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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6·3 지방선거, 지역은 없었다

6·3 전국동시지방선거가 끝났다. 지방 행정의 책임자와 이를 견제할 지방의회가 구성되었고, 일부 지역에서는 재·보궐 선거를 통해 14명의 국회의원도 새로 선출됐다. 결과와 무관하게 끝까지 최선을 다한 모든 후보자와 유권자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어느 때보다 지역 이슈가 사라진 지방선거였다. 선거판의 주된 담론은 처음부터 끝까지 중앙정치가 주도했다. 언론은 공천 갈등과 스타 정치인들의 행보에만 집중했다. 지역 언론조차 지역 이슈가 아닌 여의도 정치에 포커스를 맞췄다. 실제 경북의 한 언론사 유튜브 채널에는 선거 기간 내내 지역과 무관한 중앙 정치인들이 출연했다. 이번 선거에서 포항도 한때 전국 뉴스에 등장했다. 국민의힘 공천 갈등과 탈락 후보들의 반발 등 기사들이 쏟아졌다. 하지만 후보가 확정되자 포항은 다시 뉴스에서 사라졌다. 도시가 직면한 난제들은 산적해 있지만, 후보별 공약을 제대로 분석한 기사 하나 찾아보기 어려웠다. 공약은 실종되고, 현수막과 선거운동 차량의 소음만이 거리를 메웠다. 당선 가능성이 가장 높은 후보는 선거관리위원회가 주관하는 법정 토론회에조차 불참했다. 그럼에도 선거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지방선거의 현주소다. 구조적인 문제는 분명하다. 특정 정당의 공천이 곧 당선이라는 등식이 굳어질수록 선거는 맹탕이 된다. 가장 치열한 경쟁이 시민 앞이 아닌 정당의 공천 과정에서 벌어지기 때문이다. 공천이 사실상 결승전이 되는 구조에서, 후보자들의 시선은 시민이 아니라 당의 권력을 향한다. 그 결과 지역 의제는 뒷전이 되고 유권자의 관심은 멀어진다. 정당의 책임도 크다. 경쟁이 치열한 지역에는 공약을 쏟아붓지만, 이른바 ‘텃밭’에서는 정치적 구호만 되풀이된다. 특정 지역을 안전지대로 분류하는 순간, 후보 검증은 느슨해지고 공천은 사유화되기 쉽다. 공천이 공공재라는 감각은 희미해진다. 반면 경쟁이 치열한 지역의 풍경은 다르다. 접전이 예상되는 곳에는 언론이 몰리고 기사가 쏟아진다. 다툼이 치열하면, 지역 의제도 함께 공론화된다. 후보는 한 표가 아쉬워서라도 현안에 집중하고 언론은 이에 반응한다. 경쟁이 견제 장치가 되는 것이다. 이번 선거에서도 그런 지역이 주목을 받았다. 판세가 흔들리는 곳은 매일 뉴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지역의 의제가 언론의 주목을 받고 해법을 요구하니 후보들도 긴장할 수 밖에 없다. 접전 양상의 긴장감은 선거를 흥미롭게 만든다. 다시 우리 지역으로 눈을 돌려본다. 여전히 해결해야 할 지역 현안은 쌓여있다. 양질의 일자리가 없으니 인구는 빠져나가고, 지역 경제는 활력을 잃어간다. 종합병원은 멀고, 사회 인프라는 노후화되고 있다. 돈을 벌어도 쓸 곳이 없으니 자본은 외부로 빠져나간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이런 문제들은 끝내 진지하게 다뤄지지 않았다. 투표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선거가 색깔 고르기로 끝나버리면, 앞으로의 4년간 지역의 난제들을 제대로 해결할 수 없다. 우리 지역이 이번 선거에서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는지 냉정하게 따져야 한다. 그리고 새로운 지방행정부와 시·도의회는 다시 지역 의제에 집중해야 한다. 6·3 지방선거가 우리에게 남긴 숙제는 분명하다. 지방선거의 주인은 지역민이다. /주재원 한동대 교수

