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숲으로 간다대숲으로 간다한사코 성근 대숲으로 간다자욱한 밤안개에 벌레 소리 젖어 흐르고벌레 소리에 푸른 달빛이 배어 흐르고대숲은 좋드라성글어 좋드라한사코 서러워 대숲은 좋드라꽃가루 날리듯 흥근히 드는 달빛에기척 없이 서서 나도 대같이 살거나성글고 서러운 대숲을 좋아한다는 시인의 인식에는 시대에 대한 아픔과 슬픔이 베여있다. 성근 대숲은 맑은 하늘을 가리지 않아 눈부신 햇빛과 푸르른 하늘을 품고 있어 좋다는 인식 속에는 대숲은 숱한 현실의 아픔들을 품고 보듬고 기척없이 서 있거나 가만히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다.시인
2013-03-29
기를 쓰고 반환점을 통과하자 맨 먼저 배가 조금씩 나오기 시작한다 찬 것을 먹으면 이가 시리다 신 음식이 싫다 잠이 없어졌다 눈이 흐릿하다(한 이틀 걸려야 술이 깬다) 세상에 대한 열망이. 삶의 또 한 굽이가 그저 밋밋하고 낡은, 부석부석한… 코치는 시계를 들여다보며 죽어라 악다구니를 쓰는데 긴장으로 뭉친, 탄력으로 내달았던 장딴지가 흐물흐물 녹작지근 길이, 느닷없이 벌떡 일어나 세차게 뺨을 후려친다 노을이 되어 번지는 코피, 한 손으로 틀어막으며 반바지 추스르는데 무엇보다 오오, 이걸 어쩌나 새벽에 좆이 서지 않는다 날이 벼려지지 않는다유용주 시집 `크나큰 침묵`(솔,1996)서른다섯 살이 인생의 반환점이라면 나는 이미 10년이나 지나 와버렸다. 시의 내용이 꼭 내 이야기인 것만 같다. 몸이 허물어지고 세상에 대한 열망이 그저 밋밋하고 낡고 부석부석한 것이. 시`36`은 유용주 시인이 인생의 반환점을 통과한 36세에 쓴 자기 삶의 낭패감에 대한 진지한 반성문이다. 이런 처절한 인생 반성문은 곧 삶의 무서운 결의(決意)로 다가서는 일이다. 이 시를 읽으며 단기4333년(2000) 12월에 보내준 그의 산문집 `그러나 나는 살아가리라`(솔, 2000)를 다시 펼쳐본다. 붉은 볼펜으로 밑줄을 죽죽 그어가며 감동적으로 읽었던 그 때의 기억이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내 문학은 내 삶뿐이다”라는 건강하고 당당한 선언으로 시작하는 이 산문집은 그를 일약 유명인사로 만든 책이다. 1부 `그 숲길에 관한 짧은 기억`은 여러 편의 아포리즘을 묶은 것인데, 편편마다 삶과 문학에 대한 시인의 거침없는 육성이 감동적으로, 아름답게 새겨져 있다. 먹물 든 사람들의 현학적이고 나약한 아포리즘을 일거에 넘어서는 위대한 아포리즘이라고 여러 사람들에게 책을 들이밀던 기억이 새롭다. 포항에 한 번 오겠다던 시인을 올 겨울에는 불러서 바닷가 선술집에서 과메기 안주로 소주잔을 나누며 그 당당한 生의 육성을 들어봐야겠다.시인
2009-10-05
그는 강남구 신사동 어느 식당에서 노랠 불렀네 영일만에서 부르던 박양숙의 어부의 노래를 서울 한복판에서 부르려니 뭔가 이상하게 생각되기도 했을 것이네 카피가 좋아 코피를 쏟고 카피가 좋아 커피를 즐겼던 그는 카피라이터가 되고 싶었네 카피가 좋아 아버지의 바다를 떠났지만 옆방의 숨결까지 스며들던 때늦은 고시원에서 돌아갈 수 있었네 잠든 대벌리 깨우셨던 아버지의 바다로 선잠 자듯 깨어나 꿈결 속에서 들었던 트랜지스터 라디오에선 곳에 따라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태풍이 몰려 왔네 맑은 날은 새벽 참을 먹었네 시큼거리는 김장 김치 송송 썰어 넣고, 먹다 남은 식은 밥 넣어서 끓여낸 국도 밥도 아닌 밥국으로 새벽을 열었던 아버지, 개 짖는 소리 컹컹 밟고 물 보러 갔네 고래 뱃속 같은 터널 지나 세상 끝, 방파제에 서면 쌀뜨물 흘리듯 아침은 그렇게 오고 있었네 바다신발 갈아 신고 물 보러 가던 아버지의 아침은 시작되곤 했네 시오리 바닷길, 학교 가는 길에 아버지와 마주 치곤했던 그는 이제 카피라이터가 되어 아버지의 바다를 그렇게 꿈인 듯, 현실인 듯 걸어가고 있네 시동인지`푸른시`(심지, 2006)나는 김동헌의 시 `아버지의 바다` 속으로 들어간다. “언제 어디서나 통한다”로 시작되는 초창기 SK텔레콤 휴대전화 광고 문구를 만든 카피라이터 김동헌 시인. 그는 커피가 좋고 카피라이터가 되고 싶어 아버지의 바다(포항)를 떠나 서울 강남구 신사동으로 떠났지만 끝내 “잠든 대벌리 깨우셨던 아버지의 바다”로 되돌아 왔다. “먹다 남은 식은 밥 넣어서 끓여낸 국도 밥도 아닌 밥국으로 새벽을 열었던 아버지”, 그 아버지가 열었던 새벽 아침이 바로 아버지의 바다요 마당이다. 우리는 누구나 할 것 없이 모두 그 마당의 힘으로 학교로 가 공부하고 세상으로 걸어나가 직장을 얻고 여자를 얻어 아이를 낳고 또 아버지가 되었다. 아버지가 되어보니 아버지의 바다와 마당, 그 큰 넓이를 어렴풋이 알 것만 같다. “바다신발 갈아 신고 물 보러 가던” 시인의 아버지가 이제는 연로하셔서 아침 바다를 쉽게 열 수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 바다는 이미 아버지의 대(代)를 이은 김동헌이라는 아비가 또 바다를 펀하게 열고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의 마당이 환히 열리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시인
