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사에 코페르니쿠스적 사고 전환이 있었다면 제 개인사엔 ‘알바트로스적’ 사고 전환이 있었습니다. 알바트로스적 사고 전환, 이 말은 제가 지어냈습니다. 스무 살 시절, 어리바리한 저에 비해 독서로 무장한 후배는 통렬한 통찰로 세상을 바라보는 이였지요. 격조 섞인 시니컬함이 그녀의 무기이자 매력이었지요. 그녀는 랭보와 보들레르와 말라르메 등 프랑스 시인을 좋아했는데, 치기로서의 제스처가 아니라 실제 그런 시인들의 성향을 좇았습니다. 세속적인 근성과는 먼 보들레르처럼 그녀가 가장 못 견뎌 한 것은 편안하고 평화로운 일상이었습니다. 대신 고매한 정신력으로 피로한 지적 노동자를 자처했지요.

눈치 보지 않고, 주눅 들지 않고 개별자로서 그 어떤 사고로부터 자유롭고자 했습니다. 자신 외에는 무관심하다시피 한 자유로운 행보, 그것은 타자를 먼저 자유케 함으로써 그것을 의식하지 않을 수 있는 진정한 자유로움이었습니다. 문제는 그런 시선을 타자들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었지요. 내 자유를 헌납할 테니, 네 자유도 속박해라, 이런 분위기가 팽배하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그녀를 만나기 전 제게 세상은 무조건 아름답고, 선하고, 맑고, 명랑하고, 소박한 것이어야 온당했습니다. 추하고, 악하고, 흐리고, 어둡고, 화려한 것은 경계해야 할 그 무엇인 줄 알았더랬지요. 이유 불문하고, 타자를 의식하는 자로서 지닐 수 있는 당위의 사고틀이었지요. 이런 제 내면의 빈곤과 약점을 포착한 그녀의 눈썰미가 불편하면서도 끌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평범한 학생들에 비해 온 우주를 꿰뚫는 듯한 그 눈빛이 저는 좋았습니다. 세계관의 확장 유무와는 상관없이 어느덧 제 사고 방식도 많이 달라졌습니다. 그녀와의 교류 덕분이었지요.

남다르게 앞서가는 존재는 외롭고 고독하기 마련입니다. 보들레르의 시 ‘알바트로스’를 읽던 그녀를 떠올립니다. 거대한 알바트로스는 선원들에게 잡힌 신세입니다. 빠져나갈 길이 없습니다. 성치 못한 몸으로 그 큰 날개를 질질 끌며 선원들의 담뱃불에 부리 지짐을 당하는 수모를 겪습니다. 홀로 우뚝한 영혼인 알바트로스는 평범한 선원들 앞에서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조롱의 대상이 되는 것이지요. 보들레르는 알바트로스적 상황을 엮어 자신의 처지를 시적 은유로 치환했습니다. 천상의 생각을 지닌 영혼들이 지상으로 내몰리면 알아서 개척자가 됩니다. 제 눈에는 알바트로스를 읽는 그녀야말로 보들레르의 화신이었습니다. 우뚝한 새가 평범함의 지상에 유배당했을 때 겪게 되는 가혹함. 그녀는 정말이지 제 정신의 웃자람을 알바트로스 새가 된 것처럼 것처럼 태연히 즐겼습니다. 선원들을 둘러싼 방관자 어디쯤에 위치한, 깜냥도 되지 않은 저는 마냥 그녀가 존경스러웠습니다. 그녀 인생관을 지배한 한 가지 철학은 언제나 단독자로서의 우뚝한 자아에 닿아 있었습니다.

위대한 철학자의 큰 업적도 알고 보면 작은 경험에서 비롯됩니다. 모든 사유는 디테일한 경험의 집적물이지요. 남들 눈에는 사소하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체험이 한 사람의 인생관을 형성합니다. 좀 더 지난 뒤 그녀의 그런 사유체계가 레비나스가 말한 ‘타자’ 인식과 맥락을 같이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전적이고 정통적인 철학자들이 존재나 의식 등, 자기 안의 문제들에 몰두했다면 현대철학자 레비나스는 특별하게도 그 관심을 ‘타자’에게로 확장시켰습니다. 집단적이고 전체적인 사유에 반발할 준비가 되어 있는 이라면 레비나스 식 타자의 철학에 공감할 것이에요. 그에 따르면 ‘나와 같을 수 없는 절대적인 타자가 있다.’라는 걸 인정하는 것입니다. 타자 존재에 대한 이런 확고한 인정(認定)이자 책임감이 곧 자아 주체성의 출발점이 되는 것이니까요.

김살로메소설가
김살로메
소설가

스스로 자유로워지려는 자는 타자부터 자유케 합니다. 획일성이란 성에서 탈출하려면 자신만 족쇄를 자른다고 되는 게 아니잖아요. 타자의 수갑부터 풀어주는 게 우선이지요. 문제가 되는 건 언제나 타자는 그 수갑을 풀 의지나 마음이 없을 때지요. 타자는 결코 내가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을 무시하고 어떤 영향권 아래 두고 조종하고자 할 때 강요된 이데올로기가 생기는 것이지요. 저만치 나아가는 개인의 뒤꿈치를 당겨 집합적 타원 안으로 밀어 넣는 일, 그 안에서 길들여진 풍요를 예감하는 것만이 온당한 줄 알았던 제게 후배와의 교류는 알바트로스적 사고의 전환을 거쳐 레비나스 식 통찰로 나아가게 한 것이지요. 내 고통은 타인의 고통이며, 내 욕망도 타인의 욕망이며, 내 환희 또한 타인의 그것입니다. 타자의 존재를 대범하게 인정함으로써 타자로부터 자유를 얻고자 하는 희열, 보들레르를 다시 꺼내 읽는 밤, 타자의 고유성을 먼저 알고 끝내 스스로 자유로웠던 그 시절의 그녀가 저 멀리 알바트로스 새가 되어 날갯짓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