2026-06-04

5·18과 언론의 사명

2017년 1200만 관객을 사로잡았던 영화 ‘택시 운전사’. 이 영화는 한 평범한 택시 기사가 독일 기자를 태우고 광주로 향하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총성과 비명이 가득한 1980년 5월 광주의 한복판에 홀로 남겨진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 그는 목숨을 걸고 광주의 참상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가 남긴 영상은 광주 민주항쟁을 세계에 알리는 결정적 증언이 되었고, 그의 업적은 한국 민주화에 큰 이정표가 되었다. 그가 취재한 영상이 전세계에 보도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도 신군부가 조작한 뉴스를 역사의 일부로 착각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역사적 진실은 누군가의 용기와 양심 그리고 사명감으로 인해 비로소 세상에 드러난다.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서 벌어진 일은 반민주적인 부당한 권력에 대항해 시민들이 온몸으로 저항한 역사였다. 하지만 당시 언론들은 진실을 보도하지 못했다. 신군부가 통제한 언론은 광주의 시민들을 북에서 온 폭도로 몰았고, 국가 폭력의 잔혹함은 철저히 가려졌다. 언론이 오히려 국민의 눈과 귀를 가린 대표적인 사건이며 언론의 치욕스러운 역사적 오점으로 남아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언론을 신뢰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언론이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충분히 독립적이지 못했고, 때로는 진실보다 이해관계를 앞세웠다는 비판도 일리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언론의 자리를 유튜버나 정치적 선동가에게 넘겨줄 수는 없다. 자신과 비슷한 정치적 성향을 가진 유튜버의 말을 검증 없이 믿고, 그것을 사실처럼 받아들이는 작금의 유사 언론 현상은 일종의 주술적 신앙에 가까운 모습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언론의 역할은 불편한 사실을 취재하고, 서로 다른 의견을 검증하며, 권력이 감추려는 것을 끝까지 묻는 일이다. 그것이 언론의 존재 이유다. 언론은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산업이 아니다. 사회가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지, 무엇을 의심해야 하는지, 누구의 고통을 외면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묻는 공론장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그래서 민주주의 사회에서 언론은 입법, 사법, 행정에 이은 네 번째 권력기구라고 한다. 언론이 무너지면 시민들은 사실이 아니라 편향된 주관에 따라 판단하게 되고, 민주주의는 토론이 아니라 선동에 의해 움직이게 된다. 미디어 환경은 급변하고 있다. 소위 넷플릭스와 유튜브의 시대라고 한다. 그러나 미디어의 형태가 달라졌다고 해서 언론의 책임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일수록 무엇이 사실인지 확인하고, 권력과 여론의 압력 속에서도 진실을 보도하는 언론의 역할은 더 중요하다. ‘언론 없는 정부보다 정부 없는 언론을 택하겠다’는 미국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의 명언은 여전히 유효하다. 5·18 민주항쟁 46주년을 맞아 다시 묻는다. 오늘의 언론은 광주의 진실을 알리고자 했던 힌츠페터의 기자 정신 앞에 존재론적 질문을 반추해보아야 한다. 권력의 편이 아니라 시민의 편에 서는 것, 침묵이 강요되는 순간에도 진실을 말하는 것, 민주주의 사회를 지키는 책임을 다하는 것. 그것이 5월의 광주가 오늘의 언론에 요구하는 사명이다. /주재원 한동대 교수

2026-05-21

어버이날과 스승의 날 사이에서 길을 잃다

5월 8일, 어버이날이다. 부모님의 가슴에 꽃 한 송이를 달아드리는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진다. 서구 사회에도 ‘어머니의 날(Mother’s Day)’이 있지만, 부모 모두에게 감사를 드리는 어버이날은 한국식 정서이자 전통이다. 그러나 올해 어버이날을 맞이하는 마음은 예년과 달리 무겁다. 대부분의 가정에서 하나뿐인 자녀에게 부모의 사랑이 집중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문제는 그 사랑이 왜곡된 형태로 발현된다는 데 있다. 몇 년 전부터 학교 현장에서 교사의 정당한 생활지도에 악성 민원을 제기하고, 아동학대로 신고하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각종 민원들의 홍수에 현장체험학습과 체육활동은 위축되어 유명무실해졌다. 급기야 감당하기 힘든 학부모의 압박을 견디다 못해 초등교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까지 벌어졌다. 교육 현장에서는 ‘아무 것도 안하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라는 자조적 분위기가 만연하다. 이대로는 공교육이 무너질 수 밖에 없다. 더 심각한 것은 자녀들이 이를 배운다는 사실이다. 부모가 교사를 불신하고, 정당한 교육행위를 문제 삼는 모습을 보며 아이들 역시 교사를 존중하지 않는다. ‘잘못된 행위를 해도 부모가 해결해줄 것’이라는 왜곡된 확신을 자녀에게 심어주는 것, 그것이 부모의 바람직한 역할인지 냉정히 물어야 한다. 자녀에 대한 맹목적인 보호는 사랑이 아니라 아이의 성장을 가로막는 장벽이 될 수 있다. 그렇게 자란 아이들은 건강한 사회 구성원이 될 수 없다. 문득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스승의 날이 다가오면 어머니는 시장에서 구입한 손수건을 곱게 포장해 주시면서 말씀하셨다. “선생님은 부모님과 같은 분이니, 선생님 말씀을 잘 새겨들어야 한다.” 그 한마디는 어린 마음에 깊이 새겨졌다. 부모의 은혜와 스승의 은혜는 지금까지 나를 성장시킨 원동력이라는 점에서 결코 다르지 않았다. 그 시절 부모들은 교사를 신뢰했고, 교사들은 그 신뢰에 책임으로 응답했다. 그 믿음 위에서 아이들은 가정과 학교를 오가며 성장했다.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 임금과 스승과 부모는 하나라는 뜻이다. 오늘날 군주는 사라졌지만, 스승과 부모가 한 사람의 성장을 함께 이끈다는 본질적 가치는 시대를 초월한다. 5월에 어버이날(8일)과 스승의 날(15일)이 일주일 간격으로 나란히 놓인 것도 이 같은 철학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두 기념일이 같은 계절에 어깨를 나란히 하는 데는, 부모와 스승이 결국 같은 뿌리의 가치를 공유한다는 사회적 인식이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부모와 스승은 대치하는 존재가 아니라 협력하는 존재여야 한다. 가정과 학교가 서로를 신뢰하고 협력할 때, 아이는 비로소 건강하게 자란다. 과잉보호의 온실 속에서 자란 아이는 실패를 견디는 힘을 잃고, 타인과 더불어 사는 법을 배우지 못한다. 부모의 사랑은 아이가 넘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넘어졌을 때 다시 일어설 힘을 길러주는 데서 더 깊어진다. 어버이날에 다시 묻는다. 부모와 교사가 함께 아이들에게 물려줄 값진 유산은 무엇인가? 스스로 일어서는 법을 아는 아이, 실패 앞에 타인을 탓하지 않는 아이, 부모와 스승 모두의 은혜를 함께 간직하는 아이 — 그것이 어버이날과 스승의 날이 남겨야 할 유산이다. /주재원 한동대 교수

