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의 적벽’처럼 아름다운 풍경서 큰 사상 일어나
‘동방의 적벽’처럼 아름다운 풍경서 큰 사상 일어나
  • 등록일 2020.09.23 19:50
  • 게재일 2020.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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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문화의 상징과 공간 (4) 형산강

長郊細雨草離離(장교세우초리리) 가는 빗속 너른 들의 풀은 무성한데

白裌黃冠次第隨(백겹황관차제수) 흰 소매, 황관으로 차례로 걸어가네

節屆曾翁言志日(절계증옹언지일) 찾아온 절기는 증옹이 뜻을 말한 날이고

風輕程氏過川時(풍경정씨과천시) 가벼운 바람은 정씨가 시내 지나던 때네

要看大海千流會(요간대해천류회) 큰 바다로 여러 물길 모이는 걸 보면서

兼取兄山萬景奇(겸취형산만경기) 형산의 온갖 절경을 함께 찾아보네

意思超然塵累外(의사초연진루외) 초연해진 생각으로 속세를 벗어나

三春行樂互題詩(삼춘행악호제시) 무르익은 봄을 즐기며 서로 시를 짓네

 

다채로운 형산강의 풍경들.
다채로운 형산강의 풍경들.

묵암(默庵) 허강(1766∼1822)이 쓴 ‘양동의 여러 친구와 함께 형산강을 거닐다(與良洞諸益, 過兄山江)’라는 시다. 묵암은 입재(立齋) 정종로(1738∼1816)를 사사했는데, 정종로는 소퇴계(小退溪)라 불리던 대산(大山) 이상정(1711∼1781)계의 문인이니, 영남학파의 학통을 이은 인물이라 하겠다.

봄날의 정오 무렵, 묵암은 가늘게 내리는 빗속에서 풀이 무성한 형산강 둑을 친구들과 함께 거닌다. 시인은 촉촉이 내리는 비를 맞으며, 송나라의 정호가 봄날을 즐기던 모습을 떠올리고, 더 먼 옛날 증석이 공자와 나누던 대화를 상기한다.

공자가 말한다. “권력이 있는 사람이 너희의 능력을 알아준다면 어떡하겠느냐?” 처음에 자로가, 다음으로 염유가, 그 다음으로 공서화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증석이 대답한다. “늦봄에 봄옷이 이미 이루어지면 관을 쓴 사람 5, 6인과 아이 6, 7명과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 쐬고, 노래하면서 돌아오겠습니다.” 증석의 대답에 공자는 “나도 증석과 같이 하겠다.”라고 답했다.

공자는 제자의 답 중에서 증석의 답을 최고로 꼽았고, 자신도 증석과 같은 생각이라 하였다. ‘벼슬에 집착하지 않고,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며 자연과 하나 되는 삶을 지향하였기 때문’이었다.

묵암에게 형산강은 공자가 거닐던 기수와 같은 곳이었다. 묵암은 여러 시내(川)의 물이 모여 형산강을 이루고, 이 강은 더불어 아름다운 산과 어울려 있음을, 그렇기에 기이한 경치를 지니게 됨을 말하였다.

그야말로 형산강의 아름다움을 온몸으로 만끽하면서, 함께 형산과 제산의 뛰어난 경치에 눈길을 던지며, 비 오는 봄날의 정취와 가벼운 바람이 이끄는 나들이에서 속세의 근심까지도 잊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묵암이 바라보던 형산강의 아름다움은 어느 정도였을까? 묵암보다 200여 년 전, 쌍봉(雙峰) 정극후(1577∼1658)의 시에서 그 아름다움의 정도를 만날 수 있다.

