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문학을 하는 나로서는 늘 고민거리가 한국 현대라는 것이 어떻게 해서 ‘나타날’ 수 있었으냐 하는 것이다.

요즘은 정치라는 것에 대한 관심도 꽤나 시들해져서 시간을 내서 평소 관심을 갖던 접붙이기, 접목이라는 것에 대해 더 찾아보게 되었다. 왜냐하면, 나는 이 접붙이기에 한국 현대의 형성 과정의 ‘비밀’이 숨어 있을 것이라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한 사회에 새로운 문화가 형성되는 과정에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을 수 있다. 한국 근대를 일본이 가져다주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람들은 주로 이식(transplantation)과 모방(imitation), 또는 복사(copy)에서 해답을 찾는다.

시인이자 비평가였던 임화는 옛날에 순전한 이식이란 아프리카 원주민 사회 같은 곳에나 가능하다고 하였는데, 나는 그조차 아프리카에 대한 잘못된 생각에서 나온 것이라 믿는다.

순전한 이식이란 모래땅, 황무지에 파인애플을 옮겨다 심는 것 같은 것을 말하는데, 사회라는 것에 그런 순전한 이식이란 것이 과연 가능하겠느냐 하고 의심한다. 물론 이식과 모방, 복사는 새로운 문화 형성의 쉬운 방법이자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새로운 창조에는 반드시 ‘원래’의 것과 외래적인 것의 ‘접합’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간과한 것이 아닐까 한다.

나는 대신에 접붙이기, ‘접목’이라는 식물학적 용어를 어떻게든 활성화해야 하겠다고 생각한다. 가지에 토마토도 접붙일 수 있고 벤자민에 귤도 접붙일 수 있고 고욤나무에 감나무를 접붙인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블로그 같은 것을 보면 성경에 고욤나무의 비유가 나온다고도 한다. 그것은 오래된, 버리지 못하는 습성, 생각 등에 비유되며, 감나무와 접을 붙여야만 좋은 열매를 얻을 수 있기에 사람아 자신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받아들여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을 말한다는 것이다. 이 접붙이기에서 접을 붙이는 나무를 ‘대목’, 붙여지는 것을 ‘접수’라고 한다. 그러니까 접붙이기의 원리를 잘 생각해 보면 이 식물세계의 진실이 인간의 문화 형성 과정에도 아주 잘 들어맞는 ‘비유’가 될 수 있지 않겠는가? 대목과 접수는 서로 접을 붙일 때 나무의 형성층이 서로 잘 맞아야 서로 다른 두 생명이 원만하게 이어져 훌륭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한다. 맞아들이는 쪽만의 의지로도 아니요, 붙어드는 쪽의 의지만도 아닌, 양방, 서로의 ‘뜻’이 조화롭게 어울려야 풍성한 문화를 새롭게 이룰 수 있지 않을까?

사회문화의 전환기에 새로운 문화를 형성하는 방식에는 여러 차원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식도, 복사도, 모방도 다 그 방법이지만 원리주의적 고수, ‘국수’가 아닌 다음에야 접을 잘 붙여 서로의 강점을 살리는 것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방법이 아닌가 생각한다.

앞으로 나도 한 번 서투른 농사꾼처럼 이 접붙이기의 묘미를 배워 봐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면 이 식물 세계가 선사하는 인문학의, 문학의 이야기도 엿들어 볼 수 있지 않을까?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 <한국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