2026-05-07

스포츠 생중계 시대의 종말

최근 JTBC의 ‘2026 북중미 월드컵’ TV 독점 중계권을 두고 여러 논란이 확산되었다. 이재명 대통령까지 나서 ‘보편적 시청권’을 언급하자 뒤늦게 KBS가 공동 중계에 뛰어들었다. 언론에서는 월드컵이나 올림픽과 같은 메가 스포츠 이벤트에 대한 보편적 시청권의 관점에서 이번 사태를 바라보지만, 정작 더 심각한 문제는 스포츠 생중계 시청 행태의 근본적인 변화에 있다. 올해 2월 밀라노 동계올림픽이 열렸다. 닐슨코리아가 집계한 개막식 생중계 시청률은 1.8%였다. 이는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개막식 시청률(44.6%)이나, 코로나 시기 치러진 2021년 도쿄 올림픽(17.2%)과 비교해 턱없이 낮은 수치다. 때로는 숫자 하나가 시대의 흐름을 보여준다. 일각에서는 1962년 이후 처음으로 지상파 올림픽 중계가 무산되어 발생한 참사라고 하지만, 이를 JTBC 독점 중계의 문제로만 볼 수는 없다. 보다 근본적인 변화가 이미 방송 업계를 강타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큰 변화 중 하나는 유튜브를 통한 ‘하이라이트 시청 문화’의 보편화다. 글로벌 컨설팅 기업 알트만솔론이 2024년 3000명의 스포츠 팬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18~24세 팬 중 라이브 경기 전체를 시청하는 비율은 31%에 불과했다. 영국의 통계업체 원폴에 따르면 2024년 기준 10~20대의 80% 이상이 TV가 아닌 스마트폰으로 스포츠경기를 시청한다. 인스타그램 릴스, 틱톡, 유튜브 쇼츠 등이 그들에게는 익숙한 스포츠 세계다. 1분 미만의 편집된 영상에 익숙한 시청자들에게 두세 시간짜리 스포츠 생중계는 너무나 지루한 의식에 가깝다. 실제로 2024년 NBA(미국농구리그) 정규시즌의 ESPN 단독 중계 경기는 전년 대비 7% 하락했으며, NHL(북미하키리그)은 2024-25시즌 시청률이 전년 대비 13% 급감했다. MLB(메이저리그야구)의 가장 큰 행사인 ‘월드시리즈’의 하락세는 더욱 심각하다. 1991년 월드시리즈 7차전은 미국 전역에서 5034만 명이 시청했다. 하지만 2023년 월드시리즈의 평균 시청자는 911만 명으로 통계업체 닐슨이 집계를 시작한 1963년 이래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 TV는 한 때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시청하는 공동체 미디어였다. 1977년 홍수환의 4전5기, 1983년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 대회의 4강 신화 등은 마을을 넘어 전 국민을 하나로 모은 서사였고, 이를 가능하게 했던 것이 바로 TV 중계방송이었다. 스포츠 중계가 만들어내는 국가주의와 집단주의의 폐해도 분명 존재하지만, 공동체의 공통된 서사가 사라지고 개별화된 미디어 소비만 추구하는 현 상황이 대안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스포츠 생중계가 제공하던 집단적 경험은 소리 없이 사라져가고 있다. 알트만솔론은 현 상황에 대해 “애피타이저와 디저트가 메인 요리가 되어버렸다. 스포츠 경기에 관심을 유도하기 위해 만든 짧은 콘텐츠가 경기 그 자체보다 더 인기를 끄는 시대가 도래했다”고 언급했다. 스포츠 팬들이 스마트 미디어 환경에 익숙해지면서 시청 시간은 점점 짧고 파편적인 단위로 쪼개진다. 스포츠의 서사는 사라지고, 화려한 순간들만 편집되어 소비된다. 이런 상황에서 월드컵의 보편적 시청권 논의는 큰 의미가 없다. 스포츠 중계 시대의 종말은 이렇게 다가온다. /주재원 한동대 교수

