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파를 넣은 단호박 수프.깨끗하게 껍질을 벗겨 씻어 놓은 양파는 말갛게 투명한 우윳빛을 드러내듯, 빨리 요리에 써 달라고 단단하게 주먹 쥐며 아우성치는 듯이 느껴진다. 햇살을 받으며 스테인 채반에 얹혀 있는 양파는 보기만 해도 요리 본능을 자극한다. 양파의 장점은 어떤 요리와도 잘 어울린다는 점이다. 고기 요리나 야채 볶음이나 생선조림 그 어디에 넣어도 아작아작한 식감과 달큼함이 때론 요리의 주된 식재료보다 더 맛있게 느껴질 때도 있다.단호박 수프를 좋아하는 나는 양파와 단호박으로 수프를 자주 해 먹는다. 초록색의 단단한 겉껍질 속에 숨은 속살을 웬만해선 드러내지 않는 단호박은, 고를 때부터 맛있는 걸 선택했길 간절히 바라며 신중하게 장바구니에 담는다. 집에서 식도로 단호박을 반으로 갈랐을 때 진한 노랑을 드러내면 일단 안심이다. 먼저 채 썬 양파를 약불에 올린 냄비에 버터와 함께 오랫동안 양파의 단맛이 우러나올 때까지 인내심을 갖고 볶아준다. 이 과정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나중에 수프에서 양파의 매운맛에 입안이 공격당하게 된다. 그러고 나서 껍질을 제거하고 썰어 둔 단호박도 넣고 살짝 볶아둔 뒤 물을 넣고 끓인다. 단호박이 잘 익었으면 한 김 식힌 후 믹서에 갈고, 다시 한번 우유나 생크림으로 농도를 맞춘 후 간을 하고 흰 후추를 톡톡 넣어주면 색상도 고운 단호박 수프는 완성이다. 오로지 양파와 단호박이 열 일 한 음식이다.요리를 하면서 어느 요리에나 잘 스며드는 양파 같은 사람이고 싶다. 또 양파를 잘 품으면서도 자기 색깔을 잃지 않는 단호박을 닮고 싶기도 하다./권현주(포항시 북구 장성동)
2020-10-12
가을에 접어들면서 일교차가 커지고 있다. 추석이 지나면서 낮과 밤의 일교차가 10℃ 이상으로 커지고 아침, 저녁으로 제법 쌀쌀해졌다. 진돗개의 공격을 피해 라일락 나무 옆 담장 위에서 먹고 자던 고양이가 며칠째 보이지 않는다. 아침에 일어나 신문을 가지러 가려고 현관문을 열면 늘 먼저 야옹 하고 내게 인사를 건넸다. 발레리나처럼 몸을 늘려 스트레칭 하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아른거린다.고양이는 7년 전 어미젖을 덜 뗀 듯 눈매가 희미하고 털이 보송송한 모습으로 우리 집과 인연을 맺었다. 사람들 왕래가 뜸한 아파트 뒤쪽에서 비틀거리며 걷는 폼이 위태롭게 보였다.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와 가져온 우유를 주자 그 시간이면 나타나 주는 우유를 깨끗이 핥아 먹었다. 현관 앞에 집을 만들어 주고 사료를 담아 주었더니 애초부터 제 보금자리 인양 눌러 살았다. 아이들 품에서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아이들이 학교에 있는 동안 고양이는 빨래를 너는 내 다리에 감기고 담장 너머 텃밭까지 졸졸 따라다녔다.어느 날 빨래를 걷는 남편의 다리에 감겼다가 그만, 밟히고 말았다. 그 후유증으로 사료를 먹는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졌다. 입자가 작은 사료로 바꿔주고 고양이용 캔을 사서 사료에 버무려 주었더니 곧잘 먹었다. 사료 냄새를 맡고 도둑고양이들이 몰려들었다. 사료를 주고 돌아서기 무섭게 그릇이 바닥을 보였다. 학교 갈 준비로 바쁜 아이들을 불러 세워 고양이가 사료를 다 먹을 때까지 교대로 보초를 서게 했다. 소유하는 것에는 그에 맞는 책임을 지는 것이 마땅하다고 요일을 정해 밥 당번을 시켰다. 그렇게 한 가족처럼 산지 7년의 세월이 흘렀다. 아이들은 대학생이 되고 직장인이 되어 집을 떠났다. 성장한 아이는 부모를 떠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이치지만 고양이는 어디로 갔을까? 무심코 고양이가 머물던 담장 위로 눈길이 간다. 아침이면 야옹 하고 인사를 건네던 울음소리가 그립다./김지연(경주시 마동)
달려드는 자동차를 피하기 위해서 취하는 일종의 자위 수단이다. 대부분의 차량은 서행하며 조심을 하나 일부는 출근길이 바빠서도 그렇겠으나 막무가내로 달려들며 심한 경우 손이나 옷이 스치게 되는 경우까지 있어 호미를 들되 도로 쪽으로 향한 손에 적당하게 벌려 들고 흔들며 촌놈 행색으로 휘적휘적 걸어간다. 달려들면 제 차에 흠집이 생길 것이므로 모두 조심하나 가끔 나팔을 울리며 조바심을 치는 경우도 있으나 깡그리 무시하고 그대로 걸어간다.다리 끝부분에는 좌우로 밭이 있다. 왼편에는 만해 형님 밭이고, 오른편에는 이화씨의 농장이다. 제멋에 사는 것이 인생이라고 마을에는 잘 나고 똑똑하신 분들이 많다. 그러나 이곳으로 이사 오면서부터 내가 존경하던 분들은 만해 형님과 우리 부부가 천사라고 부르는 이화씨이었는데 불행하게도 한 분이 먼저 떠나시고 이제 이화씨만 남았다. 재작년에 초보 농군인 우리는 마늘 두 접을 심어 종자보다도 못한 수확을 한 적도 있는데 이화씨는 반 접을 심어 두접반을 수확한다. 항상 필요한 양보다 많이 심고 거두어 이웃들과 나눈다. 우리더러도 필요한 것이 있으면 그대로 뽑아 먹으란다.나는 농장이라고 뻥을 치나 실은 하천 부지를 개간한 국가의 땅이다. 처음 강둑에 매실나무를 심을 때만 해도 어느 천 년에 효도를 보겠느냐고 하시던 마을 분들이 우리가 매실을 수확하는 것을 보시곤 묘목들을 심으셨다. 농장 둑에는 왕보리수, 감, 대추가 달린 나무가 보이고. 무성한 오가피나무에는 산비둘기가 집을 짓고 알을 낳고 부화하여 새끼를 데리고 떠난 빈 둥지가 숨어있다. 농장에는 봄에서 가을까지 열 가지도 넘는 야채며 채소들이 자란다. 매일 아침이나 한낮이나 저녁에는 한두 번쯤은 들려 살펴보고 만져보고 대화한다. 아마도 나무며 채소들은 나의 발소리를 기억할 것이고 멀리서 내가 나타나면 주인님 오신다고 영차영차 할 것 같다./류대열(경주시 외동읍)