 

 

선인들의 시에 남겨진 아름다운 형산강

울산서 시작해 경주 지나 영일만으로 흐르며

풍류도사상·화쟁사상·이기론·동학사상 등

우리나라 4대 사상의 발현지로 이름 알려

만물을 생장시키는 근원이자 생명의 원천

문화와 상생의 열쇠 쥐고 오늘도 흘러간다

壬戌新秋月旣望(임술신추월기망) 임술년 초가을 열엿새 날에

使君來作兄江遊(사군래작형강유) 공(김존경)께서 형산강에 나들이 오셨네

兄江水闊波運海(형강수활파운해) 형산강 드넓어 물결이 바다와 맞닿고

子夜天淸月滿舟(자야천청월만주) 깊은 밤 하늘은 맑아 달빛 배에 환하네

抹輕雲橫遠浦(일말경운횡원포) 한줄기 구름 멀리 포구까지 뻗었고

數聲長笛落芳洲(수성장적락방주) 몇 줄기 긴 피리 소리 아름다운 물가에 가득하네

東韓赤壁今如此(동한적벽금여차) 동방의 적벽이 바로 여기니

不必蘇仙名獨留(불필소선명독류) (세상에) 소동파의 이름만 홀로 남을 필요 없으리

‘형산강에 배를 띄우고 상공 김존경 좌하께 올리다(兄江泛舟奉呈金相公座下)’라는 시로 ‘쌍봉선생문집(雙峯先生文集)’에 실려 전한다. 흥해에서 태어난 쌍봉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었던 정삼외의 둘째 아들이다. 여헌(旅軒) 장현광(1554∼1637)과 한강(寒江) 정구(1543∼1620)의 제자로, 효종의 왕자사부(王子師傅)를 지냈다.

이 시를 쓴 곳은 형산강에서도 부조장터가 있던 곳으로 여겨진다. 당시 경주 부윤이었던 김존경과 함께 형산강에 배를 띄워놓고 뱃놀이를 즐겼다. 때는 바야흐로 가을로 접어들 무렵이었다. 달빛 그윽이 내리는 배에서 쌍봉은 형산강의 아득한 물결을 응시하고 있다. 구름 사이로 보이는 맑은 하늘과 나무하는 목동의 피리 소리를 들으며 소동파가 배를 타고 유람하면서 적벽부를 짓던 모습을 떠올린다. 동방의 적벽이 바로 형산강의 이곳이며, 동방의 적벽에서 쌍봉은 또한 동파가 되어 시를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형산강에 대한 노래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동방오현인 회재(晦齋) 이언적(1491∼1553)은 형산강을 어떻게 대면했을까? ‘회재선생문집’에 실린 ‘형산강가에서(兄山江上)’라는 시를 보자.

湛湛江水本來淸(담잠강수본래청) 맑고 맑은 강물, 본래 맑았는데

雨歇今朝濁似涇(우헐금조탁사경) 비 개인 오늘 아침에는 흐리기가 똥물 같네.

萬古不隨淸濁變(만고불수청탁변) 오랜 옛날부터 청탁의 변화를 따라가지 말라 하였으니

巍然江上數峯靑(외연강상수봉청) 강가 높은 곳에서 봉우리의 푸르름을 세어보누나.

 

회재는 비 온 뒤의 형산강을 응시하며, 물길의 청탁과 산봉우리의 푸르름을 대비시켜 우리 삶의 태도와 이치를 돌아보도록 하고 있다.

유학에서 공부는 내가 지닌 덕을 어떻게 밝힐 수 있을까에 있다. 그리고 그 출발을 격물(格物)에 두었다. ‘대학’에서 “옛날에 밝은 덕을 밝히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그 나라를 다스리고, 그 나라를 다스리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그 집안부터 가지런히 하고, 그 집안을 가지런히 하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그 몸을 닦고, 그 몸을 닦고자 하는 사람은 그 마음을 바르게 하고, 그 마음을 바르게 하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뜻을 정성스럽게 하고, 그 뜻을 정성스럽게 하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그 아는 것을 극진히 해야 할 것이니, 아는 것을 극진히 하는 것은 사물의 이치를 궁구히 하는 데 있다”고 한 것도 그것이다.