2026-04-23

벌거벗은 임금님의 교훈

‘벌거벗은 임금님’, 누구에게나 친숙한 안데르센의 동화다. 권력의 위선을 이보다 더 쉽고 직관적으로 표현한 우화는 드물다. 임금의 허영심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옷이라는 허구적 상상력에 매료되고 마침내 벌거벗은 채 행진을 감행한다. 모두가 임금이 벌거벗었다는 사실을 알지만 어느 누구도 입을 열지 못한다. 두려움 때문이다. 권력 앞에서 사람은 진실보다 먼저 안위를 택한다. 위선과 침묵은 그렇게 새로운 질서가 된다. 마침내 한 아이의 입에서 한마디가 터져 나온다. “임금님이 아무것도 입지 않았다.” 그 한마디는 권력 앞에 길들여진 침묵을 깨고 사람들로 하여금 진실을 마주하게 한 가장 중요한 장면이다. 오늘날 국제정치에도 이런 장면이 낯설지 않다.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을 향해 군사행동에 나서고, 그 여파가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다. 누군가는 생명을 잃고, 누군가는 삶의 터전을 잃는다. 멀리 떨어진 나라의 시민들조차 유가와 환율, 금융시장의 동요 속에서 불안해하고 있다. 전쟁은 총성이 닿는 곳을 넘어, 평범한 일상과 오랜 기간 형성해 온 국제질서까지 함께 허문다. 그런데도 세계는 이상하리만치 조용하다. 미국과 이스라엘에 대한 분노와 비판은 사라지고, 외교적 차원의 공식 논평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힘센 국가의 일방적 폭력을 잘못이라 부르지 못한다. 냉혹한 국제 질서에서 국가의 힘은 곧 명분이 되고, 침묵은 생존 전략이 된다. 물론 국제정치는 냉엄하다. 국가는 도덕 교과서가 아니라 이해관계의 계산에 의해 움직인다. 특히 미국과 동맹 관계에 있는 한국으로서는 모든 사안을 도덕적 언어로만 재단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안보와 외교, 경제가 복잡하게 얽힌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다. 하지만 힘 있는 자의 행동에는 관대하고, 약한 자의 저항에는 엄격한 국제질서는 정의롭지 못하다. 원칙이 국력에 따라 달라지고, 도덕이 진영에 따라 변한다면, 그 세계는 오래 버틸 수 없다. ‘벌거벗은 임금님’은 사실 어른들을 위한 동화다. 권력은 늘 화려한 언어와 장엄한 명분으로 자신을 치장한다. 사람들은 거기에 압도되고, 침묵은 신중함으로 포장되며, 비겁은 현실주의라는 합리적 이름을 얻는다. 그러나 진실은 그런 장식 속에서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벌거벗은 임금님 놀이를 하고 있다. 자신들의 행동이 얼마나 부끄러운지조차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폭력적이고 위선적인 행동을 일삼고 있다. 분명 비난받아야 마땅한 일임에도 전 세계는 침묵을 지키고 있다. 마치 벌거벗은 임금님의 행진을 바라보는 군중들처럼 숨죽이며 다음 행보를 지켜본다. 지금 우리에게는 잘못된 전쟁 앞에서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 동맹이라는 이유로 판단까지 위탁하지 않는 이성, 힘 앞에서도 원칙을 접지 않는 자존감이 필요하다. 벌거벗은 임금의 행렬은 늘 성대하다. 주변은 간신들의 아첨과 박수로 가득하고, 침묵은 충성으로 오인된다. 그러나 그 행렬을 멈추는 것은 대포도, 군대도 아니다. 단 하나의 진실한 외침이다. 지금 전 세계가 기다리는 말도 결국 그것일지 모른다. 임금님은 벌거벗었다. /주재원 한동대 교수