두 손 모아 기도를 한다. 간절하고 절실한 바람이다. 손짓으로 부른다. 내게로 와 달라는 애절함이다. 손을 맞잡고 악수를 한다. 만남의 기쁨이고 친근함의 증거다. 손을 흔들어 배웅한다. 이별의 슬픔이고 다시 만날 기약이다. 새끼손가락 걸어 약속한다. 법보다 더 무거운 계약이다. 글을 쓴다. 말로 차마 하지 못하는 감정 표현이고 오래 기억하고 싶은 진심이다. 손등으로 눈물을 훔친다. 슬픔이고 다짐이다.손으로 턱을 괴는 것은 사색이다. 때론 고심이고 때론 공상이다. 움켜쥔 손은 욕심이다. 물욕이고 탐욕이다. 손가락질은 분노다. 결국, 나에게 되돌아와 내가 감당해야 할 내 몫이다. 손을 비벼 비는 것은 반성이다. 용서와 함께 포용도 구하는 것이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 삶이 팍팍하더라도 살아가야 하는 이유다. 손은 촉감으로 그리운 이들을 추억한다. 손은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갓 태어난 아기의 고사리 같은 손은 축복이다. 기쁨이고 행복이다. 어린아이의 손은 미래다. 희망이고 기대다. 청춘의 손은 준비다. 열정과 도전을 위한 손이다. 부모의 손은 사랑이다. 오롯이 한곳만을 향한 가슴 아픈 사랑이다. 조건 없는 지고지순(至高至純)의 손이다. /이도감(사진작가)
김은희씨의 텃밭에서 나온 호박.남편이 퇴직한지 9개월째다. 우리는 작은 텃밭을 함께 가꾸며 지낸다. 의기투합할 때도 있지만 가끔씩 서로 마음이 맞지 않아 토닥토닥 다투기도 한다. 둘 다 농사에는 젬병이다 보니 시행착오가 잦다. 기쁨도 주고 실망도 주던 그동안의 우여곡절을 열거하자면 웃픈 사연이 많다.지난봄에 수박 모종 몇 포기를 사서 심었다. 모종만 사다 심으면 저절로 크는 줄 알았지만 경험자들은 순지르기를 잘해줘야 한다고 했다. 실한 수박을 위하여 열다섯 번째의 아들 줄기 아래로 순 자르기도 했다. 길고 지루한 장마가 계속되었다. 흔히 볼 수 있는 수박과는 다른 검은 달덩이 같은 수박 하나가 달렸다. 검은빛 수박은 크고 튼실해 보였다. 그러나 막상 쪼개보니 속이 노란 것이 덜 익은 것인지 맛이 무맛이었다. 아까워서 껍질을 벗기고 속을 발라 장아찌를 담아보니 상큼하니 맛있었다.다른 한 포기에서는 약간 다른 잎과 줄기가 튼튼하게 뻗어나가고 있었다. 급기야는 오이 줄기를 침범해서 처음부터 제집이었던 양 타고 올라갔다. 분명히 수박 모종을 심었는데 출신을 알 수 없는 한 포기의 수박(?)은 곱고 하얀 꽃을 피웠다. 꽃이 떨어지자 호박을 닮은 것도 같고, 토종 오이를 닮은 것 같기도 한 것이 달렸다. 궁금해하던 우리에게 이웃 텃밭 아주머니가 식용 박이라고 했다. 박나물을 해먹으면 맛있다고 덧붙였다. 제일 큰 녀석을 나누어 주었다. 다른 하나는 남편의 지인에게 나누어 주었다. 생각지도 못한 수확으로 여러 사람이 입 호강을 했다.10호 태풍 하이선이 달려오던 날이 엄마의 첫 제사였다. 엄마가 박나물 좋아하시던 생각이 나서 하나는 친정으로 가져갔다. 태풍 때문에 못 온다고 생각했던 우리가 도착하니 모두 놀랐다. 거의 제사장만이 끝나가던 시간인데 올케언니는 완성된 무나물을 빼고 엄마의 막내딸이 가져온 박나물을 해서 올렸다. 비록 수박 모종에서 엉뚱하게 나왔지만 생전에 엄마가 좋아하시던 박나물로 올렸으니 왠지 뿌듯했다. 엄마는 태풍을 뚫고 오셔서 박나물을 맛있게 드셨을까? 술잔을 올리고 절을 하고 마음으로 기도했다. 그곳에서 아버지랑 편안하시라고, 우리는 모두 잘 있다고.태풍이 지나간 늦은 밤, 엄마를 가랑비 오는 대문 밖까지 배웅하고 들어오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김은희(포항시 남구 대이로)
2020-10-05
어릴 때 동네 어귀에 살던 새순 오빠네 집은 탱자나무로 울타리를 둘렀다. 오래전이라 동네 오빠 이름은 맞는지 확신이 없지만 탱자 울타리의 가시는 눈에 선하다. 집에서 초등학교까지 가려면 삼십여 분이 걸렸다. 옆집 미정이를 집 앞에서 먼저 만나고, 순연이 집 앞에 가서 학교 가자고 큰소리로 외치면 얼굴이 유난히 하얗던 순연이는 책보를 가녀린 허리에 매고 달려 나왔다. 우리 셋은 서너 번 엎어지면 코가 닿을 거리에 살았기에 학교 가는 길도, 하교 후에 짜개놀이, 숨바꼭질 같은 놀이도 같이했다.순연이 집 근처가 마을 어귀였다. 그 옆집 울타리엔 이맘때쯤 노르스름해진 탱자가 눈에 띄기 시작했다. 가시가 많은 담장이지만 개구멍 하나 정도는 꼭 있다. 그 집엔 아들만 셋인 것으로 기억한다. 개구진 사내아이들이 지나다닌 길이겠지. 막내아들이 나보다 몇 살 위라 그나마 초등학교를 잠깐 같이 공유했기에 희미한 기억이라도 있는 것이다. 먹을게 흔치 않던 우리는 시고 쓰고 아주 조금은 단맛이 있는 탱자가 노래지면 몰래 따 먹기도 했다. 따려고 손이 닿는 곳에 것은 동작 빠른 언니 오빠들 차지였고 우린 돌멩이를 던져서 떨어뜨리려고 했다. 그러다 보면 돌이 가시 사이에 껴 있어 탱자는 다 떨어지고 겨울이면 돌만 남아 있기도 했다. 사실 따서 먹기보단 공처럼 던지고 놀기도 하고 소꿉놀이에 반찬이 되기도 했기에 여러모로 쏠쏠한 놀이도구였다.이제껏 내가 본 탱자나무는 낮은 키에 울타리로 선 것뿐이었다. 그런데 포항 덕동마을 옆 법성리에서 홀로 우뚝 선 어여쁜 탱자나무를 봤다. 가까이 가서 노란 탱자를 확인하기 전까진 믿기 어려웠다. 보니 탱자다. 어떻게 저렇게 키웠을까? 보경사 장독대 앞에 400년 된 탱자나무가 앉아 있다. 앉아 있다고 한 건 법성리 나무처럼 줄기를 늘씬하게 뽑아 올리지 않았단 말이다. 그 나무는 경상북도 보호수이다. 법성리 탱자나무도 멋진 자태로 보호수란 이름을 달 때까지 견뎌주길 기도했다./최순자(포항시 북구 용흥동)