2009-10-01
다가서지 마라 눈과 코는 벌써 돌아가고 마지막 흔적만 남은 석불 한 분 지금 막 완성을 꾀하고 있다 부처를 버리고 다시 돌이 되고 있다 어느 인연의 시간이 눈과 코를 새긴 후 여기는 천년 인각사 뜨락 부처의 감옥은 깊고 성스러웠다 다시 한 송이 돌로 돌아가는 자연 앞에 시간은 아무 데도 없다 부질없이 두 손 모으지 마라 완성이라는 말도 다만 저 멀리 비켜서거라문정희 시집`양귀비꽃 머리에 꽂고`(민음사, 2004)이 시는 문정희 시인의 제16회 정지용 문학상 수상작이다. 인각사(麟角寺)는 경상북도 군위군에 있는 자그마한 사찰로 고려 충렬왕 때 일연 선사가 `삼국유사`를 저술한 곳으로 유명한 곳이다. 인각사(麟角寺)라는 이름은 절 앞 내(川) 건너 깎아지른 듯한 바위에 기린이 뿔을 얹었다는 데서 유래된 것으로 전한다. 이 시의 제재는 인각사 대웅전 앞마당에 서 있는 석불이다. 모양이 다 이지러져 가는 석불 한 분을 깊이 본 데서 문정희 시인은 `돌아가는 길(道)`의 진리를 발견한다. 어른이 `돌아가셨다`는 말 속에 내재된 돌아감의 진리 그것 말이다. 부처를 버리고 다시 돌이 되는 순간, 마지막 흔적 속에 이루어지는 `완성`의 찰나를 훔쳐본 시인이 토해내는 그 말씀은 깊고도 그윽하다. 그것은 “시간은 아무 데도 없다”는 깨달음으로 정리될 수 있다. 끝내 우리가 돌아가는 그 길을 보려면 마음공부를 크게 해야 하리라. 욕망과 집착을 버리고 타인에게 원한을 쌓지 않는 일에서, 나를 버리는 일에서 그 공부는 시작되리라. 정녕 우리는 돌아가야만 하는가?시인
2009-09-29
이 가을에 오신 손님 이 세상에서 제일로 쓸쓸한 신발을 신고, 이 가을에 오신 손님 이 세상에서 한 송이 코스모스 얼굴이 되네. 이 가을에 오신 손님 이 세상에서 또다시 저 혼자서 떠나서 가네. 뀌뚜리 울음소리 바지로 꿰고, 기러기 울음소리 웃옷을 입고, 흰구름의 벙거지 머리에 쓰고 또 떠나네 또 떠나 떠나서 가네. 옛날에 도망쳐온 흰말 한 마리 서성이며 헤매이듯이 또 떠나가네. `미당 서정주 시전집 2`(민음사,1991)이 가을에 오시는 손님은 누굴까? 가을이 빚어내는 서럽고도 고운 풍경을 가장 오래도록 깊이 들여다보고 그 기쁨과 아픔을 노래하는 사람은 아마도 시인(詩人)일 것이다. 나는 `이 가을에 오신 손님`으로 미당 서정주 시인을 모신다. 그가 70세에 펴낸 제11시집 `노래`(정음문화사,1984)에서 `이 가을에 오신 손님`이라는 시를 읽는다. 2연으로 구성된 이 시는 그의 다른 시들에 비해 형식미가 매우 정제되어 있다. 6행으로 된 각 연의 동일한 길이와 3음보의 동일한 각 시행들 그리고 앞과 뒤의 의미가 대응되면서도 점층적으로 확산되는 시의 구조가 한국 가곡으로 부르면 딱 그만이겠다. 서럽고도 고운 우리의 노래가 되겠다. “뀌뚜리 울음소리 바지로 꿰고,/기러기 울음소리 웃옷을 입고,/ 흰구름의 벙거지 머리에 쓰고” “한 송이 코스모스 얼굴”로 “이 세상에서/제일로 쓸쓸한 신발을 신고,” “또 떠나네 또 떠나 떠나서 가네.”의 주인공은 그 누굴까? 또 “서성이며 헤매이듯이 또 떠나가”려는 “옛날에 도망쳐온 흰말 한 마리”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승에서의 삶이 끝날 때까지 언어를 손에서 놓지 않고 한 평생 이 땅의 서정시를 써 온 `80소년 떠돌이` 미당 자신이 아닐까. 시인
2009-09-28
우리 마을의 제일 오래된 어른 쓰러지셨다 고집스럽게 생가를 지켜주던 이 입적하셨다 단 한 장의 수의, 만장, 서러운 곡도 없이 불로 가시고 흙으로 돌아, 가시었다 잘 늙는 일이 결국 비우는 일이라는 것을 내부의 텅 빈 몸으로 보여주시던 당신 당신의 그늘 안에서 나는 하모니카를 불었고 이웃마을 숙이를 기다렸다 당신의 그늘 속으로 아이스께끼 장수가 다녀갔고 방물장수가 다녀갔다 당신의 그늘 속으로 부은 발등이 들어와 오래 머물다 갔다 우리 마을의 제일 두꺼운 그늘이 사라졌다 내 생애의 한 토막이 그렇게 부러졌다이재무 시선집`오래된 농담`(북인, 2008)이 시는 이재무 시인의 어린 시절의 꿈과 어설픈 연애가 들어가 있고, 당시 마을의 생활과 삶의 힘겨움을 다 받아주던 `당신`의 쓰러짐에 대한 조사(弔詞)이다. 당신은 고향 마을에 서 있던 노거수인 팽나무다. 고향 마을을 지키고 있던 마을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팽나무가 쓰러졌다는 것이다. 시인은 나무와 그 행위에 시종 극존칭(당신)과 주체높임(-시-)을 쓰고 있다. 텅 빈 몸으로 입적하는 마지막까지도 “잘 늙는 일이 결국 비우는 일이라는” 삶의 깨달음을 준 당신의 쓰러짐에 대한 화자의 애석함이 시 행간 곳곳에 배어있다. 고향 마을을 지키고 있던 이 팽나무의 쓰러짐은 지난 연대의 사라짐을 의미한다. 그래서 화자는 “내 생애의 한 토막이 그렇게 부러졌다”라고 말로 시를 끝맺고 있다. 고향 마을의 당나무, 고향집, 고향의 어머니와 아버지의 쓰러짐은 이렇게 젖은 물기를 띠고 나타날 수밖에 없다. 애석하고 슬픈 일이다. 다시 찾아가 그들을 올려다보자. 시인