2026-04-09

혐오의 언어, 무너지는 정치

정치의 위기는 정치인들의 말에서 비롯된다. 말이 거칠어지면 생각과 행동이 과격해진다. 그렇게 정치는 전쟁이 된다. 전쟁의 언어는 정치의 기본 요소인 ‘대화’와 ‘타협’을 ‘나약함’과 ‘배신’으로 평가절하한다. 정치를 잃은 사회는 설득의 방법을 망각한다. 어느 순간 우리 정치는 상대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와 존중을 잃었다. 최근 보수 정치인 장예찬 씨가 유튜브 방송에서 보수 논객 조갑제 대표와 조선일보 양상훈 주필 등을 겨냥해 “늙은이들이 제정신인가”라고 비난해 논란을 키웠다. 정치적 입장 차이를 논리적으로 비판한 것이 아닌, 연령을 조롱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정치인들이 유혹에 빠지기 쉬운 공격 방식은 비판하고자 하는 사람의 배경을 건드리는 것이다. 세대·성별·국적·지역·학력·직업 등이 그것이다. 정치적 공세의 초점이 논리나 사실이 아니라, 상대의 배경으로 이동하는 순간 그 말은 혐오의 언어가 된다. 정치인들의 민망한 언어 수준은 특정 진영의 문제가 아니다. 현 정부의 정동영 장관도 과거 노년층을 향해 투표장에 가지 말라는 발언으로 곤욕을 치렀던 적이 있다. 노인을 폄하하고 조롱하는 말은 비단 특정 집단만을 겨냥하는 것이 아니다. ‘늙음’을 모욕의 무기로 쓰는 사회는 결국 모든 시민에게 “당신이 속한 집단도 곧 조롱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암묵적 메시지를 보낸다. 이렇게 공동체의 안전장치는 해체되고, 사회적 갈라치기는 확대된다. 혐오와 배제의 언어가 정치에 스며들면 정치의 목표가 바뀐다. 상대를 설득해 정책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악마로 만들어 제거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 된다. 악마를 상대할 때는 예의도 팩트체크도 필요 없다. 과장과 조롱, 능멸과 낙인이 오히려 쾌감을 준다. 정치는 논증이 아니라 감정적 비난의 경연장이 된다. 그 결과 물가·일자리·교육·돌봄·지역 소멸 같은 민생 이슈는 사라지고, 남는 것은 정치적 진영 논리 뿐이다. 문제는 이 언어가 정치 영역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치인의 막말이 유튜브와 SNS에서 소위 ‘잘 팔리는 언어’가 되면, 종교인·연예인·지식인들도 여기에 합류한다. 특히 유튜브 쇼츠로 대표되는 미디어 환경에서 영상의 호흡이 짧아질수록 말은 독해지고, 정치는 돈벌이의 수단이 된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존재들을 악마화할수록 조회수는 증가하지만 사회적 신뢰는 고갈된다. 무너진 정치 언어의 품격은 공동체의 가치를 떨어트린다. 오늘날 유튜브를 기반으로 한 팬덤 정치는 종종 막말을 솔직함이나 사이다로 포장한다. 그러나 막말은 가장 값싸고 빠른 동원 기술에 불과하다. 혐오로 얻는 지지는 오래 가지 못한다. 그리고 종국에는 정치 자체가 혐오의 대상이 된다. 정치인의 말은 공동체의 표준어다. 여야 할 것 없이 공당이라면 말의 품격과 기준이 있어야 한다. 논쟁적 발언이 아니라 인격 모독과 집단 비하적 발언에 대해서는 즉시 책임을 묻고 사과해야 한다. 결국 마지막 책임은 시민에게 있다. 정치인의 막말은 조회수와 표가 만들어낸 결과물이기도 하다. 혐오의 말로 무너지는 것은 상대 진영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품격이다. 우리 편이라는 이유로 정치인의 막말을 눈감아주면 다음 막말의 대상은 내가 될 수 있다. /주재원 한동대 교수

2026-03-26

천만 관객 영화의 이면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천만 관객을 돌파했다. 연예계 마당발로 소문난 장항준 감독의 작품이라 그런지 500만 관객 돌파 시점부터 매일 같이 관련 뉴스가 쏟아져 나왔다. 유명인들의 SNS는 물론이고, 각종 유튜브 채널과 언론들이 한국 영화의 저력이라 치켜세운다. 영화업계는 극장가 회복의 신호탄이라 반기는 분위기다. 좋은 영화의 흥행 자체는 축하할 일이다. 그러나 천만 관객 이면에 드리운 그림자를 지나치기 어렵다. 과연 천만 관객이라는 지표는 한국 영화 산업의 희망을 담보하는가. 과거 천만 영화는 한국 영화 생태계 전체의 활력을 상징했다. 2003년 ‘실미도’를 시작으로 총 스물다섯 편의 작품이 천만고지를 넘으며 산업적 활력을 과시했다. 당시 관객들은 극장을 찾아야만 영화를 접할 수 있었고, 이는 제작·배급·상영이 균형을 이루는 선순환 구조로 이어졌다. 그러나 코로나 이후로 사정이 달라졌다. 이제 천만 관객 돌파는 영화 산업의 번영이라기보다 오히려 그 이면의 심각한 불균형을 드러내는 신호에 가깝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스크린 독과점이다. 대형 상업영화가 개봉하면 멀티플렉스는 순식간에 상영관을 그 영화에 집중시킨다. 이는 관객의 자율적 선택이 반영된 결과라기보다, 애초에 선택지가 한쪽으로 기울어진 구조다. 한 작품이 전국 스크린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일이 반복되면, 다른 영화들이 설 자리를 잃는다. 관객들은 다양한 영화를 보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진다. 영화 산업은 몇몇 초대형 흥행작 중심으로 재편된다. 그렇게 영화의 다양성은 고사된다. 여기에 넷플릭스를 비롯한 글로벌 OTT 미디어 플랫폼의 급성장은 영화 산업의 제작과 소비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고 있다. 영화 제작자로서는 안정적 투자처이자 새로운 기회일 수 있다. 이러한 변화를 반기는 관객들도 많다. 많은 작품의 극장 상영 기간이 눈에 띄게 짧아졌다. 아예 극장을 거치지 않고 온라인에서만 개봉하는 작품들도 많다. 이러한 상황에서 극장은 관객 감소와 유지 비용 상승이라는 이중 압박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지방 중소 도시의 극장은 이미 존폐의 기로에 서 있다. 최근 몇 년 새 문을 닫은 극장도 적지 않다. 살아남은 곳도 운영 여건이 눈에 띄게 나빠졌다. 지난 연휴, ‘왕과 사는 남자’를 보러 간 지역 극장은 언론 보도와 달리 한산했다. 직원 2명이 검표와 청소, 팝콘을 판매하는 일까지 하고 있었다. 상영관 내부는 난방이 제대로 되지 않아 관객이 외투를 벗지 못한 채 영화를 봐야 했다. 한겨울에 외투를 입은 채 두세 시간을 버텨야 하는 극장, 수익 구조가 이미 한계에 다다랐다는 징후다. 한편에서는 또 하나의 천만 영화 달성을 한국 영화계의 성과인 양 자축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영화 생태계의 기반인 지방의 극장들이 무너지고 있다. 몇 편의 흥행 영화만 살아남고, 중간 규모 영화는 사라지며, 지방 관객은 점점 더 열악한 환경으로 내몰리는 구조라면 그것은 지속 가능한 산업이라 할 수 없다. 영화 산업의 진정한 경쟁력은 다양한 영화가 공존하고 전국 어디서나 영화를 사랑하는 관객들이 쾌적한 환경에서 작품들과 만날 수 있는 생태계에 있다. 천만 영화 이면에는 사람이 있다. /주재원 한동대 교수

