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손경찬의 대구·경북人
서양화가 김길후

예술가를 한 마디로 표현해달라는 물음에 ‘끝없는 빚쟁이’라고 답한 김길후 화백.
예술가를 한 마디로 표현해달라는 물음에 ‘끝없는 빚쟁이’라고 답한 김길후 화백.

사방무인(四方無人)!

그는 어둠의 벽 속에 스스로를 가둔다. 부모님이 주신 이름을 버리고 만오천 여점의 그림을 태우며. 그가 선택한 어둠은 태고의 고요인가 과학의 암전인가. 시간의 블랙홀을 연상케 하는 검은 캔버스 앞에서 일상의 분주함과 소음이 가라앉고 작가는 자기만의 세계에 깊이 침잠한다.

자신이 왜 그림을 그리는지 생각해보았다. 멋있게 자기만의 그림을 그릴 자신이 있는데 겉돌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자각이 들었다. 종이와 붓 한 자루, 까만색 물감 하나로 그림을 시작했다. 블랙 페이퍼의 시작이었다. 없으면 없는 대로, 물감도 없고 돈도 없으면 다른 무엇을 구해서라도 그림을 그려야 하고, 작가는 어떠한 순간에도 어려운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예술가는 세상에 빚을 지고 사는 사람이라고 한다. 예술가가 존경을 받는 것은 세상에 감동을 주기 때문이다. 감동이 없는 예술은 예술이라고 할 수 없다. 감동적인 예술이 되기 위해서는 선험적 물아일체의 자세로 작품 활동에 혼신의 힘을 기울여야 한다. 예술가의 삶이 무거운 것은 그 때문이다.

김 작가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이라는 주제로 동서 융합의 새로운 회화 장르를 모색하고 있다. 중국 전통 동양화의 일필휘지가 재현을 위한 수단이었다면 김 작가의 일필은 인간의 깊은 감성을 담아내는 표현주의적 요소가 강하다.

“왜 검은색이죠? 검은색으로 무엇을 드러내려 하셨어요?”

“무한대라고 할까요? 검은색에 블랙홀 같은 우주의 본질을 담고 싶었어요.”

실을 꿴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배가 고픈 줄도 모르고 실을 꿰다 보면 나중에서 오로지 실을 궤는 행위만 남는다. 자신과 실을 꿰는 행위가 하나 되는 물아일체. ‘나’라는 자아는 빠지고 오로지 실을 꿰는 순수한 경지만 남는다. 작품 속에서 자신을 빼내려고 애썼다. 작가가 개입되면 생각과 고집과 강요가 남고 작품이 식상해진다. 자연이 아름다운 것은 산이 자신을 산이라 말하지 않고 물이 자신을 물이라 주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로지 있는 그대로의 순수성이 산과 물을 아름답게 한다. 후설의 관점에서, 사물을 존재의 본질 그대로 바라본 현상학적 환원이자 선험적 태도이다.

작품 속에는 오로지 영혼만 존재해야 한다. 자크 데리다는 인생이 살만한 가치가 없다고 했다. 그런데도 자살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경이로움을 맞는 순간 때문이라고 했다. 예술가는 인간에게 그 경이로움을 전달하는 사람이다. 시공간을 초월해서 아름다움을 전하려면 초월적인 경지에 이르러야 하고, 그 결과물에 영혼이 담겨야 한다. 자크 데리다가 죽으려고 해도 자연이 너무 아름다워서 죽을 수 없었다고 한 것처럼 좋은 작품은 시공간을 초월해서 나오고 작가가 보이지 않는다.

“작품에 담기는 그 영혼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구름에 가려진 산신령.”

실을 꿰는 동안 영혼이 삼매에 경지에 이르듯이 객관과 주관이 일치하는 초자아의 순간에 자신은 없고 영원만 존재한다. 삼매(三昧)의 경지란 현상학적으로 보자면 선험적인 물아일체며 초월적 세계에 이르는 통로다. 그 세계는 어둡고 긴 좁은 통로를 건너 밝고 드넓은 공터에 이르듯이, 시야에 보이지 않던 산이 바람에 의해 구름이 걷히고 수천 미터의 빛이 보이는 순간에 펼쳐진다. 그 순간 사람들은 구름에 가려져 있던 산신령을 마주하게 된다.

“예술가를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끝없는 빚쟁이.”

예술가는 세상에 빚을 지고 사는 사람이라고 한다. 예술가가 존경을 받는 것은 세상에 감동을 주기 때문이다. 감동이 없는 예술은 예술이라고 할 수 없다. 감동적인 예술이 되기 위해서는 선험적 물아일체의 자세로 작품 활동에 혼신의 힘을 기울여야 한다. 예술가의 삶이 무거운 것은 그 때문이다.

“중국까지 활동의 폭을 넓히게 된 배경을 좀 들려주세요.”

“아트사이트에서 북경 전시회를 해보자는 요청이 왔어요.”

북경으로 건너갔다. 인구가 14억인데 나 한 사람 말을 못한다고 무슨 문제가 될까, 사지 멀쩡한 내가 못 살아갈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용기를 냈다. 더 큰 세상에 가서 이름을 날리고 싶었고, 자신의 작품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마호메트는 산을 불러서 기도를 하겠다고 했다. 산을 어떻게 부르는지 궁금해서 사람들이 모였다. “산이여 오라!” 아무리 기다려도 산이 오지 않으니 마호메트는 “산이 오지 않으면 내가 가리라”하며 사람들을 이끌고 산으로 갔다. 김 작가는 그런 마음으로 북경에 갔다고 한다. 북경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문화특구지역에서 중국작가들과 왕성한 교류를 하며 그는 작가로서 입지를 굳혔다.