2009-09-25
처음엔 흰 연꽃 열어 보이더니다음엔 빈 손바닥만 푸르게 흔들더니 그 다음엔 더운 연밥 한 그릇 들고 서 있더니 이제는 마른 손목마저 꺾인 채거꾸로 처박히고 말았네 수많은 槍을 가슴에 꽂고 연못은거대한 폐선처럼 가라앉고 있네 바닥에 처박혀 그는 무엇을 하나말 건네려 해도 손 잡으려 해도 보이지 않네 발밑에 떨어진 밥알들 주워서진흙 속에 심고 있는지 고개 들지 않 네 백 년쯤 지나 다시 오면그가 지은 연밥 한 그릇 얻어먹을 수 있으려나 그보다 일찍 오면 빈 손이라도 잡으려나 그보다 일찍 오면 흰 꽃도 볼 수 있으려나 회산에 회산에 다시 온다면 나희덕 시집`사라진 손바닥` (문학과지성사, 2004) 지금쯤 연못에 연꽃은 가고 연밥이 익어가고 있을까. 시의 제목 `사라진 손바닥`은 철지나 사라진 연못 속의 연꽃을 뜻한다. 시의 도입부에서 그려낸 연꽃의 한해살이 묘사는 참으로 절묘하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연꽃이 지고 연밥 달린 대궁마저 꺾여져 연못 속으로 처박힌 그 풍광을 “수많은 槍을 가슴에 꽂고 연못은/거대한 폐선처럼 가라앉고 있네”라고 한 이 빼어난 표현은 기막힌 것이다. 그런데 정작으로 시인이 표현하고자 한 속내는 시의 후반부에 모여 있다. “백 년쯤 지나 다시 오면/ 그가 지은 연밥 한 그릇 얻어먹을 수 있으려나”에서 짐작할 수 있듯 나는 그것을 떠나간 옛사랑에 대한 그리움으로 읽는다. `회산`이라는 지명이 어딘지는 잘 모르지만 아마도 시적 화자는 이 곳에서 떠나간 사랑을 애타게 찾고 있는 것이다. `사라진 손바닥`은 그러니 화자의 지나간 옛 사랑의 얼굴이다. 불교의 인연설(因緣說)을 바탕에 두고 있는 나희덕의`사라진 손바닥`은 `찬란한 슬픔`의 아름다운 시다. 시인
2009-09-23
가난과 고독이 없었던들, 생각이 저렇게 無邪할 수 있었을까. 아픔과 목마름이 없었던들, 꿈이 저렇게 화려할 수 있었을까. 김종길 시집 `해가 많이 짧아졌다` (솔출판사, 2004)시 `성탄제`로 우리에게 너무도 잘 알려진 김종길 시인의 최근 시집 `해가 많이 짧아졌다`(솔출판사)를 읽는다. 그는 우리 문단에서 과작(寡作)의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이중섭은 박수근과 함께 우리 한국 현대미술사의 신화적 존재가 된 화가이다. 이 두 화가의 그림은 다른 화가들의 그 어떤 작품보다 시적 친연성이 깊어 그들의 삶이나 작품이 여러 시인들의 시 속에 자주 등장한다. 그의 작품 세계를 `無邪`(사악함이 없는 순수함)로 보는 것은 은박지와 엽서에 수도 없이 그린 아이와 물고기, 게들의 평화로운 세계를, `화려한 꿈`으로 보는 것은 새 한 쌍이 부리를 맞대고 있는 작품`부부`와 지붕 위에 내려다보고 그린`청기와`를 두고 말함인가. 이 가을날에 화가의 그림도 시인의 시도 나를 물들게 하기는 마찬가지다. 시인
2009-09-08
그렇게 오는 사랑 있네 첫눈에 반하는 불길 같은 거 말고 사귈까 어쩔까 그런 재재한 거 말고 보고 지고 그립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대천바다 물 밀리듯 솨아 솨아아아아 온몸의 물길이 못 자국 하나 없이 둑방을 넘어 진액 오른 황금빛 잎사귀들 마지막 물기 몰아 천지사방 물 밀어가듯 몸이 물처럼 마음도 그렇게 너의 영혼인 내 몸도 그렇게 - 김선우 시집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문학과지성사·2007)김선우 시인의 셋째 시집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를 다시 읽는다. 지난 2005년 하늘로 돌아가신 일본군 위안부 어느 할머니의 한 많은 삶을 위무(慰撫)하고 있는 시 `열네 살 舞子`한 편만으로도 이 시집은 소중하다. 시집 내지에 그가 쓴 말처럼 `두 손`으로 읽어야 할 시집이다. 꽤 긴 장시(長詩)여서 독자 앞에 바로 내보일 수 없음이 무척 안타깝다. 시집을 사서 두 손으로 그 서러운 노래를 펼쳐보시길. 시집 속의 내용은 크게 우리 사회의 현실 문제를 거론하고 있는 것과 사랑을 노래한 것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킬링필드, 연밥 따는 아씨의 노래` `자운영 꽃밭에서 검은 염소와 놀다` `주홍 글씨` `내 손이 네 목 위에서`등의 시편들이 우리 사회의 현실적인 문제를 거론한 것이라면, `낙화, 첫 사랑` `월식 파티`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그러니 애인아` 등의 시편들이 사랑을 주제로 한 것이다. 