다. 예수님은 더 높은 곳에 계신 거룩한 분이시지만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사람이 되셨다. 그리고 사람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발을 씻었다. 바오로사도의 말씀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이렇게 낮추고 순종하는 가운데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고 마침내 드높이 올림을 받으셨다.
성탄 장식과 노래가 들리는 거리를 걸으며 대림시기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았다. 이미 오셨지만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의미다. 세상 마지막 날에 대한 오심은 한 마디로 준비이다.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에 대한 마중의 준비에 대한 대림전례는 16일로서 끝맺는다. 그리고 17일부터 24일까지 사람이 되신 신비와 낮추심에로 초대하고 있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는 모습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삶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는 “삶의 경이로움을 느끼기 위해서는 먼지와 같이 겸손하여야 한다”고 했다. 모두 성공의 화려한 첨탑의 끝이 아니라 땅과 같은 겸손(humilis)이란 말은 `만물이 태어나는 곳, 만물이 풍요롭고 열매 맺고 성장하게 하는 곳`이라는 뜻의 humus에서 나왔다. 성공이라는 위로 향한 삶이 주는 중독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아래로 향하여 마침내 땅에 도달해 사고와 행동의 지평이 무한대로 확장됐으면 한다.
야고보사도는 말씀을 듣고 실천함으로써 행복하게 될 것이라 했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과 행동이 다른 삶이 아니라 말과 하나가 되는 실천에 옮겨 실행하는 사람은 자신의 그 실행으로 행복에 이르게 된다. 교황 베네딕도 16세의 첫 번째 회칙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에서 교회는 사랑을 실천함에 있어서 먼저 `마음의 양성(cordis formatio)`이 필요하다 했다. 낮은 자리를 마다하지 않는 삶의 향기를 마음에 품고 주고받는 말에서 따뜻함이 전달됐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