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공자와 잘 알고 지내던 원양이라는 사람이 걸터앉아 공자를 기다렸다. 공자가 말씀하셨다. “어려서는 공손하지 못하고, 자라서는 칭찬할 만한 것이 없고, 늙어서는 죽지도 않으니, 바로 적이다.” 하고 지팡이로 그의 종아리를 두드렸다. (原壤이 夷俟러니 子曰 幼而不孫弟하며 長而無述焉이오 老而不死가 是爲賊이라하시고 以杖叩其脛하시다)
세간에 우스개 얘기로 자주 오가는 `공자 촛대 뼈 까는 소리` 이다. 손님을 맞을 때는 친분이 있든 없든 일어서서 정중하게 맞아야 하는 게 최소한의 예의인데 원양이라는 사람은 의자나 나무 등걸 같은 것에 걸 터 앉아 공자를 맞이하다가 호되게 당한 것이다.
예를 모르는 인간은 사람 취급도 제대로 하지 않은 당시 사회분위기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예는 주나라 때에 신분계급의 분화와 함께 신과 인간과의 관계,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와 질서를 규정짓는 것으로 확대 적용되면서 체계화되기 시작한다.
주공을 비롯해서 주나라의 문물과 제도를 추앙했던 공자가 예를 유교의 실천철학으로 자리매김하면서 예는 종교와 정치, 법률, 도덕이 복합된 지배계층의 문화가 된다. 특히 성리학이 융성했던 시기에는 예가 사회윤리로 작동하면서 예학의 발달로 이어져 조선조에서는 당파 간에 예송논쟁으로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예학의 전범인 예기에는 인간사 전반에 걸친 모든 행위의 일거수일투족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규정해 놓고 있다.
심지어는 사람을 대할 때 상대의 신분에 따라 눈높이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일러준다. 예를 들어 임금을 대할 때는 배꼽 위에서부터 얼굴 아래까지를 쳐다볼 수 있고, 손윗사람에게는 절대 눈 위까지 쳐다볼 수 없으며, 아무리 아래 사람이라고 해도 정면을 직시하지 않고 눈을 좌우로 움직이는 것은 예에 어긋난다고 할 정도로 세세하게 기록해 두고 있다. 이처럼 까다롭고 번거롭게만 보이는 총체적인 예가 현대사회에 맞을 리는 없다.
그러나 공자는 예의 형식적이고 고정적인 측면을 내면화하여 예의 근거를 인간의 본질에 두고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따라서 예의 형식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지만, 그 근본적인 예의 정신은 변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요즘 세상, 이 같은 예의 정신은 사회의 어느 구석에도 찾아볼 수 없는 게 현실이다. 군사문화가 한동안 세상을 지배하면서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대하는 예가 사라졌고, 민주화 바람이 불면서는 아래 사람이 윗사람을 대하는 예도 사라진 지 오래다.
그렇다고 동년배나 친구 간의 예가 남아 있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내 잇속과 내 배짱만 남아 있을 뿐이고, 남을 위한 배려와 남을 대하는 예는 마주하기 힘들다.
하루에도 수천 수십만 건의 댓글이 달리는 사회적 이슈가 될 만한 인터넷상의 대화는 국가지도자도 없고, 사회 저명인사도 없이 오로지 내 뜻과 다르면 욕설부터 퍼붓고 본다.
이들에게 예의가 “어쩌고저쩌고” 해봤자 통할 리도 없는 일이다. 어떤 교수께서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고 하더니 공자가 죽고, 이제 그분이 남긴 예도 죽었으니 나라가 어떻게 살는지는 두고 봐야 할 일이긴 하다.
그러나 이 시대에 공자가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 잡으라는 명을 받고 환생한다고 해도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인간사에 놀라 화를 내는 정도가 아니라 다시 왔던 길로 되돌아가며 “지구에는 인간이 없어진 지 오래고 짐승들 천지가 됐다.”라고 탄식할 게 분명하다. 지팡이로 정강이뼈 때린 원양에게 “이제 와서 보니 이 사람아 사내의 불손은 예의 없는 축에 들지도 안네!”라며 분명히 사과도 할 것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