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천사 대웅전 앞의 당간지주와 명부전. 적천사는 청도군 청도읍 원동길 304에 위치해 있다.

적천사의 은행나무를 보러 떠나라고 누군가 귀띔해 주었다. 초입에서 펼쳐지는 소나무 숲에 한껏 부풀어 있는데 느닷없이 800년을 살아온 은행나무와 마주 선다. 시간을 벗어난 존재의 환희, 푸르고 깊은 눈빛과 마주친 이상 차에서 내리지 않을 수가 없다. 은행나무의 오랜 침묵과 장엄한 자태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살아 있는 화석, 나무에게서 서늘하도록 도도한 기운이 흐른다.

천연기념물 제 402호로 지정된 은행나무는 수형이 곧고 반듯하며 큰 상흔 없이 자랐다. 고령의 몸으로 유주를 늘어뜨린 채 손톱만한 은행들을 품고 본분을 다하는 모 앞에서 가슴이 뭉클해진다. 여성의 젖가슴처럼 자라는 유주가 남근처럼 길게 자란 탓에 이것을 끓여 먹으면 남자아이를 잉태한다는 속설이 전한다. 은행나무와 옛 여인들이 재워둔 아픔들이 쿨럭이며 깨어날 것만 같다. 그 지난한 시간들이 먹먹하다. 세상은 많이도 변했다. 유유히 은행나무를 돌아 산 아래로 내려가는 고급 승용차의 뒷모습이 그리 아름답게 보이지 않는다.

은행나무를 올려다본다. 독일의 문호 괴테가 젊은 여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는 은행나무 연시 한편이 떠오르고, 유난히 은행잎이 노랗게 슬픔으로 차오르던 바이마르에서 몇 달만이라도 머물고 싶던 낭만어린 나의 꿈들도 살아난다. 숱한 꿈들은 현실에 치여 빛을 보지 못한 채 사라져 갔다. 젊은 날 문학과 감수성에 불을 붙이던 은행나무가 오늘은 성스러울 만큼 외경스럽다.

동양에서는 공자가 은행나무 아래에서 강학을 즐겨 한 까닭에 유학을 상징하는 나무로 알려졌다. 학문을 배우고 익히는 곳을 행단(杏壇)이라 부르는 것도 그 때문이다. 어릴 적 고향 집 앞에도 은행나무 한 그루 자라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말씀하셨다. 회화나무가 지성적인 나무라면, 은행나무는 지성과 감성을 고루 갖춘 나무라고. 결코 되돌릴 수 없는 허기진 시간들이 그리움이 되어 몰려온다.

고령의 은행나무 아래에서 돌아보는 지난 세월은 허무하도록 짧고 애틋하다. 찰나에 불과했던 시간들이 푸른 잎 사이에서 여전히 서성일 것만 같은데, 나무 아래에는 괴테의 연시나 나의 짧았던 청춘은 간곳이 없다. 촛불 밝히며 빌었던 누군가의 간절한 바람들이 삶을 대변하고 있을 뿐이다.

부처님 계신 극락정토를 향해 걸음을 옮기는데 천왕문이 앞을 막아선다. 탐욕과 오염된 마음 내려놓고 들어서라며 사천왕상이 눈을 부라리는데 그 표정조차 친근하다. 사천왕의 발밑에서 고통을 호소하는 온갖 악귀와 축생, 잘못을 저지른 중생들, 천국와 지옥이라는 말도 낯설기만 하다. 오늘 하루의 생각과 행동이 부끄럽지 않기를 바라며 조용히 합장한다.

적천사는 문무왕 4년(664년) 원효가 수도하기 위해 토굴을 지으면서 창건되었다. 828년 심지왕사가 중창했으며 고승 혜철이 수행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1175년 고려 명종 5년에 지눌이 크게 중건 했을 때 참선하는 수행승이 오백 명이 넘었으며 많은 고승대덕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그토록 유명했던 절은 인기척이 없고 쓸쓸하다.

커다란 괘불을 걸고 위엄을 갖추었을 당간지주, 명부전 지붕 위로 보이는 잘 생긴 소나무, 영산전 앞의 수국의 침묵과 허공을 닮아가는 눈빛들, 흐린 날씨 탓인지 알 수 없는 공허함이 인다. 천천히 대웅전 법당에 들어가 백팔 배를 한다. 온몸이 젖어들지만 마음은 고요하지가 않다.

원음각 뒤로 곧게 뻗은 길은 소나무가 우거진 숲으로 향하고 있었다. 여름풀들 사이로 시(詩)가 자랄 것만 같은 길, 걷다보니 도솔천이 부럽지 않다. 시원한 소나무 숲길이 나를 편안하게 이끈다. 수풀 우거진 부도밭이 보이고 길은 울창한 대숲 사이로 이어진다.

아름다운 길이다. 새로 올라온 대나무의 푸른빛이 매혹적이다.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빛깔들이 묵은 대나무들 사이에서 청량한 기운을 뿜어낸다. 줄기는 이미 단단한 마디가 생겨 대나무로서의 손색이 없다. 푸른빛에 홀려 수없이 셔터를 눌러대는데, 지나치게 현상에 이끌려 실체를 놓치지 마라는 말씀 한 자락이 대숲에서 들린다.

조낭희 수필가
조낭희 수필가

길이 끝나는 곳에 대나무로 만든 사립문 하나 열려 있다. 암자는 아닌 듯하다. 정성스럽게 꾸며진 정원과 집 한 채가 숨어 있듯 앉아 있다. 마당 한가운데 덩치 큰 외제 차가 사천왕상보다 더 무섭게 지키고, 잘 가꿔진 나무들이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며 살아가는 이곳은 무슨 용도로 쓰여질까? 급하게 사립문을 빠져나오는 발걸음에 온갖 의구심이 실린다.

내 발길은 대나무 사립문 앞에서 그쳐야 했다. 무심코 넘은 선이 애써 찾은 마음의 평화를 무너뜨리고 말았다. 선(線)을 넘지 않는다는 것, 중용의 도는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허물어지게 마련이다.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는 마음만큼 무서운 게 있을까? 소나무 길을 내려올 때쯤 마음이 고요해진다. 환경에 이토록 민감해지는 내 마음의 주인은 도대체 누구인가?

부처님은 법당을 고집하지 않는다. 혼자서 걷는 길이나 무심코 만나는 나무와 풀, 낮게 부는 바람에도 부처님은 계신다. 우리가 무언가에 한눈을 팔거나 부처님의 존재를 자각하지 못하는 데에서 빚어지는 오류들의 연속, 그것이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