박완서 단편집.쇼핑을 즐긴다. 눈으로 즐기는 걸 더 좋아하지만, 가끔 보기에 좋으면 그냥 사버린다. 볼펜, 수첩, 티셔츠. 사놓고 한 번도 쓰지 않은 것들이 많다. 예뻐서 사고 특이해서 탐이 난다. 그래서 문구점에 가서 한나절을 어슬렁거리기도 한다. 자주 가는 편집숍에는 엔틱한 소품이 많아서 주인장과 그 사연에 대해 주고받다 보면 어느새 한아름 결재하는 나를 보기도 한다.하지만 코로나19가 찾아온 이후로는 현장에 가서 무엇을 구경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도 조심스러워서 망설여진다. 책은 온라인 숍에서, 옷은 홈쇼핑에서 읽어보지도 못하고 입어보지도 않은 채 사야 한다. 쇼핑의 재미가 반으로 줄었다.물건뿐만 아니라 책도 충동구매를 한다. 신문에 광고를 보고, 라디오나 텔레비전에 책 소개하는 걸 보고 덜렁 주문해버린다. 요즈음엔 작가별로 한정판이 자주 나온다. 김소월이나 윤동주의 첫 책이 그때의 판본 그대로 인쇄되어 경성 우체국의 직인을 찍어서 보내오는 이벤트도 있다. 이런 일이 자주 있는 게 아니니 또 산다. 또 좋아하는 작가가 신간을 냈다는 이유로 내용도 보지 않고 사버리기도 한다.박완서의 단편집이 그랬다. 가격도 만만찮았는데 지금 아니면 못 살 것 같아서 저질렀다. 한정판이라는데 하면서. 다른 물건도 그렇지만, 책은 절판되는 경우가 많아서 다음에 사야지 하다가 놓친 책이 여러 권이다. 그래서 눈에 들어올 때 사야 한다.문제는 다 읽지 않는다는 점. 단행본이면 그날로 보았을 것을 방학 때 읽어야지, 주말에 봐야지, 미루다 몇 년이 흘렀다. 저렇게 묶여 있으니 차일피일 미루다 아직 못 읽은 상태다. 책꽂이를 볼 때마다 읽지 않은 책에 대한 죄책감 같은 것을 느낀다. 다른 곳에 갔으면 사랑받으며 읽혔을 것을. 내 욕심에 갇혀 책꽂이에서 숨 한번 제대로 쉬지 못하고 기지개 한번 켜지 못했다.서늘한 가을이다. 볕 좋은 베란다에 오늘 하루 내어놓아야 겠다./이진아(포항시 남구 중앙로)
어촌 마을의 한적한 골목길은 존재와 부재에 대한 사유의 장소로 내가 즐겨 찾는 곳이다. 간혹 마주치는 할머니께 인사를 건네면 사진은 왜 찍냐고 물으신다. 나는 습관처럼 “보려구요”라고 대답한다.대부분의 할머니는 못 알아들으셨는지 알아들으시고도 관심 없으신지 “뭐 찍을 거 있다고….”하시곤 가시던 길을 가신다. 할머니의 전부인 그 터전에서 보고 또 보고 사유하려는 나의 존재는 그 할머니에게 무엇이며 또 나에게는 무엇일까? 끊임없는 사유의 늪은 그렇게 깊어간다. 그렇게 보고 또 보고 사유하며 관계 맺음하고 있노라면 그 대상과 하나가 되어가고 있는 나를 느낀다. 나의 사진 작업은 그렇게 보고 또 보고 그리고 또 보는 것이다.영암리는 포항시 남구 장기면의 작지 않은 어촌마을이다. 여느 어촌마을과 다름없이 한적하고 기다림이 을씨년스러운 빈집들이 드물지 않게 보인다. 마을을 지키는 사람들과 떠난 사람들의 사연들이 겹겹이 쌓이고 있는 빈집이 공존하며 존재와 부재의 증명이 뒤엉켜 있다. 어촌 마을의 현실은 나로 하여금 나 자신을 더 깊이 되돌아보게 한다.존재한다는 것은 기다림이다. 그리고 부재도 기다림이 증명한다. 우체통마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는 영암리 어느 빈집 앞에서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나는 지금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가?/이경진(사진작가)
박완서 선생님의 ‘솔잎에 깃든 정취’란 수필을 읽었다. 사변 중에 맞은 추석에 다른 음식은 몰라도 송편만은 꼭 빚으셨던 박완서 선생님께서 솔잎이 없어 송편의 정수가 빠진 것 같아 괜찮다는 시어머니를 뒤로하고 집을 나서셨다. 전시라 지뢰가 있을지도 모를 정릉까지 사촌들과 먼 거리를 걸어가 솔잎 한 소쿠리를 따왔노라는 이야기였다. 이 글을 읽고 나니 엄마의 추석 음식이 떠올랐다.우리 집도 제사를 지내지는 않는지라 명절 음식이 넘쳐나지도 않았고, 입도 짧고 기름진 음식을 잘 못 먹는 식성이어서 튀김류나 전을 많이 부치지는 않았다. 대신 엄마가 가장 신경 쓰시는 추석 음식은 송편이었다. 햅쌀을 방앗간에서 갈아와 찰지게 반죽한 뒤 작게 떼어낸 떡덩이 안에 푸른 콩 다발에서 까낸 콩과 밤을 주로 넣으셨던 엄마는, 반드시 솔잎을 깔고 송편을 찌셨다.깨끗한 솔잎을 구하기 위해 추석 전에 산에 다녀오시곤 하셨다. 언제고 집어 먹어도 솔잎 지국이 나 있는 솔향이 은은한 송편이 딱 엄마 송편이었다. 평상시 어디 다니다가도 떡집에서 다른 떡은 간간이 사 먹어도 송편을 사 먹어 볼 생각은 단 한 번도 든 적이 없다. 박완서 선생님께 송편의 솔잎은 목숨도 신경 안 쓸 만큼 없으면 미완성이라도 되는 궁합이 맞는 것이었나 보다. 엄마에게 송편의 솔잎은 어떤 기억 속의 음식이었을까?추석은 친정에서, 설은 시댁에서 보내기로 한 어머님의 결정으로 결혼 후 추석은 엄마와 보냈었다. 올해는 코로나19로 인해 가는 동안에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음식은 못 먹어도 커피라도 한잔 사 마시고 화장실이라도 들르게 될 텐데 모두 조심해야 한다며 이번에는 엄마가 추석 때 오지 말라고 하신다. 엄마 솜씨의 송편을 맛보지 못하게 되었다. 아쉽지만 어린 아들과 함께 햅쌀가루로 익반죽을 해서 몇 개라도 빚어야겠다. 엄마가 좋아하시던 콩과 밤을 넣고 쪄보리라. 거리 두기 추석이라도 보름달은 온달이겠지./권현주(포항시 북구 장성동)