2026-03-12

보수의 품격

윤석열 전 대통령의 내란혐의에 대해 1심법원이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우리 헌정사의 뼈아픈 기록으로 남을 것이 자명하다. 세부적인 판결문의 내용에 대해서는 갑론을박이 있겠지만, 중형 선고는 다수 국민들이 이미 예상했던 바다. 그러나 이에 대해 책임 있는 공당의 당대표는 1심 판결일 뿐이라고 판결을 폄하하고, 윤 전 대통령 측은 법원의 선고에 대해 법치 파괴라고 주장한다. 보수 정권의 대통령과 보수 정당의 대표가 법치주의를 부정하는 현실은 기묘하다. 법치란 내가 이길 때뿐 아니라 질 때도 작동하는 일관된 시스템이다. 제도 안에서 다투되, 결과를 부정하지 않는 것, 그것이 법치다. 법치주의는 보수주의 정치철학의 뼈대다. 법치를 부정하니 보수도 분열하는 모양새다. 어떤 조직이든 존재 이유와 철학을 부정하면 그 집단은 위기를 맞을 수 밖에 없다. 이 지점에서 근본적으로 묻고 싶다. 한국 보수 정치의 핵심 가치는 무엇인가? 표면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법치주의 등을 외치지만, 실상은 반공주의와 발전국가 담론이 한국 보수주의의 중심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이는 지난 수 십년간 보수 집회에서 나온 구호들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 90년대 말부터 등장한 새로운 보수주의 - 일명 뉴라이트가 보수의 혁신을 시도했지만, 참여민주주의와 평등을 불신하는 엘리트주의,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 대한 맹신으로 변질되었다. 결과적으로 뉴라이트는 보수 진영에서도 버림받은 이름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민주당 정권동안 한국의 보수주의는 철학적 사유를 잃어버린 채 적대적이고 자극적인 언어에 압도되었다. 영국의 보수 정치철학자 로저 스크루턴은 보수주의를 ‘우리가 알고 사랑하는 것을 붙들고, 그것을 훼손과 폭력으로부터 지키려는 성향’으로 정의한다. 그러한 보수주의의 실천은 구호가 아니라 사회에 대한 책임으로 나타나며, 그 책임은 법과 제도에 대한 존중으로 표현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영국의 보수 정치인들이 자발적으로 자녀들을 군대에 보내고 해외 파병까지 자원하는 것은 보수적 가치의 표현이다. 이러한 보수주의 정치철학에 대해 고민해 본 사람이라면 자신의 이해관계와 관련해 ‘법치 파괴’라는 말을 함부로 내뱉을 수는 없을 것이다. 보수의 품격은 ‘우리 편 무죄’를 외치는 것이 아니다. 재판에 성실히 임하고, 판결을 존중하며, 제도 안에서 책임지는 태도다. 상대를 빨갱이라는 언어로 규정하는 쉬운 길 대신, 우리 사회의 일자리·교육·돌봄·산업 전환 같은 어려운 의제와 관련해서 어떤 정책이 보수의 가치를 지키는 것인지 고민하고 길을 제시하는 자세다. 보수가 진짜 지켜야 할 것은 특정 인물이 아니라, 공동체의 신뢰와 제도의 권위다. 법치주의를 부정하는 보수를 ‘극우’라 부른다. 2021년 트럼프 지지자들의 미국 국회의사당 점거 폭동, 2025년 윤석열 지지자들의 서부지법 점거 폭동의 공통점은 법치주의를 부정하는 극우주의 집단의 반민주적·반사회적 폭력행위였다는 사실이다. 이제는 보수 진영의 철학과 문법을 바꿔야 할 때다. 보수는 품격이 있을 때 가치를 인정받는다. /주재원 한동대 교수

