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궁 안에 남겨진 신라
왕궁 안에 남겨진 신라
  • 등록일 2021.05.03 20:04
  • 게재일 2021.05.0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경주 월성과 주변 전경
경주 월성과 주변 전경

“덕업이 날로 새로워져 사방을 망라한다.(德業日新 網羅四方)”

신라는 그 나라 이름에 담긴 소망처럼 월성을 중심으로 성장해 주변 나라를 통일하고, 나아가 동아시아 문화교류의 한 축으로 번영했다. 실크로드로부터, 그리고 다시 바다로 이어지는 문화 교류의 중심에 서 있었다.

이곳이 서라벌로 불리던 때, 월성은 신라의 수도에 위치한 왕궁이었으며 정치·문화·경제의 중심지였다. 약 800년 동안 왕과 왕족 그리고 역사 속 인물들이 머물렀던 곳이기도 하다. 실크로드를 통해 건너온 많은 외국 사신들이 오가며 다양한 문화가 함께 어우러졌을 것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월성에는 연주하면 적군이 물러나고, 병이 낫고, 바다의 파도가 잔잔해진다는 피리인 만파식적이 왕실 보물창고인 천존고에 보관되어있었다고 전해진다. 월성은 신라의 국보(國寶)를 보관하던 신성한 공간이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현재 월성에는 드문드문 신라시대 건물을 지탱했던 돌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신라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하지만, 그 긴 역사의 시간이 온전히 땅 속에 남겨져 있음이 속속 확인되고 있다. 월성 내부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조사 착수 이전, 2007~2008년 월성 전체에 대한 지하레이더탐사(GPR)를 실시하였다. 마치 우리 몸을 컴퓨터단층(CT)촬영을 통해 투시해 볼 수 있는 것처럼 지하레이더탐사를 통해 땅 속의 남겨진 건축물의 흔적을 찾아, 대략적인 그림을 그려볼 수 있었다. 월성 내부 3만4천42평의 면적에 2.8m 깊이로 지하레이더탐사를 실시하여 건물의 흔적을 집중적으로 확인하였다. 문(門)의 흔적은 최소 3개소 이상, 건물지는 최소 20개동 이상을 확인하였다. 그 결과를 바탕으로 2014년 월성 내부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시작되었다. 현재 조사 중인 약 6천400㎡ 범위에서는 17개의 크고 작은 통일신라시대 건물지가 밀집되어 확인됐고, 1만1천여점이 넘는 유물들이 출토됐다. 출토유물과 연대분석 검토를 통해, 약 240년 동안 이어진 통일신라시대 전 시기에 걸쳐 건물지가 지어지고 수리되고, 또 다시 새롭게 지어진 상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직까지 월성에서는 정전(正殿)이라고 불릴 수 있는 중심건물은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가로축이 긴 회랑형(복도식 건물) 건물들과 그 주변의 벼루 등 유물의 출토 상황을 통해 현재 조사 지역에는 관청(官廳) 건물이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발굴조사의 결과는 늘 새로운 발견과 또다른 질문을 우리에게 던져주곤 한다. 그 중에서도 우리는 조사 결과들을 통해, ‘그들’의 삶과 ‘그때’의 풍경이 궁금해지곤 한다.

월성 조사를 통해 확인된 월성에 살았던 사람들의 모습을 어떻게 그려볼 수 있을까?

수백 년의 시간이 깃든 월성의 전모를 확인하는 것은 아직 시기상조이다. 하지만 조사를 통해 확인된 몇 가지 힌트들이 우리에게 월성의 단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최문정<br>학예연구사
최문정
학예연구사

먼저 6천여점이 넘게 확인된 기와이다. 기와는 고대 건축물에서 빠질 수 없는 요소이다. 목조건물의 지붕에 올라가며 비와 화재를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또한 기후변화에 견딜 수 있는 내구성을 가진 재료이기도 하다. 더불어 건물의 경관과 장식, 위용을 돋보이기 위해 쓴 막새(瓦當) 등을 사용하기도 한다. 기와는 규격화된 형태의 대량생산이 필요한데, 이를 위해서는 공인(工人)집단의 안정적인 생산체제가 필요했을 것이다. 기술을 익히고 운영하며 국가의 가장 중요한 장소에 기와를 제공했을 신라의 솜씨 좋은 기와 공인들이 떠오른다. 왕궁을 짓고, 또 새로 고쳐 쓰는 동안 그들은 가장 좋은 기와들을 월성으로 보냈을 것이다. 또 월성에는 기와를 쌓아 지붕을 만드는 사람들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월성 내부에서는 흙으로 빚은 그릇, 토기도 다수 출토됐는데 그 중 도부(嶋夫)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것이 눈길을 끈다. ‘도부’가 토기를 만든 사람 혹은 이 과정을 감독한 사람의 이름을 새긴 것으로 추정한 연구 결과를 통해 본다면, 토기를 만드는 ‘도부’라는 이름의 사람이 자신이 만든 토기에 이름을 새기는 모습도 상상해 볼 수 있겠다.

우리는 월성 발굴조사를 통해 ‘왕궁’이라는 특수한 공간이 만들어지고 이용되어온 다양한 단면을 찾고자 한다. 더불어, 그 곳을 호령하던 왕의 발자취 뿐 아니라 묵묵히 월성을 쌓고 가꾸었던 다양한 사람들의 삶의 모습도 찾아가야 할 것이다. 특히 월성이 만들어지고 사용되었던 기간을 생각해본다면 조사·연구의 깊이를 가벼이 여길 수 없다.

차곡히 쌓여가는 충실한 조사와 연구 성과들이 모여, 우리는 신라의 이야기를 새롭게 만나길 기대한다.

월성, 왕궁 안에 남겨진 신라의 이야기는 계속해서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해 줄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