2020-09-28
골목길은 놀이터였다. 학교를 파하면 책가방 던져놓고 숨겨놓은 보물단지에서 구슬이랑 딱지를 꺼내 챙기곤 꼬랑지에 불이 나게 달려 나갔던 골목길이었다. 옷소매는 까맣게 때가 묻어 반질반질 빛이 났고 바지는 무릎이 살이 보일까 말까 해어져 이리저리 나뒹굴어도 티 날 리 없는 그때 그 골목길이었다. 자지러지게 웃는 개구쟁이들의 장난기 어린 웃음소리와 토닥토닥 뒤엉켜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왁자지껄한 골목길이었다. 지금처럼 과속 방지턱이나 주차 금지 푯말이나 주차된 자동차를 피해 몸을 돌려가며 비좁게 다니던 골목길이 아니었다. 마을회관 앞마당보다 더 넓고 학교 운동장보다 더 숨을 곳이 많았던 놀이터였다. 어스름 해 질 무렵이면 “용우야, 밥 먹어라”라던 우리 엄마 목소리가 동네 이장님의 확성기 소리보다 더 크고 웅장하고 정겨운 그런 골목길이었다.나의 사진 작업은 시간여행을 통해 메마른 심상에서 감성의 온기를 찾는 작업이다. 누군가에게 잠시나마 울먹이는 시간 여행이고 싶다. 나에게는 펑펑 울어도 좋을 시간 여행이고 싶다./이용우(사진작가)
박문하 전 포항시의회 의장우리가 아는 대표적인 겨울 철새 기러기는 따뜻한 남쪽 나라로 날아가 추운 겨울을 보낸다.해마다 생존을 위해 수만 킬로가 넘는 엄청난 거리를 날아야만 한다. 목적지를 향해 높은 산을 넘고 끝모를 벌판을 가로지르는 기러기 떼의 날개짓은 인간의 멀고 험한 인생 여정을 연상케 하고 무엇보다 이동하는 과정에서 보여주는 리더 기러기의 희생적인 모습은 우리에게 숙연함을 느끼게 한다.힘이 센 수컷의 리더는 상승기류가 없는 V자 대형의 맨 앞자리에서 공기 저항을 고스란히 받으면서 수천마리의 기러기들의 나갈 방향을 지휘하는 리더 기러기의 막중한 책임을 인정하고 앞장선 대장 기러기가 지치면 소리를 내어 격려하고 응원하면서 절대적인 신뢰를 보낸다고 한다.우리는 이 같은 기러기 무리의 대장정을 보면서 리더 역할의 중요성과 어디선가 크고 작은 조직의 맨 앞자리에서 열심히 날개를 퍼덕이는 명품 리더십의 결과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 되짚어보면 어떨까 한다.전쟁 파병으로 오랜 기간 대한민국과는 어색한 우호 관계였던 베트남에는 한국과 베트남 양국 우정의 상징이 된 국가대표 축구팀 박항서 감독이 있다.부임 이후 박 감독은 베트남에 적합한 전술을 만들고 선수 개개인의 장단점을 완벽하게 분석하였고 특별히 그는 선수들이 축구에 전념하도록 아버지와 아들 같은 친밀함으로 선수들과 교감해 나갔다.훈련에 지친 선수들의 발을 마사지해주고 출전시키지 못한 선수들에게 양해를 구했고 부상당한 선수에게 자신의 비즈니스 좌석까지 양보하는 감동과 혁신의 리더십을 행동으로 보이기도 했다.흔치 않는 이 같은 리더십은 베트남 국민들의 기대와 상상을 훨씬 초월한 성적으로 다가왔다. 베트남 언론은 2018년 한해 베트남을 가장 빛낸 인물에 베트남 축구 국민으로부터 존경과 신뢰의 표상이 되고 있는 한국인 박항서 감독을 선정했다.더불어 응우엔 총리가 박항서 정신을 베트남 경제 발전을 모델로 삼을 것을 지시하고 베트남 정신과 비전으로 승화시킬 필요성을 역설했다고 전하고 있다.얼마 전 태국 유소년 축구팀 무빠(야생멧돼지) 팀원 열세명 전원을 구출했던 감동의 현장을 우리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무려 18일만에 단 한 명의 사고도 없이 전원 구조되는 것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 기적의 해피엔딩 드라마를 지켜 본 세계의 동굴탐사 전문가들은 스물다섯의 젊은 무빠 축구팀 코치의 지혜와 헌신적인 리더십이 없었다면 어린 선수들의 생존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한결같은 견해를 보였다.암흑의 공간에 고립된 18일 동안 그는 아이들이 동굴 내에서 에너지를 많이 소모하지 않도록 현장을 지키고 종유석 천정에 맺힌 깨끗한 물만 마시게 했다.소년들의 부모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먹고 마시는 모든 것은 아이들이 우선이었고 자기 몫의 음식도 포기한 채 불안해하는 아이들을 달래느라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고 한다.의료진들에 의하면 실제 그는 구조된 13명 중 유독 건강이 좋지 않아 제일 먼저 동굴을 나가도록 권유했지만 많은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이 모두 동굴을 안전하게 빠져나간 것을 확인하고 마지막 순위를 고집하여 최후의 구조자로 확인되었다.우리는 단순히 조직의 꼭대기에 있는 사람을 리더라고 하지 않는다. 