다소 긴 제목의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라는 시도 사랑을 노래한 시다. 제목에서 분명히 호명하고 있듯 대천바다의 큰물과 거꾸로 타는 은행나무의 상황을 빌려 시인은 가슴 벅찬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그 사랑은 시시하게 재고 따지고 하는 그런 사랑이 아니라 “대천바다 물 밀리듯 솨아 솨아아아아/온몸의 물길이 못 자국 하나 없이 둑방을 넘어” 오는, 은행나무의 “진액 오른 황금빛 잎사귀들/마지막 물기 몰아 천지사방 물 밀어가듯”하는 크나큰 사랑이다. 대천바다에 물 밀리듯 오는 그런 사랑 어디에 없나? 사랑은 그런 게 아니지. 내가 기꺼이 걸어갈 때 사랑은 물밀 듯 오는 것이지. 무서운 것이지.해설이종암·시인
2009-08-31
일고 지는 바람 따라 청매(靑梅) 꽃잎이 눈처럼 내리다 말다 했다. 바람이 바뀌면 돌들이 드러나 생각에 잠겨 있는 흙담으로 쏠리기도 했다. `꽃 지는 소리가 왜 이리 고요하지?` 꽃잎을 어깨로 맞고 있던 불타의 말에 예수가 답했다. `고요도 소리의 집합 가운데 하나가 아니겠는가? 꽃이 울며 지기를 바라시는가, 왁자지껄 웃으며 지길 바라시는가?` `노래하며 질 수도……` `그렇지 않아도 막 노래하고 있는 참인데` 말없이 귀 기울이던 불타가 중얼거렸다. `음, 후렴이 아닌데!` - 황동규 시집 `꽃의 고요`(문학과지성사·2006)`꽃의 고요`를 두고 부처님과 예수님이 한 자리에서 친구처럼 말씀들을 나누고 계신다. 어느 분의 말씀이 더 앞선 것인지는 굳이 따지지 말자. 대화의 순서가 서로 뒤바뀌어도 아무 상관이 없다. 부처와 예수가 함께 등장하는 그것도 서로 농하듯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시로 만들어진 것은 우리 시문학사에서 황동규 시인의 13시집 `꽃의 고요`가 처음이 아닌가 싶다. 지금 우리 사회는 종교 간의 벽은 높고 그 반목과 질시도 심하다. 부처와 예수가 한 `생명`에 관한 말씀을 나누고 있는 이 장면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자신의 시 속에 부처와 예수의 말씀을 빌려오는 것을 황동규 시인은 어떻게 생각해냈을까. 그 말씀들로 미혹(迷惑)하고 한계적 존재인 우리 인간의 삶과 죽음의 깊은 문제를 실감나게 그려내고 있는 시집 `꽃의 고요`가 나는 참 좋다. 꽃이 진다는 것은 한 생명이 다른 생명으로 건너감이다. “고요도 소리의 집합 가운데 하나가 아니겠는가?”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꽃이 질 때 “노래하며 질 수도….”라는 부처님의 말씀에 내 마음의 모든 문을 열고 놓고 오랜 생각에 잠긴다. 내가 이런 말을 하면 남들이 건방지다 할 것인가? 부처도 예수도 모두 사람 안에 있다. 진정코 사람 안에 부처와 예수가 살아 있어야 한다.해설이종암·시인
2009-08-26
말기 췌장암 선고를 받고도 괜찬타, 내사 마, 살 만큼 살았데이, 돌아앉아 안경 한 번 쓰윽 닦으시고는 디스 담배 피워 물던 아버지, 병원에 입원하신 뒤 항암 치료도 거부하고 모르핀만, 모르핀만 맞으셨는데 간성 혼수*에 빠질 때는 링거 줄을 뽑아 던지며 살려달라고, 서울 큰 병원에 옮겨달라고 울부짖으셨는데, 한 달 반 만에 참나무 둥치 같은 몸이 새뼈마냥 삭아 내렸는데, 어느 날 모처럼 죽 한 그릇 다 비우시더니, 남몰래 영안실에 내려갔다 오시더니 손짓으로 날 불러, 젖은 침대 시트 밑에서 더듬더듬 무얼 하나 꺼내 주시는 거였다 장례비가 든 적금통장이었다 * 간성(肝性) 혼수 : 간이 해독 작용을 못해서 암환자들이 겪는 발작, 혼수상태. -전동균 시집 `거룩한 허기` (랜덤하우스·2008)우리는 모두 제 어미와 아비의 몸을 빌려 이 세상에 나왔다. 그러니 어미와 아비를 올려다 보는 일은 단언컨대 어떤 종교보다도 나랏일보다도 먼저요, 거룩한 일이다. 부모와 자식이 마주보는 이 일 앞에 그 어떤 일도 내세우지 마라. 다 거짓이다. 말기 췌장암 환자였던 아버지를 멀리 떠나보낸 전동균 시인의 그 막막한 심정이 그의 셋째 시집『거룩한 허기』 곳곳에 산재해 있다. 시「겉장이 나달나달했다」는 단 2개의 문장으로 되어 있다. 첫째 문장은 “말기-거였다”라는 긴 문장이고, 둘째 문장은 “장례비가 든 적금통장이었다”라는 짧은 문장이다. 아버지의 대화와 `-는데`, `-더니`의 거듭되는 반복적 사용으로 시집 속에서 10행으로 길게 처리된 첫 문장은 무얼 의미하는 것일까? 이는 췌장암 말기 환자였던 아버지의 극심한 고통과 못난 자식을 걱정하는 마음 또 이걸 헤아려보는 정동균 시인의 아픈 내면의 마음을 담고 있음이다. `겉장이 나달나달했다`는 시의 제목은 둘째 문장 “장례비가 든 적금통장이었다”를 설명하는 것이지만 제 몸의 원뿌리인 아버지와 영원히 헤어져야 하는 시인의 지극한 슬픔의 무늬일 것이다. 떠난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그의 또 다른 시「밥」의 한 구절을 빌려 나는 `시(詩)`의 정의를 내려본다. “시가 본디/만물을 제자리에 모시는 간절한 그리움의 말씀”이다. 아, `거룩한 허기`를 헤아려 보고 또 그것을 언어로 그려내려 안간힘을 쓰고 있는 전동균 시인. 저 사내를 만나보고 싶다.해설이종암·시인