2026-02-26

행정통합, 속도보다 방향이다

행정통합이라는 태풍이 전국을 강타하고 있다. 정부가 대규모 재정 지원과 각종 특례를 약속하자, 지자체들이 경쟁적으로 속도를 내고 있다. 오는 6월 지방선거에서 통합단체장 선거를 염두에 둔 정치인들도 분주하게 움직인다. 대구·경북 역시 예외가 아니다. 무리하게 과속 페달을 밟는 듯 하다. 행정통합은 속도전이 되어서는 안된다. 충분한 검토와 사회적 숙의 과정 없이 추진되는 행정통합은 지역 경쟁력을 높이기는커녕, 새로운 갈등과 지역 간 양극화를 부추길 가능성이 크다. 행정통합은 단순히 광역단체의 외형을 키우는 문제가 아니다. 행정 권한의 재배분, 재정 구조의 변화, 지역 공공서비스의 재편 등 주민의 일상과 직결된 사안이다. 한 번 추진되면 되돌리기 어려운 결정인 만큼, 그 파급 효과는 장기적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현재 논의는 ‘정부 지원을 받을 수 있을 때 서둘러야 한다’는 당위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통합의 실질적 필요성과 효과에 대한 냉정한 검증이 충분히 이뤄지고 있는지 의문이다. 특히 경북 내 여론이 단일하지 않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경북의 여러 지역에서는 통합 이후 대구 중심의 행정 집중화, 경북 북부 지역의 소외, 재정 배분의 불균형, 지역 정체성 약화 등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이러한 우려는 단순한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통합 이후 현실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구조적 문제에 대한 경고를 내포한다. 공론화 과정이 충분하지 않은 상태에서 통합을 밀어붙인다면, 이는 지방자치에 대한 신뢰를 훼손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재정 지원과 특례 보장은 분명 매력적인 유인책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한시적일 수 밖에 없다. 통합 이후 재정 부담을 장기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지, 행정 효율이 실제로 개선되는지에 대한 판단은 별개의 문제다. 준비되지 않은 통합은 불필요한 비용 증가, 행정 혼선, 조직 비대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기대했던 시너지가 나타나지 않을 경우, 그 책임과 부담은 고스란히 지역 주민에게 돌아간다. 가장 우려되는 점은 현재의 행정통합 논의가 오는 6월 3일 지방선거 일정에 맞춰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역의 백년대계를 좌우할 수 있는 중차대한 사안이 정치적 일정에 맞춰 졸속으로 진행될 위험에 놓여있는 것이다. 특히 대구·경북 행정통합의 경우 대구시장의 부재로 이철우 도지사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행정통합은 선거용 구호로 소비될 사안이 아니다. 지역의 미래를 바꾸는 중요한 결정이 정치적 계산에 좌우된다면, 정책의 지속 가능성은 담보되기 어렵다. 지금 필요한 것은 정치적 선언이 아니라 세밀한 설계다. 통합의 필요성, 단계별 추진 방안, 통합 이후 발생할 수 있는 부작용에 대한 대책까지 투명하게 논의되어야 한다. 충분한 정보 공개와 숙의 과정 없이 추진되는 통합은 명분을 얻기 어렵다. 발묘조장(拔苗助長). 급한 마음에 식물의 싹을 억지로 잡아당겨 말라죽게 한다는 의미로 성급함이 일을 그르치게 한다는 고사성어다. 이미 국회로 넘어간 대구·경북 행정통합 논의는 지금이라도 속도를 늦추고, 차분히 절차와 내용을 다시 점검해야 한다. 신중하지 못한 통합은 오히려 지역의 부담을 가중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주재원 한동대 교수

2026-02-12

준비되지 않은 김 부장들에게

바야흐로 지방선거의 해다. 선거철이 다가오면서 각종 현수막들이 시야를 어지럽힌다. 누구인지 알 수도 없는 지역 정치인들의 문자 세례와 각종 여론조사 전화가 휴대폰을 괴롭힌다. 각자가 ‘준비된 일꾼’, ‘검증된 후보’, ‘지역의 적임자’임을 내세운다. 하지만 그들이 왜 지방선거에 나오려고 하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대부분이 단기적이고 미시적인 정책들을 나열하지만, 정작 지역의 미래와 장기적 성장 전략에 대한 비전은 제시하지 못한다. 지방선거를 약 4개월 가량 앞둔 우리 사회의 자화상이다. 작년 연말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라는 드라마가 화제를 모았다. 많은 직장인들이 극 중 김 부장이라는 캐릭터에 격한 공감을 표했다. 대기업 임원이 되기 위해 평생 직장에서 헌신했지만, 결국 임원이 되지 못하고 조직에서 버림받는 김 부장에 대해 시청자들의 동정 여론이 쏟아졌다. 하지만 냉정하게 이 드라마를 분석해보면 극 중 김 부장은 대기업 임원이라는 자리에 대한 욕망이 있을 뿐, 회사의 장기 전략이나 조직에 대한 통찰력, 그리고 비전을 깊이 고민하는 사람은 아니다. 오히려 과거의 사고방식에 얽매여 있는 꼰대형 리더십으로 그려진다. 그러니 기업 입장에서는 김 부장이 임원을 달지 못한 것이 다행일 수도 있다. 지방선거에도 수많은 김 부장들이 출사표를 던진다. 자신이 지역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는 이야기는 기본이고, 과거의 치적을 열거하면서 얼마나 열심히 살아왔는지 어필한다. 물론 그동안 정말 애썼다고 칭찬해주고 싶은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지역사회의 리더십이 되어야 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갈수록 벌어지는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격차, 양질의 일자리 부족, 청년 인구 감소, 지방 소멸 등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지역의 난제들이 근본적으로 다른 차원의 해법을 요구하고 있다. 농경시대의 경험이 산업사회에 도움이 될 수 없듯이 지금까지의 경험보다 중요한 것은 지역의 구체적이고 실현 가능한 미래 성장 전략이다. 비전 없는 지도자가 위험한 이유는 이들이 지역의 장기적 발전과 무관한 일들을 마구잡이로 추진하기 때문이다. 무능력한데 부지런한 리더가 얼마나 최악인지 직장인들이라면 공감할 것이다. 드라마 속 김 부장처럼 지역의 리더십들은 언제나 바쁜 일정을 소화한다. 각종 준공식과 행사 참석, 주민 간담회 등 쏟아지는 보도자료로 성과를 연출하는 동안 지역의 미래 비전은 서서히 동력을 잃는다. 당락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지역 청년들의 미래에는 관심이 없고, 당장 표를 몰아줄 수 있는 지역의 권력 집단과 기성세대들의 입맛에 맞춘 공약들이 난무한다. 그래서 지방에서는 혁신이 어렵다. 준비되지 않은 김 부장들에게 묻고 싶다. AI가 노동을 대체하고, 디지털 플랫폼이 모든 산업을 블랙홀처럼 흡수하는 이 시대에 과연 우리 지역의 미래는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상권 활성화’, ‘청년 유입’, ‘기업 유치’ 등 허황된 공약이 아닌, 지역사회의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한 궁극적인 체질개선 방안이 비전으로 제시되고 있는가? 이번 지방선거에서 유권자들은 어떤 김 부장을 임원으로 만들어야 할지 신중히 고민해야 한다. /주재원 한동대 교수