조직원을 먼저 챙기고 그들의 안전을 위해 희생하며 조직의 역량을 발현하도록 하는 사람을 리더라고 부른다.크게는 국가에서부터 작게는 사설 단체에 이르기까지 리더의 역량으로 그 조직의 명암이 갈린 사례를 숱하게 보아왔다.박항서 감독은 베트남 국민과 축구 대표팀 선수들에게 진심과 혼신으로 대표팀 감독직을 수행했기 때문에 절대적인 신뢰를 얻었고 그 결과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최상의 성적은 부수적으로 따라왔다고 볼 수 있다.태국의 스물다섯 젊은 청년 축구 코치의 헌신과 지혜가 없었다면 18일 동안 암흑의 동굴에서 전원 생존이라는 기적의 불빛을 밝힐 수 있었는지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개개인의 뛰어난 능력으로 성공하는 조직도 있지만 다수의 사람이 모여 사회를 이룬 공동 운명체는 리더십의 역량에 따라 승패가 좌우되는 것이다.2002년 히딩크 감독은 정글 같은 축구장에서 개성 넘치는 열한 명의 선수들을 한 몸처럼 움직이게 하여 대한민국의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룩하였다.임진왜란으로 나라가 백척간두의 위기에 있을 때 홀연히 열두 척의 배로 스물세번의 해전에서 모두 승리하고 쓰러져가는 나라를 구한 이순신 장군의 리더십을 생각하면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헌신과 배려 넘치는 리더의 품격으로 결단과 용맹으로 더러는 국가나 사회 그리고 작은 회사나 단체까지 명품으로 만들고 그 안에 소속된 구성원들이 자부심과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리더십이 더욱 그리워진다.어느덧 코로나19와 폭염, 태풍까지 심신을 지치게한 긴 여름도 끝자락이 보인다. 분열과 갈등으로 점철된 혼돈의 이 시대를 잠재울 명품 리더십이 가을이 오는 길목에서 절실하게 생각나는 것은 결코 계절 탓만은 아닐 것 같다.
2020-09-21
수평선에 공장의 불빛들이 스며든다. 이곳은 어촌풍경과 도시의 풍경들을 사진에 담을 수 있어서 자주 찾게 된다. 포항시 북구 여남포구는 바다 끝에 산이 있고 산 끝에 바다가 맞닿아 있다. 방파제 등대에서 마을을 바라보면 집들이 위치한 산의 모양은 꼭 물고기가 헤엄치고 있는 듯하다. 해질녘 불이 켜지면 옹기종기 앉아 있는 불빛들이 물고기 비늘같이 반짝인다. 밤이 깊어지면 산도 헤엄쳐 바다로 가는 꿈을 꾸지 않을까하는 상상을 해본다.포구에는 풍랑을 피해온 배들이 정박해 있다. 파도와 맞서고 삐걱거렸을 배들은 포구에 안긴 듯 편안해 보인다. 선착장 타이어를 배게 삼아 휴식을 취하고 있는 모습들이 어머니의 품에 안긴 아기의 모습 같다. 포구는 옷고름을 풀고 젖을 물리고 있는 듯하다. 포구로 돌아온 배들은 다음 출항 때까지 망중한에 들 것이다. 포구는 요람이요, 피난처이며 휴식 공간이다.잠시 몽환적 상상을 해보다 눈을 감고 파도소리를 듣는다. 바다가 들려주는 파도소리에 아득하니 심장이 뛴다. 금어기가 풀리면 포구에 정박했던 배가 산소통을 싣고 엔진소리를 내면서 포구를 떠날 것이다.오늘도 여남포구에는 만선의 꿈들이 헤엄친다. 쉼 없이 파도가 밀려와 바위에 닿았다 다시 떠나간다. /김주영(사진작가)
코로나로 일이 없는 날이 많다. 마음은 편하지 않지만 몸은 편하니 산책을 가기로 했다. 친구에게 수목원으로 소풍을 가자고 했다. 사람이 많은 커피숍보다는 낫겠지 하며 간식을 싸서 나섰다. 주왕산에 숲속 도서관이 생겼다고 반가워하는 나에게, 누군가 포항 연일중명자연생태공원에도 도서관이 있다고 했다. 그럼 오늘 오후 산책은 거기로.갈 때마다 조금씩 다른 모습을 하는 산, 길도 더 넓어지고 꽃의 키도 식구 수도 늘어났다. 한참 숲을 둘러보아도 도서관은 못 찾았다. 하지만 오늘 또 달라진 것 발견. 이름표를 새로 만들어 달았다. 내가 퀴즈마니아인줄 어찌 알고 “나의 이름은 뭘까요?” 한다. 감나무 뽕나무 정도만 구별 가능한 나에게 어려운 퀴즈이다.내 실력을 알았다는 듯이 주위에 여러 나무 중에 어떤 나무의 이름인지 눈치채라고 앞판에 나뭇잎과 꽃과 열매를 새겨 놓았다. 그 정도 힌트로 맞힐 내가 아니다. 처음부터 알려주면 재미없다. 너무 쉬워 보일까 봐 뚜껑을 살짝 넘기란다. 손으로 들추니 이름이 나오고 어디에서 온 것인지, 어느 시기에 꽃을 피우는지 꽃의 이모저모를 적어 놓았다. 나무나 꽃이나 사람이나 쪼는 맛이 있어야 한다.산책로를 따라 올라가니 야생화 관찰원, 약용 식물원, 암석원, 야생화원 등 다양한 생태 학습장이 있었다. 곳곳에 설치된 소리 채집기에 귀를 기울이면 물소리 바람 소리가 또 다르게 들린다. 오르면서 보니 계곡 여기저기에 동물 모형이 있어서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한쪽에 놓은 정자에 앉아서 가져간 간식으로 갈증을 달랬다. 산을 따라 올라가면 옥녀봉에 전망대도 있다. 오늘은 산책만 하기로 했으니 전망대까지 가는 것은 다음 기회로 미뤘다.집에 돌아와 연일중명자연생태공원 홈페이지에 방문했다. 요런 재미난 생각은 누가 어찌하였는지, 다음번에 가면 또 다른 무언가를 내게 보여줄 건지 물어보고 머리 한번 쓰다듬어 주어야겠다. 참 잘했어요, 도장도 찍어주고./이지헌(구미시 양호동)
