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곡서원의 은행나무.

노란 꽃비가 내린다. 바람이 쓰윽 지날 때마다 화라락 은행잎의 비행이 시작된다. 가만히 귀 기울이면 그들의 비행하는 소리가 들릴 듯하다. 쏴아, 바람이 또 분다. 겨울을 준비하려고 옷을 벗는 은행나무의 바스락거림 연주가 울려 퍼진다. 오늘 또 길을 나서야겠다.

몇 해를 벼르고 별러 영양군 입압면의 서석지를 찾아갔다.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어 반은 나무에 머물고, 반은 떨어져 발밑을 덮고 있을 때가 장관이라 지난해, 지지난해까지 사진을 찾아보며 가장 절정인 때를 골랐다. 하지만 서석지 주차장에 들어서며 알았다. 일주일 전에 왔어야 했다는 걸. 400번의 가을을 그 자리에서 맞았을 텐데 올해는 더 일찍 옷을 벗었다. 하늘 향해 높게 뻗은 가지에는 한 잎도 남아 있지 않았다. 대청마루에 올라 그 풍성한 노란빛의 수런거림을 오후 내내 듣다 오려고 했던 계획은 날아가 버렸다. 서석지 못 안에 이미 연주를 끝낸 노란빛이 가득했다. 내년을 기약할 수밖에.

그다음 찾아간 곳은 경주 통일전 가로수길이다. 7번 국도를 달리다 통일전 삼거리에서 주차장까지 2킬로미터에 이르는 길이 노란빛으로 물들었다. 지난 주말이 절정이었다. 쭉 뻗은 가로수가 가슴을 트이게 하고 넓게 펼쳐진 통일전 마당이 또 한 번 눈을 시원하게 한다. 잔디도 노랗게 단풍 색으로 변했고 정자 위에서 내려다보는 들 또한 갈색이라 풍경이 그저 그만이다. 은행나무 가로수와 들판의 이중주가 아름다운 곳이다. 가장 늦게 물드는 곳이 경주 운곡서원이다. 햇살의 양이 적어서 서석지와 통일전 은행잎이 다 떨어지고 나서야 조금씩 노란색을 띠기 시작한다. 같은 길에 선 나무 중에도 하루 종일 해를 보는 나무는 노래져도 건너편 건물 그늘에 가려진 나무는 열흘 이상 늦게 물든다. 하지만 조금 늦다뿐이지 은행나무의 그 노란빛은 같다. 한껏 노란 물이 올랐을 무렵에는 서원을 오르는 계단부터 은행잎으로 덮인다. 해질 무렵이면 찍사들의 삼각대가 쭈욱 둘러서 한복을 입은 모델까지 세워놓고 셔터를 누르기 바쁘다.

해질녁 서원의 공기가 사람들을 불러들인다. 햇살이 큰 나무 사이로 조금 남은 빛을 흘려보내서 실크 커튼을 드리운 듯하다. 바람이 살짝 불기라도 하면 보는 이들의 탄성에 셔터 소리가 묻히기도 한다. 오래된 기와에 떨어지는 노란 잎, 대나무 담장을 뚫고 들려오는 냇물 소리, 운곡산방의 차 따르는 소리까지 어울려 웅장한 협주곡이 완성된다. 가을 끝자락이 들려주는 음악에 취해 어둑해질 때까지 나무 밑을 서성인다.

이곳 말고도 은행이 찬란한 곳으로 가까이는 오어사, 조금 멀리 대구의 도동서원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영천 임고서원에 들러 금관처럼 생긴 은행나무에 취해봐도 좋다. 경주 도리마을은 은행잎이 다 진 다음에 가도 좋은 곳이라 볼 수 있는 기간이 길다.

김순희 수필가
김순희 수필가

누가 나무를 제일 사랑하지? 라는 질문에 시인은 봄은 나무에 예쁜 나뭇잎 옷을 입혀 주고, 여름은 나무에 하얗고 노랗고 빨간 꽃을 피워 주며, 가을은 맛있는 과일을 주고 화려한 단풍을 입혀 준다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진 겨울이 나무를 제일 사랑한다고 하며 말을 끝맺는다. 나무들에게 휴식을 주니까. 은행나무가 겨우살이를 준비하는 줄 알았는데 시인은 겨울이 나무에게 휴식을 선물하는 거라고 일러준다.

은행나무는 오래 한자리를 지킨다. 수백 년은 그 자리에서 오가는 이들을 보았을 것이다. 함부로 대할 게 아니라 나무님이라고 치켜세워 주어야겠다. 오랜 연륜 탓인가 버려야 할 시기를 알고 어김없이 늦가을이면 잎을 내려놓는다. 오래 멀리 가는 방법을 터득한 은행나무들의 루틴이다.

종교인들은 종교활동의 하나로 발생지나 순교지를 따라 성지순례를 한다. 빵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맛있다는 빵집을 찾아가 맛보는 빵지순례를 한다. 나는 계절 따라 피는 꽃이나 숲을 찾아다닌다. 꽃지순례이다. 11월에는 은행나무의 비행을 보러 다녔다. 그런 내게 은행나무가 말한다. 바람이 분다, 떨어져야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