2026-01-30

인서울 대학 경쟁은 공정한가?

‘공정’은 지난 수년간 한국 사회의 최대 화두였다. 이 단어는 경쟁을 정당화하는 기준이 되었고, 평가의 잣대가 되었다. 선거에서, 학교에서, 채용과 승진의 장에서 공정은 새로운 규범으로 자리잡았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는 공정해졌는가. 선뜻 답하기가 어렵다. 격차는 더 벌어지고, 분열과 갈등은 더욱 깊어졌다. 하버드대 마이클 샌델 교수는 ‘공정하다는 착각’(The Tyranny of Merit)에서 이 점을 지적한다. 왜곡된 공정이 공동체를 분열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노력과 능력이 곧 성공으로 이어진다는 믿음은 승자에게 정당화된 우월감을, 패자에게는 회복하기 어려운 수치심을 남긴다. 성공은 자격이 되고, 실패는 낙인이 된다. 이 과정에서 서열은 고착화되고 공동체의 연대는 느슨해진다. 한국 사회에서 공정이라는 단어가 가장 빈번히 등장하는 영역은 교육 분야다. 그중에서도 대학 입시는 극도로 민감한 공정의 최전선이다. 한국 사회에서 대학은 문자 그대로의 계급을 재생산하기 때문이다. 특히 지난 수십 년간 대학의 서열화는 더욱 강화되어 왔다. 오늘날 ‘서연고서성한’으로 시작되는 대학 서열은 ‘태정태세문단세’로 암기되는 조선왕조 계보보다 더 유명하고 확고한 계급 체계의 상징이 되었다. 그럼에도 대학 서열화는 공정한 입시 경쟁의 결과로 받아들여진다. 인서울 대학과 지방 소재 대학의 격차에서 공정의 허상은 보다 명확해진다. 대학의 소재지는 능력과 가능성을 대신하는 기호로 작용한다. 교육 수준이 아닌 대학이 존재하는 물리적 공간으로 선호도가 극명하게 나뉘는 것이 현재 한국 사회의 현실이다. 인서울 여부는 능력의 상징으로 소비되고, 지방 대학은 2등 시민을 양산하는 곳으로 전락하고 있다. 그럼에도 ‘기회의 평등’이라는 그럴듯한 포장지에 감춰진 공정 담론은 지역과 서울 간 교육 격차와 사회적 불평등을 애써 정당화한다. 한국 사회에서 대학 간판은 채용과 승진을 넘어 삶의 경로를 결정한다. 한 번 형성된 서열은 쉽게 되돌릴 수 없다. 사람들은 이 질서에 문제를 제기하기보다, 그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더 치열하게 경쟁한다. 오늘날 사회 구성원들이 인서울 대학, 인서울 직장, 인서울 아파트 구입을 목표로 경쟁하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인서울 경쟁에서 승자의 명예와 패자의 수치는 간극이 너무 크고, 이를 만회할 기회는 거의 없다. 공정 담론이 쉽게 분노와 혐오의 언어로 변질되는 이유다. 서울과 지방의 격차를 줄이려면 계속 질문해야 한다. 인서울 대학을 선호하는 우리 사회는 과연 공정한가. 교육의 질보다 대학의 위치를 먼저 따지는 사회는 건강한가. 이러한 현상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 우리는 공정한 민주 시민인가. 공정은 과소 평가되는 존재들에 대한 차별없는 시선에서 출발한다. 대학의 지리적 위치가 삶의 서열로 이어지지 않도록 제도를 정비하고, 지역과 학교를 넘어 사회적 기여를 평가하는 기준을 만들어야 한다. 공정은 경쟁의 언어가 아니라, 공존의 문법이어야 한다. /주재원 한동대 교수

2026-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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