우리는 지금 사진의 숲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사진이 우리 생활과 밀접한 관계 속에서 생활하고 있다. 인터넷 광고는 물론이고 심지어 음식점의 맛있는 음식도 사진으로 찍어 SNS로 보내는 실정이다.그럼 어떤 사진이 잘 찍은 사진이고 못 찍은 사진인지 평가하기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보는 관점에 따라 잘 찍은 좋은 사진일 수도 있고 잘못 찍은 나쁜 사진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좋고 잘 찍은 사진은 아름답거나, 다른 사람에게 감명을 줄 수 있는 사진, 작가의 생각과 느낌을 잘 나타내야 좋은 사진이라 할 수 있다.사진은 빛과 기다림의 예술이라 한다.많은 사진인들이 좋은 사진을 찍기 위해 밤잠을 설쳐가며 또 순간의 찰나를 포착하기 위해 먼 장거리도 마다 않고 출사를 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큰 사진은 러시아의 이르크추크시 앙가라강변의 영하 30~40℃ 되는 새벽 풍경이다. 이 사진은 누가봐도 혹한의 추위를 느끼게 하는 사진이다.혹한을 느끼게 하는 건 주위에 눈, 상고대 뿐이 아니고 사진의 빛의 색 때문에 이다. 아마 이 사진을 해가 중천에 떴을 때 빛으로 찍었으면 이렇게 리얼하지 않았을 것이다.이 사진은 올해 경북사진대전에서 최고의 상인 대상을 수상한 작품이다.작은 사진은 고니 사진이다. 고니는 몸통이 커서 한번 앉으면 잘 날지를 않는 습성을 가지고 있어 활공이나 착지하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이 고니의 착지와 비상의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서 많은 기다림으로 순간을 포착한 작품이다.다른 사람에게 감동 여부를 평가 받는 방법으로는 공모전에 출품해 보는 것도 한 방법이다. /권일영 사진작가
2020-09-14
초가을 햇살이 눈 안에 반짝인다. 녀석은 순하고 따뜻한 성격이다. 태풍 두 개가 지나갈 때도 잘 참고 작은 박스집을 의지 삼아 잘 견뎌 주었다. 내 곁에 온 두 살배기 라마스테다. 녀석의 고향은 스코틀랜드라 했던가. 이억만 리가 고향인데 어떻게 한국의 땅 경주까지 왔을까. 인연법이란 참 묘하다.나름대로 사랑을 독차지한 녀석에게 어느 날 이변이 생겼다. 인연이련가. 다른 절에서 키우던 집고양이 자몽이 4개월 정도에 인연 따라 여길 왔다. 여동생이 생긴 셈이다. 녀석의 눈치를 보니 처음에는 서로가 경계하는 듯하더니 어느새 어린 동생을 잘 돌봐주고 덕과 아량을 베풀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집을 뺏기기 시작했다. 사료도, 장난감도 빼앗기며 순번이 뒤바뀌는가 싶더니 두 녀석의 서열 싸움이 시작되었다.사람도 성격과 습관이 다르듯 두 녀석은 확연히 다른 성격이었다. 녀석이 모든 것을 내주는 부모 같은 성격이라면 다른 절에서 온 고양이는 질투심과 이기가 대단해 온순한 라마스테가 감당하기에는 버거운 암고양이였다. 어느 날부터 라마스테의 몸이 야위기 급속히 야위기 시작했다. 들어보니 바람개비처럼 휙 그냥 들린다.어느 날은 녀석이 이틀간 보이지 않았다.“라마스테 오빠 찾아 와. 네가 밥도 집도 다 빼앗아 배가 고파 나갔으니 빨리 찾아 와.” 그랬더니 눈 옆에 눈물을 흘린다. 아량 넓고 모든 걸 양보하던 라마스테가 없어진 것을 그때야 알아차린 듯 자몽의 눈가에 눈물 자국이 크게 나 있었다. 갑자기 짠해졌다. 동물도 저러한가. 며칠을 찾은 끝에 옆집 담장 사이에 빠져 못 나온 라마스테를 구조했다. 가끔 기도를 할라치면 사람처럼 손과 두 다리를 모으고 한 자리에 두 시간을 앉아 있는 라마스테를 본다. 아마도 전생에 많이 닦은 수행자의 모습이다. 나와 세 번째 가을을 맞이한 라마스테가 오래오래 인연이 되길 바란다. 라마스테(그 안의 불성이 거룩합니다)라는 의미처럼. /지원 스님(경주시 외동읍)
농사를 짓다 보면 생각만큼 쉽지 않아 당황스러울 때가 있다. 직장 생활이 힘들거나 하던 일이 잘 안 풀리면 ‘고향에 내려가 농사나 짓지 뭐’하고 씹던 껌 버리듯 무심코 말을 내뱉지만 농사야말로 그 어떤 일보다 많이 생각 해보고 결정을 내려야 될 일이다.남편이 정년퇴직을 앞두고 퇴직 후에 할 수 있는 일을 찾다가 무료한 시간을 보낼 겸 소일거리로 할 수 있는 조그만 농장을 하나 샀다. 뜻하지 않게 나를 동참시키는 바람에 얼떨결에 남편이랑 같이 농사를 짓게 되었다. 산비탈 들쑥날쑥한 땅을 포크레인으로 고르게 평탄 작업해 놓으니 땅 모양이 화장한 여인처럼 근사하게 바뀌었다. 초봄이라 잡풀 하나 없이 매끈한 것이 새로 집을 지어 이사한 것처럼 흥분되고 설레기까지 했다. 예쁘게 자랄 방울토마토, 오이, 가지, 고추 등을 상상해 보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봄이 무르익자 온갖 잡풀들이 쑥쑥 올라왔다. 작물들을 심으려고 땅을 뒤집으니 곳곳에 돌이 박혀 있어 돌 고르는 작업을 먼저 해야 했다. 뒤집으면 다시 돌이 올라오고 치우고를 반복하며 우리 부부는 조금씩 지쳐갔다. 남편이 전화로 서울 사는 딸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토요일에 아침 일찍 내려왔다가 일요일 저녁에 올라가면 어떻겠냐고. 아이들은 왕복 열차표를 끊어 준다는 남편의 제안에 흔쾌히 수락했다.처음으로 해보는 어설픈 호미질에 외발 수레에 돌을 싣고 언덕을 오르는 작은 딸아이가 몇 번씩 고꾸라졌다. 남편은 눈짓으로 내게 못본척 하라고 신호를 보냈다. 