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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보물' 고향잃은 수몰민

박재현기자
등록일 2007-09-22 16:05 게재일 2007-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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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면 민족 전체가 자신만의 마음의 보물인 ‘고향’을 찾는 추석이다. 하지만, 수십억 톤의 물속에 잠겨 통일이 돼도 고향을 찾을 수 없는 안동댐과 임하댐의 수몰민들은 아련한 기억속의 고향을 떠올리며 을씨년스런 풍경의 이주단지에서 추석을 준비하고 있다.



▲안동댐 서부단지


안동에서 도산서원 방면으로 20여㎞를 나서면 예안교를 건너 도산면이 시작된다. 다리를 건너자 바로 만나게 되는 고개에 올라서면 눈아래로 도로표지판과 검문소가 보인다. 검문소를 지나면 가파른 오르막길의 오른쪽에 언덕을 절개해 조성한 마을 보이는데 이 마을이 안동댐으로 고향을 잃은 수몰민들의 이주단지인 서부리이다.


안동댐이 완공되던 지난 1976년에 310가구, 1천100명이 이주해 왔지만 지금은 220가구, 496명이 남아서 물에 잠긴 고향마을 내려다보며 살고 있다. 서부리 옛 장터 옆에서 만난 수몰 이주민 임종욱(69·도산면 서부리)씨는 “장이 서지 않은 것이 십 년도 넘었다”며 “그래도 고향 근처라고 못 떠나는 노인들만 남았다”고 했다.


1971년 국토종합 5개년 개발계획과 낙동강 등 4대강 유역권 개발이 확정되면서 총 저수량 12억5천만 t 규모인 안동댐의 건설이 시작됐다. 5년 6개월의 공사기간을 거쳐 1976년 10월 완공된 안동댐은 나중에 만들어진 임하댐(5억9천만 t)에 비해 두 배가 넘는 규모이지만 임하댐의 공사기간(10년6개월)에 절반의 시간이 소요됐을 뿐이다. 여러 가지 이유 중에서도 분명한 것은 수몰민에 대한 배려가 미흡한 채 속도에만 치중한 공사진행으로 충분한 다리와 도로의 개설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안동댐 주변에는 배를 타야만 갈 수 있는 고립무원의 마을들이 생겨났다. 추석을 앞두고 벌초를 다녀온다는 김재문(49·와룡면 산야리)씨는 “수몰된 고향(예안면 부포리) 뒷산이 선영이라 벌초와 성묘 때는 배를 타고 다녀올 수밖에 없다”며 “댐 만들 때 다리나 도로에 신경을 썼더라면 이 고생은 면했을 텐데”라고 푸념을 하면서도 고향 뒷산에 자리한 5대조 산소를 다른 곳으로 이장도 생각했지만 선산을 놔두고 갈 수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댐이 되면서 산소 앞으로 물이 차니 산소가 명당이 됐다고 했다. 산소 앞의 물은 예부터 ‘부’를 의미한다고 했는데 그대신 후손들은 고향을 내줘야 했다.



▲임하댐 중평단지


임하댐은 지난 1984년부터 1995년 5월 31일까지 만들어진 사력댐으로 댐 높이는 73m, 길이가 515m로 발전시설용량은 5만㎾이다.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많은 댐이 홍수조절, 전력공급, 농업, 공업, 생활용수 공급을 목적으로 만들어졌듯이 임하댐 역시 그렇게 만들어졌다. 임동면에서 살았던 사람들은 지금도 눈을 감으면 오래된 영화처럼 짠한 기억이 영상으로 흘러간다고 말한다.


수몰 전 임하, 임동면을 찾아 천렵을 즐겼던 기억이 있는 사람이라면 임하댐이 선 임동면 망천 마을에서부터 도연폭포와 선창, 용계마을, 국난마을, 지례, 지동마을까지 이어지는 그림 같은 절경을 이제는 볼 수 없음이 무척이나 안타까울 것이다. 하물며 고향을 다시 볼 수 없는 수몰민들의 애처로운 심정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는 말로 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을 것 같았다.


1980년대 초까지 닷새마다 열리는 임동 채꺼리 장에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읍내라는 안동까지 교통길이 좋지 않던 시절이라 제법 많은 떠돌이 장꾼까지 합세하고 약장수까지 등장해 장날마다 채꺼리 장은 잔치판을 연출했었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부터 사람들이 도시로 떠나기 시작하면서 채꺼리시장은 그 명성을 잃고 장꾼들도 하나둘씩 줄어들었다. 어른들이 임동을 떠나자 한때 1천5백 명을 넘던 초등학생도 급격히 세가 줄었고 거리에는 아이들도 한산해질 무렵 임하댐건설이 시작됐다.


아스팔트에 드러누워 가면서 받은 보상으로 더러는 김천으로 더러는 상주로 이사를 떠났지만 고향 근처를 고집하며 중평단지로 이주한 주민들은 농사를 계속하는 장년층과 어뱅이(어부)로 직업을 바꾸는 젊은 층으로 양분된다.


임하댐이 들어서고 17년째 어뱅이로 직업을 바꿔 살고 있다는 남주환(45)씨는 임하댐 탁수로 요즈음은 기름값도 건지기 힘들어 배를 띄우는 날이 갈수록 줄어든다고 했다. 수몰 전의 임동 망천 같으면 지금은 귀한 민물고기 취급을 받는 쉬리도 흔했고 은어나 꺽지, 쏘가리도 작살 하나만 있으면 쉽게 잡아 올리던 물고기였다며 고향을 회상했다.


이제 며칠 후면 민족의 대명절인 추석이다. 고향에 가지 못하는 수몰민들은 물속에 잠긴 고향이 안타까워 눈물을 뿌리며 고향 언저리를 맴돌다 떠날 것이다. 태풍으로 높아진 수위만큼이나 가지 못하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수몰민들의 시름도 늘어나는 추석 밑이다.



??/박재현기자 pjh@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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