2009-08-24
이게 내가 잡아보던 손이라니 이게 내가 만지던 젖무덤이라니 이게 하얀 국화꽃에 싸여 모란같이 웃으시던 모습이시라니 세의야 세연아 평소 유언처럼 얘기해오던 내 말에 내가 이토록 당혹스러워하는구나 이제 바람에 날려버릴 한줌 가루에 그 많은 추억들이 담겨있었다니…… 이게 너희들이 잡아보던 아빠 손이라니 이게 너희들이 안겼던 아빠의 가슴이라니 이게 너희들이 꽃입술로 뽀뽀하던 아빠의 뺨이라니 - 박찬 시집 `외로운 식량`(문학동네·2008)2007년 1월 박찬 시인의 죽음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었다. 갑작스런 그의 죽음에 많은 사람들은 당혹스러워 했다. 박찬 시인의 다섯째 시집 `외로운 식량`은 그러니까 그의 유고 시집인 셈이다. 시집 속의 시편들은 병마(病魔)로 점점 꺼져가는 몸과 마음으로 박찬 시인이 이 세상에 마지막으로 피워 올린 언어의 불꽃이다. 그 불꽃의 내용은 떠나는 자의 외로움과 남은 사람에 대한 사랑의 빛으로 일렁인다. “외로움은 그의 식량” “누가 내 몸에 들어와 앓고 있는 것이다.” “어차피 가야 할 곳인데/싸목싸목 가면 되지 않겠니” “-세상 참, 괜히 왔다 간다” “문득 돌아보면 이제는 아스라한 풍경들……” “정처 없는 길을 가네./다시는 오지 않을……” “어디에도 울기 좋은 곳은 없더라” “지루하고 막막한 날이 끝나간다” 등의 시구에서 보듯 그는 참으로 외로워 하다가 우리 곁을 떠나갔다. 어쩌면 박찬 시인이 남긴 이 유고 시편들은 마지막 그의 `외로운 식량`이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시「당혹」을 읽으니 무척 당혹스럽다. 아직 살아 있는 시인이 죽어 한 줌 가루가 된 자신을 시적 화자로 내세워 사랑하는 가족들과 헤어져야 하는 안타까움, 그 당혹을 목놓아 울고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두 딸과 아내 그리고 먼저 떠난 어머니와 이제 영원히 헤어져야 하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그러나 받아들여야 하는 분명한 사실을 눈앞에 두고 당혹해하는 시인의 캄캄한 마음이 먹물처럼 시의 행간에서 번져온다. 이 시를 읽는 남은 가족의 당혹감은 또 어떠했을까? 아, 삶과 죽음의 갈라섬이여!해설이종암·시인
2009-08-20
간이며 쓸개를 꺼내 꿈도 꺼내고 추억도 꺼내 먼지와 소음으로 뒤범범이 된 술집과 거리에 늘어놓고는 지나가는 사람들 다 불러모아 약장수처럼 한바탕 너스레를 떨다가 철지난 유행가 가락도 섞어서 저물면 주섬주섬 주워담아 넣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바라보는 새빨간 저녁노을 세상은 즐겁고 서러워 살 만하다고, 그것이 지금 노을이 내게 들려주는 말이리 - 신경림 시집 `낙타`(창비·2008)신경림 시인의 근작 시집 `낙타`를 읽었다. 나는 이 시집에서 표제 시 `낙타`를 비롯한 삶과 죽음의 근원적 성찰을 시도하고 있는 제1부의 여러 시편들에 깊이 매료되어 그 시들을 읽고 또 읽었다. 한계적 존재인 우리네 이쪽의 삶과 또 조만간 누구나 건너가야 할 저쪽의 삶에 대한 신경림 시인의 시적 탐색은 소중한 작업이다. 신경림 시인은 시 `낙타`에서 “낙타를 타고 가리라, 저승길은” “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것도 못 본 체/손 저어 대답하면서,/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그렇게 저쪽으로 담담하게 걸어가겠다고 한다. 또`고목을 보며`에서는 “세월이 가면서 다 상처로 남았을” 고목의 “뒤틀린 가지와 갈라진 몸통이/꽃보다도 또 열매보다도 더 향기롭고 아름다운 것”이라는 인식을 통해 비극적 황홀에 젖기도 한다. 사람이 죽는 것을 우리는 통상적으로 `돌아갔다`라고 한다. 여기에 왔다가 다시 저기로 되돌아가는 길이 우리네 삶이다. 신경림 시인은 돌아가는 길(歸路)을 “약장수처럼 한바탕 너스레를 떨다가 철지난 유행가 가락도 섞어서” 그렇게 웃으며 노래하면서 가려고 한다. 이는 “저물면 주섬주섬 주워담아 넣고 돌아오는 버스 안”과 같은 우리네 삶이 그래도 “세상은 즐겁고 서러워 살 만하다”고 삶과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큰 긍정의 자세에서 기인한다. 원한 맺힌 것 없이 웃으며 노래하며 저 세상으로 건너가는 일이 가장 아름다운 발걸음이다. 그 발걸음으로 얻으려면 지금 여기의 삶이 아름다워야 한다.해설이종암·시인
2009-08-18