옷이 흙으로 더럽히고 손바닥이 까여 상처가 났지만 일하고 먹는 삼겹살 맛이 최고라며 밥그릇을 깨끗이 비웠다. 그 후로 두 번 더 주말에 내려와 돌 고르는 작업을 도왔다. 직장에 다니는 아이들 주말에 쉬지도 못하고 두 명 왕복 열차 값이면 포크레인 하루 부르고도 남는다는 내 푸념에도 남편은 고집스럽게 제 주장대로 밀고 나갔다.눈앞에 웃자란 부추가 땅에 늘어져 있고, 바람이 불 때마다 들깨가 출렁이며 흔들린다. 알싸하고 고소한 향이 코끝을 스친다. 어설프지만 우리 부부가 힘들여 지어 놓은 농막 하우스에는 붉은 고추가 널려있다. 유례없이 긴 장마를 이겨 내고 올겨울 김장 양념으로 식탁에 오를 생각을 하니 여태껏 고생한 수고로움이 봄 눈 녹듯이 사라진다. 물건의 질이 좋으냐 나쁘냐를 떠나 내가 기른 농산물은 내게 최고의 가치다. 많은 시간과 노력, 땀방울과 한숨이 그 속에 배어있기 때문이다. 한 해의 결실이 손에 쥐어지면 힘들었던 과정은 깡그리 잊어 버리고 다시 내년 농사를 준비할 것이다. 농부가 아니라 진정한 농사꾼으로./김지연(경주시 마동)
집에 머무는 시간이 늘었다. 주방에서만 걸음이 늦었던 나는 대단한 결심을 하였다. 바쁘다는 핑계로, 아이들이 집을 떠나 있다는, 회식이 잦은 남편 때문에 한걸음 뒤에 두었던 냉장고를 털기로 했다.앞치마를 두르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 채소 칸에 쟁여 놓은 한 보따리의 욕심이 가득하다. 싱싱하다 싶으면 사고 일대일 행사제품을 보면 왠지 남는 장사라 싶어서 산 것이다. 비닐에 싸인 봉지를 꺼내 식탁에 쌓았다. 쿰쿰한 냄새를 품은 봉지가 식탁에 가득하다. 한 봉지를 열어 보니 호박들이 뒤엉키고 짓물러 서로 붙어 있다. 겨우 하나를 살리고 나머지는 음식물 쓰레기통에 버렸다. 물러진 대파와 양파, 버섯은 그들이 갉아 먹은 시간을 갈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채소 칸을 비워 햇볕에 말리니 내 마음에 윤이 났다. 하나 남은 호박을 씻어 놓으니 참 매끈하다. 물러진 양파는 한 귀퉁이를 잘라 투명한 통에 넣었다. 내일이면 이 녀석들은 된장찌개에 들어가 통렬한 최후를 맞이할 것이다. 내친김에 냉동실도 열었다. 내용물을 알 수 없는 봉지가 칸칸이 가득하다. 말끔해진 식탁 위에 또다시 얼음덩이가 하나 둘 쌓였다. 봉지를 열어 보니 봄에 데쳐 물과 함께 넣었던 나물이, 지난겨울에 지인이 국산이라고 주었던 고사리가 보였다. 고등어와 오징어 가자미 등 생선이 꼬리를 물고 나왔다.정리정돈의 첫 단계는 버리기다. 그다음에는 공간의 재배치이다. 그래서 나는 냉장고 문을 다시 열었다. 비웠으니 한눈에 볼 수 있게 반찬들을 배치했다. 자주 사용하는 것들을 앞에 놓고 장류와 양념 통은 냉장고 안쪽에 두었다.냉장고 털기는 마음이 가벼워지는 나의 훈련이다. 정리정돈에 약한 내가 정기적으로 치러야 하는 의식 같은 것이다./이순혜(포항시 남구 효자풍림아이원)
용기내서 고백할게요. 저는 사람 이름과 얼굴을 잘 기억해내지 못하는 편입니다. 물론 요즘처럼 마스크로 무장하고 다녀서 그런 건 아니에요. 코로나 전염병이 돌기 전 부터 그랬으니까요. 특히 첫 만남이거나 한 번에 여러 사람과 악수로 인사 한 다음에는 어김없습니다. 어디에선가 불쑥 나타나 반갑게 눈길을 건네는 분들을 제가 몰라보는 것입니다. 게다가 저는 곧장 되묻습니다. 우리 언제 만난 적이 있던가요. 저를 아시나요. 어떤 분들은 까르르 웃습니다.게다가 취약하게도 저는 얼마 전까지만해도 사람뿐 아니라 곤충도 잘 알아채지 못하는 어른이었습니다. 시각적 센스가 둔해서 일까요. 부끄럽지만(특별히 초등학생 조카에게) 서울 도심에서 자란 저에게 여치, 메뚜기, 사마귀는 모두 엇비슷한 녹색 곤충으로 보였습니다. 그 특별한 사마귀가 우리 집 밥상 위에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어떻게 그 유명한 사마귀도 몰라보나요? 사마귀는 누가봐도 사마귀인데 어린이가 항의해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때는 제가 그랬습니다.아침 메뉴로 어울리지 않지만 아무튼 그때, 저는 상추를 꼼꼼히 세척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풀빛 무언가가 제 오른팔을 폴짝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 사마귀 말입니다. 저는 그 곤충을 비닐봉지 안으로 생포하는데 성공한 겁니다. 숨구멍을 만들어 주고 푸른 잎사귀도 넣어주었습니다. 저는 사마귀를 가만히 바라보았습니다. 긴장감. 혹시 네가 나에게 유해하지는 않을까 하는 공포에 오싹했습니다. 사마귀는 꼼짝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가요. 퇴근하고 돌아오니 사마귀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신기한 노릇이지요. 한낱 곤충이 탈출하다니 말입니다. 숨구멍을 큼직하게 만들어 주었다고 자책해 보아도 소용없었습니다. 저는 사마귀의 행방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저처럼 사마귀를 몰라볼 정도로 주변에, 이웃에게 무관심한 어른이 또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분들에게 코로나 공포 시대에 제가 만난 그 특별한 사마귀에 대해서 소곤소곤 말해줄게요. 그 사마귀는요, 짝짓기를 마친 그 암컷 사마귀는요, 제 짝꿍을 대놓고 잡아먹는 못된 육식 곤충이었데요. 그리고 지금은 그 악명높은 사마귀가 짝짓기 하는 계절이래요. 어떠신가요. 과연, 사마귀 이야기가 호랑이 아저씨보다 더 무시무시하고 코로나 전염병보다 더 무섭죠? /김정희(포항 남구 효성로88)
