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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사람이다

윤희정 기자
등록일 2011-11-29 23:39 게재일 2011-11-29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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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신객원 논설위원로타리 공공이미지 코디네이터
일본엔 첫 시간 수업이 있기 전 10분간 책읽기를 하는 초·중·고교가 2만 6천여 곳, 전체학교의 70%에 이른다. 아침독서운동을 20년 넘게 펼친 결과이다. 1988년 지바현의 한 고교에서 시작한 이래 전국으로 퍼졌다.

아침독서운동 10분은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열흘만 모이면 책 한권을 뗄 수가 있다. 독서를 하게 되면 많은 지식을 책에서 얻을 수도 있지만 생활태도를 학구적으로 바꾼다.

책을 멀리하고 1년에 책 한권 사보지 않는 어른들이 수두룩한 지금의 한국인들을 바라보노라면 간서치(看書痴:책만 보는 바보)라는 별명으로 불린 이덕무나 `오거서(五車書:다섯 수레의 책)`를 얘기한 두보(杜甫)가 알까 부끄럽다.

일본의 유명한 에세이스트가 19세기 유럽의 배경을 깔고 쓴 글을 한 소년이 서점 진열대에 둔 책을 유리창 밖에서 보고 있었다. 소년은 그 책을 읽고 싶었지만 돈이 없어 다음날도 바라만 보고 갔다.

어느 날 소년은 책장이 매일 한 장씩 넘겨진 사실을 알았다. 소년은 그 토록 일고 싶었던 책을 서점 주인의 배려로 마침내 다 읽을 수 있었고 가난한 소년을 배려한 서점 주인의 마음씀씀이가 가슴에 찡하다.

말과 문자는 인류의 기억이자 인간이 갖는 가장 귀한 보물이지만 이걸 우리가 모르고 살 뿐이다. 언어는 특히 인류의 소중한 기억이다. 말은 많이 하면 필요 없는 말이 나온다. 두 귀로 많이 들으며 세 번 생각하고 입을 열라지만 문자의 제어 능력은 기억보다 훌륭하다.

글과 말의 진실은 또 있다. 특히 문학적 언어는 사고가 깃든 집 역할을 한다. 언어의 사유(思惟)는 모든 것을 통째로 얘기하는 것이다. 문학적 언어를 잘 구사하는 민족과 실사구시 적 언어를 주로 구사하는 민족과는 삶의 차원이 다르다.

문학을 아끼고 사랑하는 민족은 끝없이 발전한다. 18세기 지역 언어에 불과했던 독일어가 세계적 언어로 부상하기까지는 괴테란 걸출한 문인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괴테의 빛나는 문학작품은 분열된 독일을 문학적 힘으로 통합시켰다. 영국을 봐도 그렇다. 세익스피어와 워즈워스라는 시인과 극작가가 나오기 전 까지는 그저 그런 국가 대접을 받았을 뿐이다.

직립 인간으로 땅을 걸어 다니긴 했었지만 인류는 오랜 세월 문자가 없는 세상에서 살아 왔다. 세계 문명 발상지를 중심으로 문자를 가지게 된 것은 불과 수천 년 전의 일이다. 수십만 년 동안을 헤맨 끝에 인류는 겨우 문자를 만들 수 있었으니 그 것은 살아 움직이는 인간의 지고한 지혜의 응집력 덕분이다.

이 문자가 나오기 전 희귀한 그림 한 장이 동양에서 만들어 졌으니 신비한 태극도이다. 음과 양이 하나로 돌아가는 것이 마치 인간의 모든 것이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다. 이런 이치가 문자로 진화되지 않았을까.

세계는 지금 10%가 넘는 8억의 인구가 글을 모르는 문맹자이며 아시아· 아프리카에 몰려 살고 있다. 특히 여성이 문맹인구의 64%를 차지함으로써 성폭력의 대상이 되는 등 가장 많이 피해를 입고 있다.

글을 모르면 빈곤에서 탈출 할 수도 자신을 보호할 수도 없다.

우리나라의 비문해자는 1920년대의 90%에서 1950년대 67%, 1970년 7%로 낮아졌다. 통계청이 지난 2008년 38년만의 조사에서는 1.7%로 줄어 초선진국수준이 되었으나 10여년 사이 다문화가정이 크게 늘어나 이들 가정의 자녀 7만명이 새로운 걱정거리로 등장했을 뿐이다.

연말이다. 이 해가 지기 전에 수입의 1%라도 책을 사는데 투자하라. 옷은 해지면 버리지만 책은 시간이 지나도 위대한 진가를 품고 있다.

돈만보고 돌진하는 사람들, 책사는 데 인색한 한국 사람들에게 고문진보(古文眞寶)의 한 구절이 깨우침이 될까. “가난한 자는 책으로 부자 되고 부자는 책으로 존귀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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