오지 않는 잠을 부르러 강가로 나가 물도 베개를 베고 잔다는 것을 안다 물이 베고 잠든 베갯머리에는 오종종 모인 마을이 수놓아져 있다 낮에는 그저 강물이나 흘려보내는 심드렁한 마을이었다가 수묵을 치는 어둠이 번지면 기꺼이 뒤척이는 강물의 베개가 되어주는 마을, 물이 베고 잠든 베갯머리에는 무너진 돌탑과 뿌리만 남은 당산나무와 새끼를 친 암소의 울음소리와 깜빡깜빡 잠을 놓치는 가로등과 물머리집 할머니의 불 꺼진 방이 있다 물이 새근새근 잠든 베갯머리에는 강물이 꾸는 꿈을 궁리하다 잠을 놓친 사내가 강가로 나가고 없는 빈집도 한 땀, 물의 베개에 수놓아져 있다 - 박성우 시집 `가뜬한 잠`(창비·2007)물도 잠을 자는가? 만약에 잠을 잔다면 강물도 베개를 베고 자는가? 박성우 시인은 그렇다고 말한다. 시인이 그걸 시골 마을에서 직접 보았다는데 어쩔 것인가. 어느 여름날 밤, 고향에 내려간 시인이 잠이 오지 않아 마을 앞의 강가로 나간 모양이다. 그리고 강 건너편에 앉아 밤이 이슥토록 마을 앞을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다가 문득 마음의 화폭에 새겨진 커다란 그림 한 장이 바로 시 `물의 베개`가 되었다. “수묵을 치는 어둠이 번지면 기꺼이/뒤척이는 강물의 베개가 되어주는 마을,”인 “물이 베고 잠든 베갯머리”를 나는 왜 보지 못했던가. 여름날 밤, 내 고향 마을 앞 동창천에서 수도 없이 봐 왔던 이 그림을. “물이 베고 잠든 베갯머리에는”는 위 시 4연에 열거된 것처럼 우리네 살림살이가 그대로 수놓아져 있다. 고된 농사일로 관절을 상한 늙은 농부의 신음 소리와 자식 대학등록금 걱정으로 잠 못 이루는 중년 부부의 대화도, 술에 찌든 서방을 탓하는 젊은 베트남 새댁의 서툰 악다구니와 몇 명 되지는 않지만 새근새근 잠자는 아이의 숨소리도 수놓아져 있을 테다. 나는 박성우 시인의 둘째 시집 `가뜬한 잠`을 읽으며 그가 언어로 짜 올린 이러한 감동적인 큰 그림을 여럿 만날 수 있어 참 행복했다.해설이종암·시인
2009-08-12
시골 성당 젊은 신부 아름다운 그 시절 가난과 깊은 정이 평생에 그리운데 어이해 십자가 지고 명동언덕 올라섰나 불화살 최루탄이 발 앞에 날아와도 하느님 모습 닮은 인간이 존엄해 자유와 민주의 횃불 환하게 밝힌 이 - 구중서의 김수환 추기경 평전 `사랑하고 또 사랑하고 용서하세요` (책만드는집·2009)회보 `한국작가회의` 제61호 표지에서 문학평론가 구중서 선생이 쓴 시조 `김수환 추기경`을 만났다. 구중서 선생은 일찍이 70~80년대 한국문학의 리얼리즘론과 민족문학론의 논리와 영역을 개척하고 그 텃밭을 일궈온 분이다. 대학교 정년을 다 마치고 자연인으로 돌아간 선생이 틈틈이 격조 높은 수필과 시조를 쓰면서 한국문학이라는 큰 산맥에 흙 한 줌 더 보태는 이 일은 참 아름답고 소중한 것이다. 2009년 2월16일 김수환 추기경께서 선종(善終)하셨다. 종교 간의 벽을 뛰어넘어 추기경의 선종을 안타까워하는 애도의 물결이 전 국민의 가슴에 넘쳐흘렀다. 김수환 추기경의 삶은 “자유와 민주의 횃불 환하게 밝힌 이”라는 시의 마지막 구절처럼 우리 한국 현대사의 산 증인이자 한국 민주주의의 등불이었다. 골고다 언덕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삶처럼 추기경께서 “십자가 지고 명동언덕 올라”섰던 그 이유가 “하느님 모습 닮은 인간이 존엄해”라는 저 평범한 말씀이 독자의 마음에 감동의 눈물을 맺히게 한다. 그렇다. 그 무엇보다 인간이 존엄하다. 이걸 지켜내고 그 마음자리를 넓혀가는 것이 종교의 신성한 업무이리라. 살아있는 우리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추기경의 말씀인 듯한 평전의 제목 `사랑하고 또 사랑하고 용서하세요`라는 이 깊고 큰 의미를 우리는 늘 되새기며 실천해나가야 할 일이다. 이 시가 수록되어 있는 시집`불면의 좋은 시간`(책만드는집·2009)은 구중서 선생의 첫 시집인데, 40년의 문단 생활의 예지가 오롯이 녹아있고, 선생이 직접 쓰고 그린 글씨와 그림이 함께 담겨 있어 시집을 읽는 독자의 기쁨은 더욱 크다. 해설이종암·시인
2009-08-10
자전거 짐받이에서 술통들이 뛰고 있다 풀 비린내가 바퀴살을 돌린다 바퀴살이 술을 튀긴다 자갈들이 한 차씩 뛰어 술통을 넘는다 술통을 넘어 풀밭에 떨어진다 시골길이 술을 마신다 비틀거린다 저 주막집까지 뛰는 술통들의 즐거움 주모가 나와 섰다 술통들이 뛰어내린다 길이 치마 속으로 들어가 죽는다 - 송수권 시선집 `여승`(모아드림·2002) 1975년 `문학사상` 신인상에 `山門에 기대어` 외 4편이 당선되어 등단한 송수권 시인. 그의 등단 작품이자 대표작이기도 한 `山門에 기대어`는 한국문단과 독자들에게 오래 회자되고 있는 작품이다. “가을산 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 낱”으로 비유된 죽은 누이(실제는 남동생이었다고 함)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과 한을 유장하고 처연한 가락에 실어 놓은 송수권의 노래는 가히 절창이었다. 