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경동 시인은 `희망버스` 등으로 며칠 전에 구속되었기 때문에 아내가 수상 소감을 대신 낭독했다고 한다. 이 시인의 시집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은 아직 통독해 보지 못했다. 1990년 전후에는 박노해 시인의 시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는데, 송경동 시인은 그에게 부여된 어떤 아이콘에도 불구하고 아직 시는 충분히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
다만, 박노해 현상 이후 우리가 얻은 교훈 가운데 하나는 투쟁적인 시, 저항적인 시가 곧 오래 가는 시는 아니라는 점이다. 문학과, 정치 또는 운동은 서로 겹치는 부분이 있다 해도 근본적으로는 다른 것이기 때문에 이 점에 유의하지 않으면 좋은 시를 쓸 수 없다.
최근에 몇몇 유수한 시집 시리즈들은 젊은 시인들의 시집을 다투어 내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런 시집들 상당수가 태작이 많다. 태작이라기보다는 미숙한 작품이라고 해야 할 정도다.
송경동 시인이 구속된 일은 우리 사회가 지금 얼마나 가파른 삶을 요구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문제적 현상이다. 그러나 이 시인의 삶을 문학에 옮겨 문학상을 주고 이슈로 삼는데는 더 엄정해질 필요가 있었을 것 같다.
아무튼 오랜만의 시상식 뒤풀이 나들이였다. 전화들을 했다. 최영미 시인이 춘천에 사는데, 이번에 한 번 시상식에 가려고 한다면서 식장에서 한 번 만나지 않겠느냐고 했다. 최근에 필자가 최영미 시인을 특강에 초청한 일이 있어 어떤 친분 비슷한 게 생겼던 것이다. 그러자 시상식 시작 한 시간 전쯤 다시 전화가 왔다. 춘천서 와서 갑자기 너무 피곤해졌다, 어머니집에 가서 좀 쉬어야겠다고 했다.
일산에 사는 정기복 시인도 전화를 했다. 정 시인은 원래 출판사에서 영업 일을 했으나 최근 2년 동안은 택시 운전을 하고 있다. 우리가 함께 친한 이정민 시인과 김별아 작가를 시상식 뒤풀이장에 서 만나 이야기나 나누자고 했다. 필자까지 합쳐서 네 사람이 같이 친분이 두터웠는데, 최근 몇 년 사이, 특히 김별아 씨가 `미실`을 써서 `잘 나가게` 된 이후로는 혼자 떨어져 나갔다. 나머지 세 사람이 가끔 만나 재미 있게 놀았지만 요즘에는 더 뜸하게 된 터였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역시 나이 탓이다. 서로 각자 사는 일에 열중하다 보니 자주 만날 수 없다.
이럭저럭 약속이 정해져서 청계천 2가 한외빌딩 1층에 있는 `아미고`라는 생맥주집으로 갔다. 텅 빈 시상식 뒤풀이 장소에 김별아 씨와 필자가 일착이었다. 잠깐 기다리니 시상식에 참석했던 사람들이 이쪽으로 왔다. `실천문학` 편집위원이었던 최두석 시인과 김태현 교수, 작가 현기영 선생, 비평에 염무웅 선생 등을 비롯해서 많은 분들이 오셨고, 386세대의 작가나 시인도 꽤 참석했던 것 같다.
그런데 특이한 점이 몇 가지 있었다. 하나는 대체로 자기 자리에 붙박이 된 채 술을 마시고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먹는 사람이 꽤나 적어졌다는 것이다. 이것은 각자의 자존심이 그만큼 커졌다는 것이겠지만, 그보다는 일종의 고립감의 표현이라고 해석되었다. 다른 하나는 젊은 작가들의 비중이 너무 적어 보였다는 것이다. 어제 필자가 만난 젊은 작가라고는 이혜미 시인, 최정진 시인, 김성대 시인 등이 고작이었다. 그 또래 작가들이 적었을 뿐 아니라 그 바로 윗세대에 속하는 30대 중반 전후의 작가들도 몇 사람 보이지 않았다. 또 어느 순간에 보니 사람들이 썰물 빠지듯 빠르게 빠져나가 몇 사람 보이지 않게 되었다. 몇몇 분파들끼리 2차를 향했거나 집으로 돌아간 것이다.
이 시상식 뒤풀이의 전체적인 인상은 뭐랄까, 어딘지 힘 빠져 보인다는 것인데, 이것은 과연 시대 탓일까, 문단 탓일까, `창비` 탓일까. 아니 필자의 기분 탓이 가장 클 것이다. 어느 사이에 필자는 `창비`와 너무 멀리 떨어져 있게 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