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
(15) 경주 사람들

‘신라인의 미소’를 떠올리게 하는 경주 얼굴무늬 수막새.

낯선 도시를 방문한다는 건 그 공간이 간직한 고유의 문물을 접하고, 거기서 생활하는 사람들과 만나는 행위다. 우리는 이걸 ‘여행’이라 부른다.

신라 천년의 빛나는 유적·유물과 즐겁게 조우할 수 있는 경주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한국 최고의 여행지 중 한 곳. 하지만, 이런 걱정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서울과 경기도에 사는 지인들은 가끔 묻는다.

“경상도 사람들은 무뚝뚝하고 불친절하다던데, 경주도 그래?”

이 물음 앞에 설 때면 기자의 경험담을 들려주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곤 했다.

100년의 역사를 지닌 경주 중앙시장. 무거운 짐을 옮기는 할머니가 있어 아주 잠깐 도와줬다. 그 작은 도움에도 기어코 잘 삶은 수육 한 점을 입 안에 넣어주는 늙은 상인의 환한 웃음이 생전의 내 할머니와 닮아 있었다. 따스하고 푸근했다.

점심을 먹기 위해 한두 차례 들렀던 식당. 비싸고 거창한 레스토랑이 아니었다. 손님들의 접시가 비면 청하지 않았음에도 거기 담겼던 반찬을 몇 번이고 다시 가져다주는 정겨운 풍경. 주인장은 32년 동안 경주에서 밥집을 하며 아이들을 키웠다고 말했다.

거리에서 길을 묻거나, 택시에 올라 “혼자 보기 아까웠던 추천 관광지가 있나요”라고 궁금증을 표했을 때도 상세하고 정겨운 설명이 돌아왔다. 어느 지역이나 마찬가지겠지만 경주에도 드러내지 않는 깊은 ‘속정’을 가진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러니 무뚝뚝함과 불친절이란 경상도에 관한 선입견을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기와에 새겨진 서라벌 사람 웃는 표정

보물 제2010호 ‘경주 얼굴무늬 수막새’

오똑한 코·잔잔한 미소… 소박함 간직

친절하고 재밌는 어법으로 친근함 더해

첫만남에 말문 트이면 이야깃거리 술술

배려·인정 나누는 기분좋은 ‘경주 사람들’

‘신라인의 미소’를 떠올리게 하는 경주 얼굴무늬 수막새.
‘신라인의 미소’를 떠올리게 하는 경주 얼굴무늬 수막새.

◆ 얼굴무늬 수막새에 새겨진 ‘서라벌 사람의 웃음’

높낮이를 달리하며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는 왕릉들, 철마다 피어 관광객을 설레게 하는 갖가지 꽃들, 1천 년의 세월을 견뎌내고 사람들 앞에 선 국보급 유적과 유물들, 인류의 과거와 현재, 미래까지를 보여주는 박물관들….

서라벌은 보물이 지천인 공간이다. 여기에 한 가지 보물이 또 더해질 수 있으니 바로 경주에서 생활하는 사람들.

그들은 여유롭고 넉넉한 웃음을 지녔다. 세상 오만 가지 유혹에도 과한 욕심 내지 않고 안분지족(安分知足)할 줄 안다.

예술가와 역사학자들이 입을 모아 “이것이 바로 신라인의 미소”라고 말하는 경주 얼굴무늬 수막새(보물 제2010호)를 몇 해 전 TV 화면에서 본 적이 있다. 담담하게 씨익 웃고 있는 달관의 표정.

수막새는 목조 건물 지붕 기왓골 끝에 사용되는 기와다. 그 옛날 신라 사람들은 기와 한 장에도 해학적 감각을 담아낼 줄 알았다.

오늘날 경주시민들의 핏속에 분명 신라인의 유전자가 흐르고 있을 터. 두 웃음이 닮은 것에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경주 얼굴무늬 수막새의 내력은 경주시청 문화관광 홈페이지가 친절하게 알려주고 있다. 이런 내용이다.

“신라시대 원와당(圓瓦當)으로 일제강점기 경주 사정리(沙正里·현 사정동)에서 출토된 것으로 알려졌다. 1934년 일본인 다나카 도시노부가 골동상점에서 구입해 당시부터 고고학 자료를 통해 존재가 알려졌다. 이후 일본으로 반출됐으나 1972년 국내로 반환됐다.

틀에 찍어 일률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고, 형태를 잡은 후 손으로 직접 빚어 얼굴의 세부 형상을 만들고 도구를 사용해 마무리한 작품. 자연스럽고 정교한 솜씨로 보아 숙련된 장인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실제 사용한 흔적도 있다.

오른쪽 하단 일부가 결실되었으나 이마와 두 눈, 오뚝한 코, 잔잔한 미소가 조화를 이루며 신라인들의 염원과 이상향을 구현한 듯 높은 예술적 경지를 보여준다. 소박하면서도 인간적인 면모를 담아냈고, 당시 우수한 와당 기술이 집약된 대표작이다.”