나의 마음에 있는 ‘명덕(明德, 밝은 덕)’을 밝히기 위해 가장 먼저 할 일을 격물에 두었으니, 이는 무엇보다 격물(格物)이 치지(致知)를 위한 매우 중요한 과정이 되며, 격물이 아니고서는 진정한 앎, 참된 앎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그러기에 주자도 ‘대학’의 ‘격물치지보전(格物致知補傳)’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앎을 지극히 하는 것이 격물에 달렸다고 하는 것은 나의 앎이 지극히 하는 것이 사물을 접하여 그 이치를 궁구하는 데에 달렸음을 말한 것이다. 무릇 사람 마음의 영명함은 본래 지각을 갖추고 있지 않음이 없고, 세상의 존재물은 이치를 갖추지 아니한 것이 없다. 다만 이치에 대하여 궁구치 못한 까닭에 앎에 미진한 면이 있게 된다.”

주자는 궁극적인 앎에 다가가기 위해 격물에 좀 더 다가가야 한다고 하여 강조한다. 회재가 탁류를 마주하면서 마음의 태도와 자세를 돌아보도록 한 것은, 사물의 이치에 깊이 다가가 그 의미를 알아가는 것이 진정으로 앎에 나아가는 것임을 에둘러 말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형산강은 항상 아름다움으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강좌(江左) 권만에게 형산강은 슬픔으로 마주한 강이었다. 강좌는 1728년에 형산강을 만난다. 그리고 형산강을 처음 마주한 날 시를 쓴다. ‘배를 타고 형산강을 건너다 대송의 적소를 바라본다(舟渡兄江。望大松謫所)’라는 시다. 강좌는 영일현에 유배 오던 날 시를 썼다.

兄江東蹙動深坤(형강동축동심곤) 형산강의 동쪽, 땅이 다한 곳

斜日揚舲渡海門(사일양령도해문) 석양에 돛단배 타고 해문을 건너네

隔浦煙生槐樹綠(격포연생괴수록) 포구엔 느티나무 그늘 사이로 연기 이는데

舟人說是大松村(주인설시대송촌) 뱃사공이 말하길, 이곳이 대송촌이라 하네

영일현에 도착해 배를 타고 형산강을 건너 대송에 당도했을 때의 정황을 묘사하고 있다. 강좌가 형산강에 도착했을 때는 해질 무렵이었다. 포구에 도착할 즈음, 느티나무 그늘 사이로 저녁연기 자욱하게 이는 대송의 모습이 선하다.

울산 백암산에서 발원한 형산강은 옛 진한의 땅, 옛 신라의 수도인 경주를 지나 영일만으로 흐른다. 신라가 통일을 위한 힘을 지니게 되는 첫걸음은 아달라왕의 포항 흡수가 그 출발점이었다. 그런 만큼 형산강을 함께 하는 포항과 경주는 문화적으로 지리적으로 공생의 관계였다.

형산강에서 풍류도사상이, 원효의 화쟁사상이, 회재의 이기론이, 최제우와 최시형의 동학사상이 발현되었다. 우리나라 4대 사상의 발현지가 된 것이다. ‘강’은 만물을 생장시키는 근원이고, 생명의 원천이다. 강은 문화와 문명이 일어나고 전하는 통로가 된다. 인류의 역사가 형성되는 강, 문화와 문화의 흐름과 상생의 열쇠를 쥐고 있는 강, 신라 천년의 사직은 형산강에서 출발해 형산에서 마감했다. 그리고 오늘까지 문화를 만들고 공유하면서 흐르고 있고, 또 흘러갈 것이다. <사진/안성용>

글/신상구

위덕대 자율전공학부 교수, 양동문화연구소 소장, 포항문화재단 이사. 동국대 국문과에서 ‘수운 최제우의 성경론과 문학적 실현 양상 연구’로 박사학위 취득. 저서 ‘치유의 숲’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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