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필자가 `님과 함께`를 즐겨 부르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누구나 세상을 살면서 생각만 해도 가슴 아프고 기억조차 하기 싫은 과거가 한두 가지 쯤은 있듯이 비록 지금은 남부럽지 않은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살고 있지만, 지금도 결혼 초기를 생각하면 아내와 세 자식들에게 미안하고 죄스러운 마음에 고개가 저절로 숙여진다.
사실 나는 세상에서 흔치 않게 초·중·고등학교 동기 동창이자 동갑내기 친구와 결혼하여 비록 지금은 남부럽지 않은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살고 있지만, 한때는 정말 무책임하고 형편없는 빵점짜리 남편이자 아버지였다.
돌이켜 보건대 영덕군 지품면 누루실이란 산간오지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대학을 진학하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순박하고 꿈 많은 시골 아이 중 하나였다.
그러나 민주화의 뜨거운 열기 속에 시위로 해가 뜨고 해가 지던 80년대 초,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암울한 시대상황 속에서 “불의를 보고 일어설 줄 모르는 대학생은 역사의 죄인”이라는 원로 교수님의 말씀은 나로 하여금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았고, 대학 4년을 줄곧 최루탄 연기 속에서 방황하고 있을 때 우연히 학교 앞 행단보도에서 마주친 아내는 영덕 촌놈이 서울까지 유학 와서 그래도 기죽지 않고 데모대 선봉에서 민주화 운동 한답시고 사자후를 토하는 모습이 대견스럽게 느꼈는지는 몰라도 어쨌든 고맙고 감사하게도 나에게 친구의 선을 넘어 나의 길에 동행자가 되어 주기로 하였다. 하여, 나는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비록 비가 오면 비가 새고, 밤이면 온 방 안이 쥐들의 천국인 서울 금호동 산비탈 달동네 맨 꼭대기 집에 보증금 50만원에 월 3만원하는 셋방을 얻어 둥지를 튼 것까지는 좋았지만, 사실 그때부터 이미 나는 예고된 행복 시작이었고, 아내는 불행의 시작이었다.
남의 집 귀한 딸을 데려다 놓고 호강은 못 시켜 줄망정 가정은 뒷전이고 도둑맞을 세간 하나 없는 집에 홀로 남겨두고 눈만 뜨면 민주화 운동 한답시고 밤 낮 없이 싸돌아다니고, 거기다가 한 술 더 떠서 아이 먹일 분유 한 통 살 수 없는 백수 주제에 자식을 셋이나 낳아 정말 갈수록 사는 꼴이 말이 아니었다.
당시 이를 안타깝게 지켜보시던 선배께서 나에게 이르기를 “세상을 바꾸는 것도 좋지만, 세상을 바꾸려면 먼저 수신제가한 후에 스스로 세상을 긍정적으로 볼 줄 알아야 한다.”는 충고였고, 그 한마디의 충고는 오늘의 나를 만든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날 이후 내 머릿속에 온통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 찬 의식을 긍정적으로 바꾸기 위해서 시도한 것이 바로 운동권 노래가 아닌 가수 남진의 `님과 함께`이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말이 씨 된다`는 속담처럼 내 자신도 모르게 내 삶이 노래 가사처럼 바뀌기 시작했다.
생각이 긍정적으로 바뀌고, 수심이 가득했던 얼굴엔 미소가, 최루탄 대신 돈이 굴러들어오고, 급기야는 노래가사처럼 `님과 함께`를 즐겨 부른지 10년 만에 아내가 평소 소원하던 그림 같은 유치원 건물을 지어 선물하는 등 모든 것이 달라졌다.
사설이 길었지만, 어쨌든 나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란 말처럼 `세상만사는 마음먹은 대로 되게 된다.`는 평범한 진리와 `긍정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실제로 체험한 사람 중에 한 사람이다.
요사이 어디를 가더라도 앉았다 하면 모두가 약속이나 한 듯이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말은 온통 “어렵고 힘들다.”는 소리뿐이다.
가끔 노래방을 가도 우울하고 침통한 노래들이 대세를 이룬다.
이럴 때일수록 주저앉아 신세타령이나 세상 탓만 할 것이 아니라 “모두가 안된다.”고 할 때 말없이 담장을 오르는 담쟁이넝쿨처럼 그 어느 때보다 노래를 하더라도, 생각이나 말 한마디를 하더라도 긍정적인 것이 절실히 필요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음을 자각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