송수권 선생이 내일 제11회 `푸른시인학교` 초청 시인으로 포항에 온다고 한다. 어서 달려가 그의 노래를 듣고 비교적 선생의 최근작인 `시골길 또는 술통`이라는 시를 읽는다. 무척 재미가 있다. 시 속의 저 시골길, 1970년대 내가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의 시골길이 꼭 이랬다. 학교가 있고 버스가 다니던 명대 마을 양조장에서 막걸리를 가득 실은 커다란 짐자전거가 이웃 마을인 사깔, 북지, 그리고 우리 동네 길명의 신작로로 들락날락 했다. 짐칸엔 두 말들이 하얀 플라스틱 술통이, 자전거 바퀴 양옆에도 쇠고리에 술통을 매달고 비포장도로에 자전거가 씩씩 달려가던 그 풍광이 시의 모습 그대로였다. 이런 살아 숨쉬는, 생명력 넘치는 시를 만나면 괜히 즐겁다. 시골길도 술을 마신 것 같고, 이 시를 읽는 나도 詩도 술을 마신 것만 같다. “길이 치마 속으로 들어가 죽는다”는 마지막 행이 기막힌 표현이다. 주모의 치마 속은 아주아주 무서운 곳이다. 해설이종암·시인
2009-08-06
비 오는 숲의 모든 소리는 물소리다 숲의 벚나무 가지들이 검게 변한다 숲 속의 모든 빛은 벚나무 껍질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흑탄처럼 검어진 우람한 벚나무를 바라보고 있으면 숲에서 사라진 모든 소리의 중심에는 그 검은빛이 관여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마른 연못에 물이 들어차고 연못에 벚나무와 느티나무의 검은 가지와 잎과 흐린 하늘 몇 쪽과 빗방울들이 만드는 둥근 징소리의 무늬들 가득하다 계류의 물소리는 숲을 내려가는 돌다리 위에서 어느 순간 가장 밝아지다가 뚝 떨어지며 이내 캄캄해진다 현통사 霽月堂의 月자가 옆으로, 누워 있다 계곡 물소리에 쓸린 것인지 물 흐르는 방향으로 올려 붙은 달, 물에 비친 달도 현통사 옆에선 떠내려 갈 듯하다 비 오는 날 숲의 모든 소리는, 물소리 뒤에 숨는다 - `2009현대문학 수상 시집`(현대문학, 2008)다른 사람이 쓴 좋은 시를 베껴 옮겨 적은 내 공책에서 조용미 시인의 시를 찾아 읽는다. `魚飛山` `삼베옷을 입은 自畵像` `검은 담즙` `소나무` `물소리를 듣는다-묵계리` `겨울 논` `門을 열다`와 같은 시를 읽으며 조용미의 시는 벼랑의 삶에서 생(生)과 사(死)의 긴 고랑을 깁는 환(幻)의 노래라는 생각을 했다. 위 시에서 나는 소리(音)라는 말, 거처(居處)라는 말은 알겠는데, `소리의 거처`는 잘 모르겠다. 검은 빛이라는 말은 알지만서도, “숲에서 사라진 모든 소리의 중심에는 그 검은빛이 관여하고 있음”이라는 것은 잘 모른다. 조용미의 시 `소리의 거처`는 어렵다. 시적 의미의 해독이 분명하지 않는데도 이 시는 거듭 나를 자기 안으로 끌어당긴다. 그래서 자꾸 읽는다. 분명치 않은 시의 의미가 거문고 소리처럼 내 몸을 통과한다. 내 몸에 “둥근 징소리의 무늬들”이 쌓이는 것만 같다. 좀 더 있으면 제월당의 月자가 옆으로 누운 이유도, 소리의 거처도, 소리에 관여하는 검은빛도 이해할 것만 같다. 뻥이다. 어이쿠, 얼른 저 물소리 뒤로 숨어야겠다.해설이종암·시인
2009-08-04
기도는 하늘의 소리를 듣는 것이라 저기 홀로 서서 제자리 지키는 나무들처럼 기도는 땅의 소리를 듣는 것이라 저기 흙 속에 입술 내밀고 일어서는 초록들처럼 땅에다 이마를 겸허히 묻고 숨을 죽인 바위돌처럼 기도는 간절한 발걸음으로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깊고 편안한 곳으로 걸어가는 것이다 저녁별처럼 - 문정희 시집 `나는 문이다`(뿔·2007)문정희의 시는 언제나 대담하고 거침없다. 그의 시가 가진 어법은 솔직하고 단도직입의 그것이다. 그의 시는 여성인 시인이 세상을 향해 언제나 큰 소리로 내뱉고 싶었던 `내 몸의 말`로 만들어진다. “응”이라는 글자를 남녀의 성 행위로 비유한 `응`, “밥을 나와 함께/가장 많이 먹은 남자/전쟁을 가장 많이 가르쳐준 남자”를 노래한 `남편`, 부처의 얼굴을 잃고 자연의 돌로 돌아가는 군위 인각사 앞마당 석불을 노래한`돌아가는 길`, “키 큰 남자를 보면/누에처럼 긴 잠 들고 싶다”라고 하는 `키 큰 남자를 보면` 등의 시편들이 내 뇌리에 오랫동안 남아있는 그의 작품들이다. 위 시 `저녁별처럼`은 `기도`에 관한 노래다. 문정희가 부르는 이 노래는 째째하게 교회나 성당, 절간 같은 어느 한 장소에 얽매여 있지 않다. 특정 종교의 공간에 한정되지 않으면서도 그 장소 모두에 발을 대고 있음이다. 진정한 기도는 그러한 것이리라. “땅에다/이마를 겸허히 묻고/숨을 죽인 바위돌처럼” 자신의 잘못에 대해 참회(懺悔)하고 본래의 자기를 찾아가는 노력을 다하는 `기도`는 “한 번도 가보지 못한/깊고 편안한 곳으로 걸어가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내 몸이 바로 새 세계를 여는 문(門)이 되는 것이리니. 아, 그러고 보니 시집 제목이 `나는 문이다`로 되어있다. 이 뭐꼬?.해설이종암·시인
