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手채화
바람의 手채화
  • 등록일 2021.03.03 20:13
  • 게재일 2021.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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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김민서 제공

소소리바람이 옷깃을 차갑게 파고들더니 어느새 샛바람(春風)이 불어온다. 샛바람이 가지 끝을 간질이면 꽃이 눈을 비비며 깨어난다. 꽃이 피면 이를 시샘하는 꽃샘바람이 심술을 부린다. 이어 산과 들에 봄기운이 완연하면 명지바람이 불어와 온누리를 따뜻하게 쓰다듬는다.

봄바람은 겨우내 움츠렸던 사람의 마음도 깨운다. 하늘 맑고 바람 좋은 날, 우리네 아낙은 겨우내 때 묻은 이불 홑청을 뜯고 두꺼운 옷을 꺼냈다. 우물가에서 빨래를 방망이로 두드리고 치대고 차박차박 발로 밟았다. 때가 빠지면 빨래를 헹궈 두 손으로 쥐어짰다. 물기 빠진 빨래를 탈탈 털어 빨랫줄에 널었다. 바지랑대를 높이 치켜세우면 높다란 빨랫줄에서 빨래가 휘날렸다. 그러고 나면 겨우내 찌들었던 마음까지 상쾌해졌다.

가는바람: 약하게 솔솔 부는 바람.

간들바람: 부드럽고 간드러지게 부는 바람.

갈바람: 가을바람.

강바람: 비는 내리지 아니하고 심하게 부는 바람.

강쇠바람: 첫가을 부는 동풍.

갯바람: 바다에서 육지로 부는 바람.

건들바람: 초가을 선들선들 부는 바람.

고추바람: 살을 에듯 매섭게 부는 차가운 바람.

꽃바람: 꽃이 필 무렵 부는 봄바람.

꽃샘바람: 이른 봄, 꽃이 필 무렵에 부는 쌀쌀한 바람.

높새바람: 동북풍을 달리 이르는 말.

도리깨바람: 도리깨질을 할 때 일어나는 바람.

꽁무니바람 : 뒤쪽에서 불어오는 바람.

마파람: 뱃사람들의 은어로, 남풍(南風)을 이르는 말.

명지바람: 보드랍고 화창한 바람.

내기바람: 산비탈을 따라 세게 불어 내리는 온도가 높거나 건조한 바람.

높새바람: 동북풍을 달리 이르는 말.

박초바람: 배를 빨리 달리게 하는 바람.

벼락바람: 갑자기 휘몰아치는 바람.

서늘바람: 첫가을에 부는 서늘한 바람.

서릿바람: 서리가 내린 아침에 부는 쌀쌀한 바람.

선들바람: 가볍고 시원하게 부는 바람.

손돌바람: 음력 10월 20일께, 억울하게 죽은 뱃사공의 원혼이 몰고 온다는 매서운 바람.

소슬바람: 소나무 사이를 스쳐 부는 바람.

솔솔바람: 부드럽고 가볍게 계속 부는 바람.

하늬바람: 서쪽에서 부는 바람.

황소바람: 좁은 틈으로 세게 불어 드는 바람.

흘레바람: 비를 몰아오는 바람.

가을이 오면 하늬바람이 불어왔다. ‘하늬’는 하늘바람으로 갈바람 또는 가을바람이라고도 한다. 옛말로는 가슬, 가실, 秋風인데, 뱃사람들은 이를 가수알바람이라고 불렀다. 먼 하늘에서 솔솔 불어오기에 실바람이며 선선하기에 선들바람이다. 서리가 내리면 서릿바람이 불고 이어서 손돌바람이 분다. 겨울이 오면 문풍지 사이로 황소바람이 들어온다.

부는 바람만 바람이 아니다. 가마를 타고 가면서 쐬는 바람은 가맛바람, 신이 나서 엉덩이를 흔들며 걸으면 궁둥잇바람, 여자가 극성스럽게 설치면 치맛바람, 신이 나면 신바람, 춤에 빠지면 춤바람, 쓸데없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면 헛바람이다. 그뿐인가. 산과 들로 놀러 가면 소풍이고 투기하러 떼를 지어 몰려가면 광풍이다. 몽고풍, 왜색풍, 복고풍, 바람을 닮은 현상도 바람이다.

바람의 이름에는 우리네 삶의 정서가 배어 있다. 바람에 따라 삶도 달라졌다. 재를 넘어 문틈으로 솔솔 들어오는 바람을 황소바람이라고 부른다. 모내기할 즈음 부는 아침의 동풍과 저녁의 북서풍을 피죽바람이라고 하는데, 이 바람이 불면 흉년이 들어 밥은커녕 피죽도 못 먹는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음력 10월 20일께 불어오는 몹시 매서운 바람은 손돌바람으로 억울하게 죽은 뱃사공의 원혼이 몰고 온다고 믿었다.

바람은 때와 장소와 시간에 따라 다 이름이 다르다. 덴바람, 댑바람, 도래바람, 돌개바람, 회오리바람, 된새바람, 들바람, 마칼바람, 맞바람, 몽고바람, 벼락바람, 갈마바람, 용숫바람, 짠바람, 흔들바람, 산들바람, 흙바람, 갑작바람, 날파람, 꽃바람, 새벽바람, 노대바람, 왕바람, 문바람, 윗바람, 싹쓸바람(태풍), 틈새바람….

눈에 보이지 않지만, 바람은 구석구석 가리지 않고 쏘다니며 제 할 일을 한다. 겨우내 땅속에서 잠자던 화신花神을 깨우고 가지 끝 꽃눈을 간질인다. 심술이 나면 꽃샘바람을 불어대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명지바람으로 쓰다듬는다. 그러다 먹구름을 몰고 우르르 몰려와 나무의 멱살을 흔들고 지붕을 날려버린다. 때로는 몸을 비틀어 하늘로 용솟음친다.

바람은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다. 바람이 없다면 세상은 활기를 잃고 적막해진다. 바람이 아니면, 누가 씨앗을 퍼트려 산과 들을 푸르게 할 것이며 누가 청둥오리를 높이 밀어올려 히말라야 산맥을 넘게 할 것인가. 누가 사막을 쓰다듬어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소녀의 머리칼을 누가 휘날려 소년의 숫기를 깨울까.

보이지 않는 손, 바람은 산들바다를 아름답게 만든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바람이 그린 手채화이다. /김이랑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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