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철학자들이 답을 내 놓았고, 그 답들은 곱씹을수록 뜻이 깊다. 그중에서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가 한 말은 참 부끄러울 만큼 단호하다.
사람은 `권력을 향한 의지`(will to power-이걸 일본식으로, `권력에의 의지`라고 번역하기도 한다.)로 산다. 물론 그 위대한 철학자가 만년에 한 이 말은, 삶과 영원에 대한 그의 우주적 통찰과 궁극의 깨달음을 담고 있다고 하므로 문외한이 간단히 해석할 수는 없지만, 그의 말은 우리 사소한 인생들에게 늘 새롭다.
권력을 향한 의지 중에서 우리가 자주 목격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젊은 시절 군대에 다녀온 경험 하나만 가지고도 우리는 밤을 새울 수 있다. 그러다가 말이 좀 엇나가기 시작하면 병장 때에 중대장과 맞먹고 심하면 자신이 사단을 지휘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 장면에서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면, 니체가 그 허연 머리를 흩날리며 클클 웃는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 우리는 자신을 과장하고 허세를 부리는 일에 익숙하다. 스스로 과장한 모습이 자신의 원래 모습이었던 것으로 착각하는 단계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큰 체 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실제로 가장 우리가 권력을 향해 기울어 있음을 발견하는 순간은, 비굴한 순간이다. 비굴이야말로 자신을 가장 정직하고 지저분하게 보여주는 상태이다.
우리가 무엇에 비굴한지, 무엇 앞에서 무릎을 꿇는지가 우리의 내면을 밖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러면서 스스로 비굴을 위해 포기하는 것이 무엇이며 비굴을 통해 얻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피는 것은 우리를 조금 더 철들게 할 수도 있다.
18년 전에 어떤 젊은이가 경찰의 가혹한 진압에 항의해 분신자살했다. 당시에 이 사건이 터지자 당국은 대학생의 분신과 대학생들의 투쟁에 국민의 눈이 집중되지 못하게 했다. 검찰은 그의 유서를 다른 사람이 대필했다고 발표했고 국민의 이목은 대필의 사실 여부에 집중되었다. 검찰과 국립과학수사연구소와 법원이 힘을 합쳐서 대학생들을 몰아붙였고, 친구를 죽음으로 밀어 넣은 부도덕한 집단으로 매도된 젊은이들 중 한 사람은 실형을 선고받고 투옥되었다.
그저께 16일 법원은, 당시의 재판이 잘못되었으므로 다시 심판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세월이 흐른다고 모든 기억이 지워지지는 않는다. 많은 이들이 잊었지만, 또 많은 이들이 당시의 일을 기억하고 있으며, 이번에 내려진 결정이 어떤 의미인지도 알고 있다. 법원 자신이 지난날 자신의 판단을 부정하는 이번 결정은, 자신을 들여다보는 눈이 누구에게나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개인에게만 아니라, 집단에게도, 국가기관에게도, 니체가 말한 삶의 정의는 여전히 힘을 가지고 살아 있다.
그러면서 우리는, 검찰과 법원이 당시에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얻었던지를 회상한다. 군부 권력자가 집권한 나라에서 권력집단의 의도는 모든 기관에 미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검찰이나 법원이 정의에 입각하여 용기있는 주장과 판단을 했더라면, 아마 유사 이래 처음 보는 국민의 존경을 받았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그들은, 권력을 옹호하는 철벽이 아니라 국민을 지키는 보루라는 평가를 받았을 것이다. 그들은 그것을 포기했다.
그리고 그들은 무엇을 얻었는가. 글쎄, 우리가 보기에는 그들이 따로 얻은 것은 없었다. 억지로 보자면, 원래 가진 것을 빼앗기지 않았다는 것뿐이다.
모든 사람은 권력을 지향한다. 특히 권력 가까이 있으면 권력을 지향하게 될 것이다. 누구든 그 힘과 능력을 희망하게 될 것이다. 니체에 의하면 그것은 우리의 속성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한계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자신이 행할 수 있는 권력을 과장하기도 하고 커 보이게도 한다. 그러나 진정한 그의 모습은 비굴함에서 드러난다. 그가 비굴해지면서 포기하는 것과 얻는 것 사이에서 그는 가장 정직하게 자신을 드러낸다. 권력기관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