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윤희정기자가 만난 여성들 (64) 김향자 한국화가

윤희정기자
등록일 2009-05-08 21:11 게재일 2009-05-08
스크랩버튼
‘나만의 평화로운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한국화가 김향자(53·사진)씨.


포항시 남구 대이동에 위치한 그의 화실에 들어섰다. 구석구석 어느 한 군데 흐트러진 곳이 없다. 벽에 걸린 그림들과 작업 중이던 그림 사이에서 커피를 내리는 그의 모습마저도 그림 같다. 작업실이라기보다는 아담한 갤러리에 온 듯 한 느낌이다.


그는 전업 작가다. 아침 일찍 단정한 차림새로 애견 봄이를 데리고 작업실에 출근하고 밤늦게 집으로 퇴근한다. 꼭 지켜야하는 약속처럼 그림을 그리든 안 그리든 못 그리든 그는 그림 앞에 충실하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것에 머물고 싶어 하는 건 당연하지 않나요? 물론 그것으로부터 늘 상처 받고 힘들어 하기도 하지만 가끔은 가장 행복한 순간을 선물하는 것도 그것 일테니까요. 제겐 그림이 그래요.”


동그란 얼굴 안경 속 눈이 빛난다. 야무진 말투와 ‘싶은 것’과 ‘싶지 않은 것’에 대한 의사 표현이 분명한 탓에 다소 차가운 인상을 주기도 하지만 주변인들은 오히려 그의 그런 명쾌함을 좋아한다.


전주가 고향인 그는 자신이 그림을 시작하게 된 뚜렷한 동기나 계기를 설명할 수 없다고 했다. 세종대 회화과를 졸업했지만 교과 학습만으로 그림 앞에 섰다면 벌써 손을 놓았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지난해 6월 그는 자신의 작업실에서 ‘풍경(風景)-사유와 시선’이란 타이틀로 열두 번째 개인전을 열었다.


“화려하게 포장을 한 그림을 커다란 전시장에 걸고 돌아오면 선보듯 어색하게 관객을 대하고 있을 제 그림에 대한 미안함이 생기기도 했어요. 그래서 그들과 제가 사는 공간으로 관객을 초대하는 건 어떨까 생각했지요.”


서울예술의전당, 종로갤러리, 포스코 갤러리 등의 초대를 받아 이미 10여회가 넘는 개인전의 경험을 가진 그였지만 이번만큼은 자신의 그림에 대한 배려를 먼저 한 셈이다. 전시회는 근사하게 막을 내렸다. 작가가 많은 시간을 보내는 작업실에는 은연중 작품에 대한 느낌이 배어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였을까? 크게 광고하지 않았음에도 일주일 동안 내내 사람들이 찾아와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림들은 행복하게 주인을 만나 떠났다. 그리고 그는 훌쩍 유럽 여행을 다녀왔다.


“물론 여행을 좋아하지요. 그리 자주는 아니지만 가고 싶으면 언제든 떠나요. 그저 실컷 보고 듣고 먹고 놀고 그러다 돌아오면 몸무게가 늘어나는 게 탈이지만요”


그는 풍경을 그린다. 그러나 바다를 그리기 위해 바다로 가지 않는다. 꽃을 그리기 위해 꽃을 찾지 않는다. 간혹 떠나는 그의 여행은 맛있는 음식과 독특한 쇼핑을 향한 매우 자유로운 길이다. 그림의 소재를 찾아 두리번거리지 않는다.


온 몸과 마음을 풀어 놓는 그 길에서 가끔은 바다, 꽃, 나비, 노래가 따라오기도 하지만 그들의 형체는 풍경으로 다 스민다.


언젠가 그의 그림을 통해 장주지몽(莊周之夢)을 언급한 김갑수 화가의 서문처럼 ‘꿈이 현실이고 현실이 곧 꿈인 세계’ 즉 ‘눈앞에 보이는 퍼스펙티브(perspective)한 장면에 대한 사실적 조명이 아니라 삶의 재현(representation)으로부터 길어 올린 마음속의 풍경, 가슴으로 조응한, 여백의 푸른 강물을 헤엄쳐 가는 피안의 풍경’이 바로 그의 그림이다.


장지를 직접 물에 불리고 덧칠하는 과정, 별, 구름 등 현대적 소재의 조형적 배치 등에서 전통과 현재의 화해를 추구하는 몸짓도 읽힌다. 묵은 세월을 거친 그림들이 이전에 비해 한층 밝고 낙관적인 쪽으로 여물고 있음이 목도된다. 작가의 고집은 조형성과 색채 말고도 또 있다.


자기 것을 찾는 독자성은 화선지가 아닌 장지를 사용하는 데서 잘 드러난다. 그는 화선지가 아니라 물에 불린 장지에다 그림을 그리고 채색을 한다.


관습적인 붓질의 상투성에서 벗어난 선들은 그래서 다른 느낌으로 심상의 자락을 찍어내고 있다.


겨울 내내 그는 벽화 작업을 했다. 가끔 바닷가에 사는 시 쓰는 후배가 찾아오면 슬그머니 문을 열어주고 함께 커피를 마셨을 뿐, 몇 달간 외로운 작업을 스스로 택해 즐겼다.


“장례식장에 걸릴 작품이었어요. 평소에 장례식장이야말로 가장 평온한 공간 아름다운 공간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던 터라 최선을 다하고 싶었어요. 죽음이 소멸이나 끝의 개념이 아닌 또 한 세상으로 건너가는 평화로운 여행이 되면 배웅도 아름다워 질 테니까요. 한 점 벽화지만 바라보는 누군가에겐 큰 위안이 되어 먹구름 같은 슬픔을 걷어 내고 희망을 주리라 믿어요.”


2006년에도 8개월 간의 긴 작업을 통해 포항 이동성당에 22점의 성화를 걸었던 그는 이번에도 몸과 마음을 다해 그림 앞에서 살았으며, 삶의 희노애락 그 뒤편을 조용히 바라보며 탄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를 그만의 시각과 색체로 풀어 간 750cm×122cm 크기의 벽화는 봄이 시작될 무렵 완성됐다. 그리고 ‘우리가 물이 되어 다시 만난다면’ 이라는 강은교 시인의 싯귀를 제목으로 달고 150호 그림 한 점과 함께 포항성모병원 장례식장에 따뜻하게 걸렸다.


“제 그림 앞에 앉으면 참 감사해요. 아니 감사하며 앉아요. 물론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그리다 멈춘 그림 속에서 꽃비가 내리고 있었던가? 꽃이 모인 자리로 바람이 불어 휘돌아나가는 봄이 있었던가? 그 곁에 걸린 스웨터에 묻은 물감 자국들조차 꽃이 되는 봄을 그가 그리고 있었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종합 기사리스트

더보기 이미지
스크랩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