김 작가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이라는 주제로 동서 융합의 새로운 회화 장르를 모색하고 있다. 중국 전통 동양화의 일필휘지가 재현을 위한 수단이었다면 김 작가의 일필은 인간의 깊은 감성을 담아내는 표현주의적 요소가 강하다.

한국미술평론가협회 최형순 위원장이 “김길후의 강력함은 거침없는 필선의 속도에서 나온다. 그는 시공간에 얽매이지 않는다. (……) 지구에 한정된 시각과 인간사의 인식만으로 갈 수 없는 세계”라고 평했듯이, 그는 ‘인간의 인식만으로 가닿을 수 없는 세계’를 그리는 작가가 되려 한다.

“가장 인상에 남는 전시회의 에피소드를 말씀해주세요.”

“이틀 만에 200호 다섯 점을 그린 적이 있어요.”

2004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전시회에 초대하고 싶다는 전화가 왔다. 작품이 마음에 든다며 캠퍼스로 200호 정도 되는 작품을 원했다. 그려본 적이 없는 그림이지만 무조건 작품이 있다고 했다. 사진을 찍어서 보내달라고 하는 걸 사흘만 기다려달라고 했다. 본능적으로 그것이 자신에게 주어지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림이 없어서 전시회를 못하나 졸작이 나와서 못하나 똑같으니 일단 그려보자고 마음먹었다. 캔버스를 펼 곳이 없어서 길에서 그림을 그렸다. 스스로도 믿기 어려웠지만 이틀 만에 200호 다섯 점을 그렸고, 다섯 점 모두 전시회를 했다. 두 점의 그림이 지금 서울에 소장되어 있다. 2008년 보건대학 임당박물관인당박물관에서 개인전을 한 이후, 김 작가는 활동 영역을 넓히기 위해 2009년 파주로 작업실을 옮기고 여러 전시회에 참여했다. 그리고 2010년에 북경의 작업실을 열고 한국을 오가며 작품 활동 중이다.

“전시회를 하면 그림이 좀 팔리나요?”

“전시를 하고 나면 생각하지 않았던 소장가들에게 다수의 작품을 판매하는 결과는 늘 있었습니다. 예술은 파는데 목적을 두지 않지만 작가로서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타협이라고 해야겠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작품 제작에 임하는 나 자신의 태도입니다.”

전시회에 임하려면 명확한 이유가 있어야 하는데, 그림을 팔거나 아니면 명예로운 전시회를 하거나 무엇이든 하나는 만족이 되어야 한다. 2018년 북경 송좡당대문헌미술관에서 개인전을 했다. 이 미술관은 중국 유일한 비영리 아카이브 미술관이다. 전시회를 제의한 우홍 관장이 8000자나 되는 긴 비평을 써주었다. 기록을 영원히 보관하겠다고 했다. 그 결과 아카이브 미술관에 김 작가의 기록이 영원히 남게 되었다. 사라지지 않을 기록이다. 2019년, 서울에 있는 대안공간 Emu gallery에서 개인전을 했고, 그 전시를 통한 포럼에서 그림에 대한 평소 생각들을 기록으로 남겨 책자를 발간했다.

“어린 시절 얘기 좀 해보세요.”

별명이 스마일이었고 작은 피카소였다. 수채화 파스텔 그림을 잘 그려서 동네 형들 그림 숙제를 다 해줬다. 그림을 잘 그렸지만 당시에 그는 화가가 아닌 원예사의 꿈을 갖고 있었다. 씨를 받아서 번식시키며 꽃을 가꾸는데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가족회의 끝에 재주를 살려 직업을 가지라는 작은 아버지의 말대로 미술대학에 진학했다. 최고의 화가가 되겠다는 꿈을 갖고, 연필과 붓을 한 번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끝없는 경지에 다다르지 않을까 하는 욕망으로 그림을 그리다 갑작스러운 허무주의에 빠져서 4년간 다양한 경험을 하며 방황했다. 어느 날 나 자신의 꿈으로부터 너무 멀어졌다는 생각이 들었고, 서른세 살에 다시 대학원에 진학했다. 김길후의 새로운 예술 세계가 펼쳐지는 출발점이었다.

“앞으로 어떤 그림을 그릴 생각인지.”

“일필휘지의 속도감 있는 붓질로 인간의 깊은 고뇌와 철학을 담고 싶어요.”

예술은 인생이라는 긴 여정에서, 찰나의 순간에 저쪽 세계를 보는 거라고 사르트르가 말했다. 김 작가는 58살에 사르트르가 본 그 초월적 세계를 보았다. 좋은 건 누가 봐도 좋다. 예술의 경지에 이른 작품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환갑 이후로 그는 동서양의 융합적인 모습을 이룬 그림을 그릴 생각이다. 자크 데리다의 해체주의로 서구주의 이성적 방식을 해체하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다양한 시도를 해나갈 생각이라고.

김 작가는 2010년 북경아트사이드갤러리 초대전으로 북경과 인연을 맺고, 북경과 한국에 작업실을 두고 있다. 2014년 북경 화이트박스아트센터에서 왕충천(2013년 베니스비엔날레 감독, 북경중앙미술학원 교수) 기획으로 개인전을 개최하였고, 2016년 포항시립미술관에서 개인전을 했고, 2018년 한국문화관광부 후원으로 송좡당대문헌미술관에서 전관 전시를 했다. 2020년 창원조각비엔날레 본 전시에서 해체주의적 조각을 선보였고, 2020년도 2021년 제11회 한국미술평론가협회 작가상을 받았다. /글 장정옥 소설가

(199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2019년 김만중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