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서원은 대원군의 서원 훼철령 당시 사액서원은 대상이 아니었음에도 인근주민들이 작당해서 건물을 허물고 서책에는 불을 질러 폐허로 만들었다.
그 이후 사림에서 겨우 경지당 건물 하나만을 복원해 명맥을 이어가려 했으나 해방 이후 혼란기를 틈타 다시 심하게 훼손돼 만신창이의 건물이 되었다. 그 이후 최근에 와서야 주변정비가 이루어지기도 했으나 수천억 원의 예산이 투입된 유교문화권 사업에서마저 건물 복원은 제외돼 영주인들의 자존심이 말이 아니게 된 것이다. 이산사원은 1554년(명종 9년) 영주의 옛 지명인 영천 주민들이, 지역의 젊은이들을 교육하기 위해 순흥부사 안상에게 건의해 세운 것이다.
건립 당시에는 강당인 경지당과 동재인 성정재, 서재인 진수재와 함께 정문인 지도문과 관물대 그리고 주사와 창고 등 모두 33간 규모였다.
이 건물을 마련한 영주 주민들은 퇴계선생에게 부탁해서 이산서원기(伊山書院記)를 썼다. 퇴계는 이산서원기에서 “군치와 6~7리 거리로 번천고개가 우뚝 솟아 가리고, 그 안이 넓고 조용해서 시가지의 티끌이나 인적과는 접하지 않았다”고 기렸다. 서원기와 함께 퇴계는 수학(受學)과 거재(居齋) 규칙, 교수 실천요강, 독서법 등으로 구성된 원규를 만들어 전했다.
이 원규는 `사서오경`을 근본으로 할 것과 뜻이 바르지 못하고 행실이 좋지 않은 자는 의논하여 배척할 것, 그리고 서재에 조용히 앉아 독서하며 다른 서재를 찾아가 잡담하지 말 것 등 원생들이 가져야 할 일상의 행동지침과 공부하는 방법과 학문의 목표 등이 자상하게 기록돼 있다.
특히 공부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나라에서 인재를 육성하는 뜻에 따르고, 성현의 절실한 가르침을 지켜, 온갖 선이 다 나 자신에게 갖추어져 있음을 알고 옛 도를 지금 시대에 행할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모두 힘써 행하고 마음속으로 체득하여 실생활에 적용하는 학문을 하기를 힘쓰라. 그 외 역사서와 제자백가서, 문장과 과거 글공부도 세상사에 두루 통하는 데 있어서 힘쓰지 않으면 안 될 것이나, 응당 내외, 본말과 경중, 완급의 차례를 알아야 할 것이다. 늘 스스로 격려하여 나쁜 행실에 빠지지 않도록 하라. 그 외에 허탄, 요상, 사탄, 음탕한 내용의 책들은 이 서원에 들여와 가까이 접함으로써 도를 어지럽히고 뜻을 혼란시키는 일이 없도록 하라. 그리고 입지(立志)를 견고히 하고, 바른길을 향할 것이며, 공부는 목표를 원대히 하고 행동은 도의로 최선을 삼는다. 그 마음가짐이 비열하여 지식이 속루(俗累)에 벗어나지 못하고, 뜻과 희망이 오로지 이욕에 있는 자는 비학(非學)이다. 만일 성행이 괴상하여 예법을 비웃고 성현을 무시하며, 경(經)을 어기고 도리를 저버리며, 어버이를 욕되게 하고, 단체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자는 원 소속인 들이 의논하여 내쫓는다.” 등 당시, 학문하는 자들의 갖춰야 할 자세를 분명하고 상세하게 적고 있다.
이산서원은 처음에는 사당이 없이 강학을 위한 기구로만 설치되었으나 퇴계가 세상을 떠나자 1572년(선조 5)에 그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사당을 세우고 위패를 봉안하면서 존현의 기능을 갖추게 되었다. 도산서원이 창건되던 해인 1574년에 이산서원은 사액을 받았다.
이산서원은 옛 영천(榮川) 지방의 첫 서원이자 유일한 사액서원이다. 소수서원은 순흥 또는 풍기지역의 서원이지 엄밀한 의미의 영주 서원은 아니다.
이처럼 지역적으로나 역사적으로 길이 기려야 할 이산서원이 몇천 억 원의 예산이 풀려 웬만한 고건물의 담장까지도 다 보수를 한 유교문화권 개발 사업에서 마저 배제된 건 전적으로 관료들의 무지와 함께 지역주민들의 관심 밖에 있었기 때문이다.
유교문화라면 정신적인 면이 당연히 강조돼야 함에도, 우리 서원사의 전범인 이산서원은 여느 집 담장만도 못한 취급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산서원은 언제이든 꼭 복원돼야 할 귀중한 우리의 문화자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