웃음은 인간이 수난과 고통을 이겨내는 가장 큰 힘이 돼준다. 그건 까마득한 옛 시절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천년왕국 신라의 백성들은 보일 듯 말 듯 잔잔한 미소를 통해 때때로 닥쳐왔을 곤궁과 어려움을 저 멀리 밀어낼 줄 알았던 현명한 사람들이 아니었을지.

‘미소’ 외에도 서라벌 사람들과 경주시민의 유사점은 또 있다. 바로 ‘이야기’를 좋아하고, 이야기에 능하다는 것.

올해도 첨성대 인근의 핑크뮬리는 찬란한 분홍빛을 뽐낼 테지만, ‘코로나 19 사태’로 인해 붐비는 관광객과 그곳에서 환하게 웃는 이들의 모습은 보기 힘들 듯하다. 지난 사진을 다시 꺼내보며, 하루빨리 명품 관광도시 경주에서 환하게 웃는 관광객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있기를 기다려본다.  /경북매일 DB
올해도 첨성대 인근의 핑크뮬리는 찬란한 분홍빛을 뽐낼 테지만, ‘코로나 19 사태’로 인해 붐비는 관광객과 그곳에서 환하게 웃는 이들의 모습은 보기 힘들 듯하다. 지난 사진을 다시 꺼내보며, 하루빨리 명품 관광도시 경주에서 환하게 웃는 관광객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있기를 기다려본다. /경북매일 DB

◆ ‘이야기’가 지닌 귀한 가치를 알았던 신라인들

올해만 열 번 넘게 경주를 찾았다. 당연지사 적지 않은 사람들을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먼저 말을 꺼내는 경우는 드물지만, 일단 말문이 트이면 친절하고 재밌는 어법으로 대화를 주도하는 게 경주 사람들이다.

‘이야기’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물을 이어주는 가장 효과적인 매개체다. 최소 1천 년 전 세상을 살았던 서라벌 사람들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듯하다. 그렇게 추정하는 이유가 뭐냐고?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이 출간한 ‘신라인의 생활과 문화’엔 아래와 같은 대목이 나온다. 위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읽힌다.

“신라인들은 일상생활을 매우 다채롭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 이야기를 통하여 사람과 신성(神性)이나 혼령 사이에 관계와 소통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그리고 사람과 동식물의 관계와 소통도 있었다. 신라 사람들의 열린 상상력은 사람과 다른 존재들 사이의 관계까지도 설정하여 보여주었다. 용을 비롯한 온갖 동물과 식물, 불보살(佛菩薩·부처와 보살), 귀신 등 사람 아닌 존재들이 신라 사람들의 이야기에 등장했다. 신라 사람들은 다른 존재들과 관계를 유지하는 것에 대해 개방적이었고, 그래서 관계의 공간도 확장시켰다.”

오래전 같은 땅에 살았던 서라벌 사람들의 기질과 성정을 DNA가 기억하는 것일까?

오늘날 경주시민들도 타자(他者)를 접하고, 타인을 대하는 태도가 우호적이며 개방적이라 느껴졌다. 이는 경주가 ‘손꼽히는 관광도시’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의 하나가 아닐지.

위에서 언급한 책은 ‘이야기’가 지닌 귀중한 가치를 일찌감치 인지했던 신라인의 지혜를 이어서 서술하고 있다.

“신라의 이야기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유연하게 만들어주고, 잘 풀리지 않던 문제도 풀리게 해주었다. 이야기를 하고 듣는 사람들이 봉착한 문제를 해결하는 계기나 수단이 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신라 사람들에게 이야기는 사람 사이의 관계가 낙관적으로 나아가게 하는 윤활제이며 동력이 됐다.”

◆ ‘사람’ 때문에 다시 찾고 싶은 도시 경주

앞서도 말했지만 경주 여행의 즐거움은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다.

잘 보존된 유적과 유물만이 아니다. 각종 박물관은 한국 고대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더없이 귀한 공간이다. 남산과 보문호수 주변을 거닐며 소나무 향기에 매혹되는 낭만도 경주만이 가진 매력. 최근 ‘젊은이들의 거리’로 이름을 알리고 있는 황리단길에선 다양한 맛집을 찾아다니는 기쁨도 누릴 수 있다.

이 모든 ‘경주의 즐거움’을 만들어낸 이들이 바로 ‘경주 사람들’ 아닐까?

세상을 관조하는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를 매개로 자신과 다른 존재들의 관계를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갈 줄 아는 사람들.

사랑이 아름다운 것은 사람이 아름다워지기 때문이다. 만약 한 도시가 아름다울 수 있다면 그 이유는 거기서 만난 사람들의 배려와 인정 때문이 아닐지.

서라벌을 삶의 근거지 삼아 길고도 긴 생을 이어온 신라인들. 그들 후손의 선량한 웃음을 보며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기 위해서라도 가까운 날을 정해 다시 한 번 경주에 가야겠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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