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크의 왕 샤를마뉴의 흉상. /아헨대성당 소장

프랑크 왕국의 궁재 카를 마르텔(c.690-741)은 약해진 왕권을 틈타 나라의 실권을 손에 넣으면서 카롤링거 왕조의 시조가 되었다. 카를 마르텔의 권력을 물려받은 것은 둘째 아들 피핀이다. 키가 작아 ‘단신 왕’이라는 별명이 붙었지만 용맹하고 지혜로운 인물로 알려져 있다. 카를 마르텔이 카롤링거 왕조의 문을 열었다면 피핀은 카롤링거 왕조의 첫 번째 왕으로 754년 교황 스테파누스 2세가 자리한 가운데 그를 위해 생-드니 대성당에서 성대한 대관식이 거행되었다. 768년 피핀이 쉰 넷으로 세상을 떠나고 둘째 아들이 왕좌에 올랐는데 그가 바로 카를로스이다.

유럽의 역사는 특별히 위대한 업적을 남긴 왕에게 ‘위대한(magnus)’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주었다. 카를로스의 이름에도 명예로운 수식어가 따라붙어 우리는 그를 ‘샤를마뉴’라고 부른다. 샤를마뉴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강한 군사력으로 영토를 확장했고, 체계적인 행정제도를 도입해 정국을 안정시켰으며, 안으로는 문화와 예술이 융성하도록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샤를마뉴는 재위하던 45년 여 동안 무려 60여 차례나 전쟁을 치뤘다고 한다. 그 결과 이슬람이 지배하던 스페인으로부터의 위협을 제거하여 국경을 곤고히 지켰고, 강력한 적군 색슨 족을 엘베 강 유역에서 완전히 제압했다. 영토 확장과 국내 정세 안정에 총력을 기울였던 샤를마뉴가 놓치지 않았던 분야가 있었는데 바로 문화와 예술, 학문의 부흥이었다.

서로마제국의 멸망 후 서유럽은 끊임없는 침략과 전쟁 때문에 문화적으로 피폐한 상태였다. 국운을 좌우하는 것이 강한 군사력과 넓은 영토만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았던 샤를마뉴는 적극적인 문화정책을 펼치며 중세문화가 자랄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해 주었다. 이 시기를 가리켜 ‘카롤링거 르네상스’라고 부른다.

샤를마뉴는 각 수도원들이 교육에 앞장설 것을 명했다. 왕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수도원에는 학교가 세워졌고 읽기와 쓰기를 가르쳤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샤를마뉴는 잠자리에 들기 전 라틴어 쓰는 연습을 했다고 한다.

안정적인 통치를 위하여 정치적 중심지가 필요하다고 인식한 샤를마뉴는 게르마니아 지역과 가까운 아헨(Aachen)을 수도로 정했다. 아헨에는 왕궁이 지어졌고 부속교회와 왕립학교가 함께 세워졌다. 왕은 고대 그리스 학문을 장려하였는데 이를 위해 당시 최고의 학자로 명성을 날렸던 알쿠인(Alcuin)을 영국 요크로부터 초청하는 등 각지에서 인재들을 불러들였다.

중세시대에는 당시 교육의 근간으로 볼 수 있는 ‘일곱 가지 자유학’(septem artes liberales)이라는 것이 있었다. 여기에는 수사학과 문법, 논리학과 음악, 기하학과 수학 그리고 천문학이 포함된다. 이것 역시 샤를마뉴가 동력을 불어 넣은 고대의 재발견의 결과이다. 일곱 가지 자유학은 고대 그리스 사람들이 교양으로 습득했던 지식들로 중세 혼란기를 거치면서 완전히 잊혔고 샤를마뉴의 문예부흥으로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샤를마뉴는 건물을 짓고 도시를 정비하는 등 자신의 제국을 아름답게 가꾸는 것에도 큰 관심을 기울였다. 가장 중요했던 건축사업으로는 수도 아헨의 왕궁과 대성당을 꼽을 수 있다. 마인츠에는 라인 강을 가로지르는 대규모 교량이 설치되었고, 낡은 교회들은 보수되어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났다. 라인 강과 도나우 강을 연결하는 운하가 건설되었고, 바닷가에는 등대가 세워졌다.

프랑크 왕국을 이끌었던 두 번째 왕가 카롤링거 가문이 배출한 샤를마뉴는 그 이름에 걸맞게 밖으로는 외세로부터 나라를 굳건히 지키며 국토를 넓혔고, 문화, 예술, 학문을 장려함으로써 중세의 정신의 토대를 마련해주었다. /김석모 미술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