2020-09-07
17세기 영국 시인 존던의 얼굴 사진과 그의 시 구절 “No man is an island.”생활 속 거리두기로 전환한지 얼마 되지 않아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전 세계로 다시 재 확산되고 있다. 1948년 세계보건기구(WHO) 설립 이후 세 번째 팬데믹(Pandemic) 공포가 전 인류를 위협하는 상황에서 나는 친지의 죽음을 애도하는 장소에 참석하는 것조차 불편해지고, 고인에게 지상에서의 마지막 인사도 못하고 보내는 쓰라린 슬픔을 겪었다. 고인의 장례식에 참석을 하지 못하고 집콕하며 가슴 아파하던 중에 어떤 글귀가 나에게 왔다.“No man is an island.”(존던, John Donne)해석을 하면 “인간은 섬이 아니다. 아무도 혼자인 사람은 없다.”이다. 17세기 셰익스피어와 함께 영국 르네상스 문학을 대표하는 동시대 시인이자 성직자인 존 던이 쓴 기도문 형식의 산문에 나오는 일부이다. 존 던이 살았던 영국의 그 당시에도 전염병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죽었다고 한다. 존 던이 살던 마을에도 많은 사람이 전염병으로 죽었고, 그 때마다 교회에서 종을 울리게 했다. ‘종이 울렸구나, 누군가 죽었나보다.’ 그러던 어느 날 존 던마저 전염병에 걸려 병석에 누워있던 중에 그 종소리를 다시 듣게 되었고, 그 때 존 던이 느꼈던 그 종의 울림이 바로 자신일 수 있음을 깨닫고 쓰게 된 것이라고 한다. 이 시의 뒷부분에 “그 어떤 이의 죽음도 나를 작아지게 한다. 왜냐면 난 인류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라는 구절이 있다.매스컴에서 코로나 감염으로 사망자 수치가 발표될 때마다 통계수치로만 읽었고, 그저 나와 내 가족만 조심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가까운 지인의 죽음을 맞고 장례식장조차 가지 못해 집에서 슬픔을 온전히 껴안게 된 경험을 하고서야 타인의 죽음이 마음으로 다가왔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나는 마치 하나의 섬 같다. 그러나 그 어떤 사람도 섬으로 존재할 수 없고, 우리의 죽음도 예외일 수 없듯이, 그 어떤 누군가의 죽음도 ‘남의 일’로 치부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지인의 죽음을 슬퍼하는 나에게 상주는 온라인으로 장례식의 영상을 보내주었고, 생전의 모습을 영상으로 만들어 고인의 마지막을 함께 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렇게 나는 사랑하는 고인을 보냈다. 바야흐로 언택트(Untact)에서 온택드(Ontact)시대이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섬처럼 있는 나를 ‘연결(on)’하여 분리된 섬이 아니라, 서로를 연결하는 군도(群島)임을 느끼게 되었다. /김예원(경북 경주시 양북면)
시작은 이랬다. 코로나19 사태로 집안에서 먹는 식사의 횟수가 늘어날수록 메뉴도 바닥나 도서관에서 요리책을 빌려왔다. 근래에 만들어 먹은 적이 없는 유니 짜장이 맛있어 보이길래 춘장과 필요한 재료들을 사 왔다. 마침 돌아오는 주말에 남해 지인댁에 감자를 캐러 갈 일이 있어 거기도 들고 갈 겸 짜장을 넉넉히 만들 생각이었다. 먼저 프라이팬에 기름을 넉넉히 두르고 춘장을 볶기 시작했다. 다 볶아진 춘장을 기름과 분리하고 간장으로 간을 해 두었다. 이것을 냉장고에서 하룻밤 숙성시키고, 다음날 야채를 다지고 다짐육을 넣어 볶은 후 춘장과 녹말물을 섞어 짜장을 완성했는데, 춘장의 염도도 모르고 너무 많이 넣은 탓에 짜장이 너무 짜졌다. 어차피 남해에 들고 가려면 부족한 듯해서 다른 팬을 꺼내 같은 과정을 반복하되 이번에는 춘장을 적게 넣고 멸치육수 양을 적당히 조절해서 간을 싱겁게 한 후, 아까 만든 짜장과 섞어서 살짝 끓였다. 예전에 자연주의 식단으로 요리하시는 분의 요리 방법 중 짜장에 설탕대신 바나나로 단맛을 내는 것을 본 적이 있어 바나나도 숭덩숭덩 썰어 넣어주었다.이렇게 짜장을 만들고 나니 20분 거리에 사시는 시어른께도 만들어서 갖다 드려야겠다는 생각에 다시 처음부터 양배추와 호박, 양파를 잘게 썰고 섞어서 끓이니 짜장 세 판, 아니 세 통을 만들게 되었다. 나는 밀폐용기에 세 번째 짜장을 담아 부리나케 들고 어머님께 갔다. “웬 짜장을 다 했냐?”라시며 반가이 받으시던 어머님은 맛도 안보시고, 얼마 전 가깝게 지내시는 분이 옆 동으로 이사 왔는데 좀 나눠먹어야겠다고 하시며 그 분과 그 분의 아드님까지 드시게 됐다.식단이 궁해서 사온 춘장 세 팩이 감자가 주렁주렁 달려 나오듯 뜻하지 않게 많은 사람들과 나눠 먹게 되는 기적의 밥상이 되었다. 아주 어릴 적에 놀았던 ‘쎄쎄쎄’의 노래 가사가 생각났다. “너 먹고, 나 먹고, 이 집 주고, 저 집 주고….” 행복한 유니 짜장이었다. /권현주(포항시 북구 장성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