2009-08-03
일주문 두리기둥처럼 거침없이 위로 솟구친 향나무 한 그루. 이종문 시인이 그대는 왜 여기 우두커니 서 있는가 물으니, 내가 왜 여기 우두커니 서 있는지 그대가 궁금해 하라고 여기 우두커니 서 있다고 대답한 바로 그 나무다. 괜히 자옥산 기슭 옥산서원 뜰에 우두커니 서서 이종문을 궁금하게 한 멋대가리 있는 향나무에게 다가서서, 거친 살결을 짚으며 오늘은 내가 묻는다. 그대, 이 추운 겨울날 여기 우두커니 서서 무얼 하시는가 했더니, 그냥 심심해서 하늘에 대고 글씨를 쓰고 있다며, 이렇게 한 획 그어올리는 데 한 사백년쯤 걸렸다며, 지금도 그어올리는 중이니 말 같은 거 걸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대가 쓰고 있는 글자 대체 무슨 자냐고 했더니 안 그래도 추운데 이종문보다 더 귀찮은 놈이 왔다며, 뚫을 곤자(ㅣ)도 모르는 놈이 시인이랍시고 돌아다니느냐며. - 계간지 `문학마당`(2006년 봄호)대구 시단에 50~60대 시인들의 모임인 `시오리`가 있다. 여러 시인들의 부러움과 시기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이 작은 문학 단체에 찐빵의 앙코같은 존재인 김선굉 시인이 있다. 그는 고스톱도 잘하고 우스개 소리도 욕도 잘한다. 또 나만 보면 “우리 종암이 꼬치 많이 컸나 한번 보자.”며 손을 내미는 재미있는 시인이다. 그가 쓴 시들도 시인을 닮아 무척 재미가 있다. 이 시도 그렇지 않은가. 세상에 `우두커니 나무`가 어디 있는가? 그러나 김선굉 시인이 그냥 있다고 하면 있는 것이다. 경주 안강의 옥산서원 마당에 서 있는 키가 큰 향나무는 이제 그 이름이 `우두커니 나무`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그 나무는 “멋대가리 있는 향나무”이다. 한문학자이자 시조 시인 이종문을 무척 궁금하게 한 나무이고, 또 김선굉을 두고 “뚫을 곤자(ㅣ)도 모르는 놈이 시인이랍시고 돌아다니느냐며.” 따끔하게 훈계를 하는 그런 멋진 나무다. 서예 공부를 시작한 지 이제 5개월 남짓 된, 붓글씨에 아직 미숙아인 이종암 시인이 조만간 그를 찾아가 또 한 수 가르침을 배울 것 같다. 회재 이언적 선생과 친구이기도 했을 그는 이제 많이 바쁘고 귀찮게 되었다. 지금도 그는 올곧은 “뚫을 곤자(ㅣ)” 쓰기를 멈추지 않고 있겠지. 그 글쓰기는 언제 다 완성될까? 한갓 사물인 나무와 소통(疏通)하는 시인도, 그 시인의 가슴속에 자리한 `우두커니 나무`도 참 멋대가리가 있는 존재이긴 마찬가지다.해설이종암·시인
2009-07-20
말복날 개를 잡아 동네 술추렴을 했다 가마솥에 발가벗은 개를 넣고 땀 뻘뻘 흘리면서 장작불을 지폈다 참이슬 두 상자를 다 비우면서 밭농사 망쳐놓은 하늘을 욕했다 술이 거나해졌을 때 아랫집 김씨가 나에게 말했다 -이건 오씨가 먹어요, 엘레지요 엉겁결에 길쭉하게 생긴 고기를 받았다 엘레지라니? 농부들이 웬 비가(悲歌)를 다 알지? -엘레지 몰라요? 개 자지 몰라요? 30년 동안 국어선생 월급 받아먹고도 `엘레지`라는 우리말을 모르고 있었다니! 그날 밤 꿈에서 나는 개가 되었다 가마솥에서 익는 나의 엘레지를 보았다 - 오탁번 시집 `벙어리장갑`(문학사상사·2002)무더운 여름 날씨다. 삼계탕이니 보신탕 같은 영양식이 절로 생각나는 철이다. 어느 말복날, 오탁번 시인이 충북 제천의 고향 마을에 내려가 동네 사람들과 같이 가마솥에 개 한 마리를 푹 삼고 술추렴을 한 모양이다. 그 체험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것이 재미난 시 `엘레지`이다. 구신(狗腎 )이라는 개의 자지(좆)를 가리키는 순우리말이 `엘레지`라는 걸 시인이 몰랐다는 데서 오는 놀라움과 반성이 이 시의 창작 모티프가 되었다. “-이건 오씨가 먹어요, 엘레지요/엉겁결에 길쭉하게 생긴 고기를 받았다/엘레지라니? 농부들이 웬 비가(悲歌)를 다 알지?/-엘레지 몰라요? 개 자지 몰라요?”에서 보는 농부의 거침없는 말과 대학 교수의 당황한 속내가 참 해학적이다. 여기서 시적 화자인시인은 놀라면서도 절망한다. 비가(悲歌) 혹은 만가(輓歌)를 뜻하는 외래어 `엘레지(elegie)`는 알고 있으면서도 순우리말인 `엘레지`를 몰랐다니. 시골 농부도 알고 있는 것을 그것도 30년 동안이나 일류 대학에서 국어를 가르쳤다는 교수가 몰랐다니. 이 놀라움과 반성은 “그날 밤 꿈에서” “가마솥에서 익는/나의 엘레지를 보”는 것으로 변용된다. 오탁번의 시는 재미있다. 위 시 `엘레지`를 비롯하여 `앞으로는 안 하고 뒤로 했다`라는 시속의 남녀 음담을 비련의 가족사로 환치시킨 `굴비`, “엄마가 동생공장공장장”이라는 동시 `엄마` 등등의 시들은 해학과 천진난만한 동심의 빛으로 그려져 있다. 무더운 여름날 읽은 오탁번의 시 `엘레지`, 보신탕 한 그릇 족히 먹은 듯하다.해설이종암·시인
2009-07-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