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년 간 ‘병호시비’ 논란 종지부안동시, 국비·도비 등 들여 호계서원 복원
400년 간 ‘병호시비’ 논란 종지부안동시, 국비·도비 등 들여 호계서원 복원
  • 등록일 2020.06.23 18:46
  • 게재일 2020.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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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안동 호계서원과 병호시비

호계서원 양호루에서 바라본 안동댐 호수.
호계서원 양호루에서 바라본 안동댐 호수.

#. 여강서원에서 호계서원으로

1575년(선조8년) 여산촌(안동댐으로 면자체가 없어진 월곡면 도곡동) 오로봉 아래 백련사 절터에 지방 유림들의 공론으로 퇴계의 위폐를 봉안하고 후학들에게 학문을 강론하기 위해 여강서원을 건립한다. 그러다가 1605년 대홍수로 유실되어 1606년 북쪽 100보 위에 다시 지었다. 1620년(광해군12년) 추가로 위폐가 봉안된 학봉 김성일(1538~1593)과 서애 유성룡(1542~1607)의 좌 배향 자리다툼이 시작된다. 즉 누가 상석인 퇴계의 좌 배향에 영의정(국무총리) 지낸 서애를 두느냐, 관찰사(도지사)로 4살 많은 학봉을 두느냐로 첨예하게 다툰다. 당시 서애의 제자이며 대학자였던 상주에 은거중인 우복 정경세에게 자문을 구한다. 우복은 5살 이상 차이가 나면 연장자로 대접하여 나란히 걷지 않는다는 견수(肩隨)와 한나라 때부터 시작된 고위직은 어디 가더라도 전용석에 앉는다는 절석(絶席)의 예를 들어 영의정과 관찰사가 같이 앉을 수 없다는 것으로 서애가 좌 배향이 된다. 당시 학봉의 후학들은 스승은 서애보다 4살 많고 학식이 뛰어나다며 반발했지만 세력이 약해 마지못해 따라야했다.

여강서원은 1676년(숙종2년) 임금으로부터 ‘호계’라는 이름과 토지, 노비 등을 하사받아 명실공히 사액서원이 되어 국비로 운영하는 경제적 기반을 다진다.

잠재적 불씨는 안고 있다가 1805년 영남의 4현으로 불리는 서애, 학봉, 한강 정구, 여헌 장현광의 신주를 문묘에 배향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또다시 서애와 학봉 간 서열문제가 불거진다. 4명의 자손들이 서울에 모여 학봉, 서애, 한강, 여헌 나이순으로 상소를 조정에 올린다. 서애 쪽에서는 서열이 잘못됐다고 독자적으로 상소를 올렸고, 조정에서는 두 상소 모두 기각해 버린다. 이렇게 되자 한강, 여헌의 사림들이 대구 이강서원에 모여 독자적으로 상소할 것을 결정하고 영남 유림에 통보하자 안동의 유림들은 서애, 학봉 양파의 싸움을 중단하고 한강, 여헌 양파를 규탄하는 통문을 띄우기로 결정하고, 전주 류씨 무실파 호고와 류희문에게 통문을 작성케 했는데 학봉, 서애 순으로 작성했다. 이에 서애 파는 순서가 잘못 됐다며 학봉파와 다툼이 재촉발 되었고, 1812년 학봉의 후학들이 호계서원에 대산 이상정의 위폐를 추가로 모시자고 주장하자 서애 후학들의 반발로 호계서원과 절연을 선언해 버린다. 이로 인하여 안동 유림들은 호계서원과 병산서원으로 갈라서고, 퇴계는 제자 싸움에 도산서원으로 학봉은 임천서원으로 서애는 병산서원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새로지은 호계서원 양호루.
새로지은 호계서원 양호루.

#. 적통의 자리다툼과 병호시비

왕조나 기업, 가문들이 1대에는 서로 도우며 창업에 힘쓰다 2대가 되면 이해관계에 따라 형제를 죽이기도 하고 원수가 되기도 한다. 학통도 마찬가지로 스승의 제자일때는 동문수학으로 동창, 동기가 되기에 장점은 치켜세워주고 단점은 보완해주다가 스승이 죽은 뒤는 달라진다. 퇴계가 죽고 도산서당을 도산서원으로 사액 받고 퇴계의 모든 글을 망라한 문집을 발간하게 된다. 이때 15살에 퇴계 문하에 들어온 월천 조목은 그림자처럼 퇴계를 수발하면서 학문을 익혔다. 사후에도 극진히 사모하여 죽을 때까지 퇴계를 흠모하면서 추앙했다. 죽어서는 퇴계 제자 368명(편지 한 두통 등의 인연되는 모든 사람) 중에 유일하게 도산서당에 배향되고, 예안(지금은 안동) 인근의 조목, 금난수, 이덕홍, 김부륜, 김택룡, 금응협, 금응훈 등이 도산서원을 중심으로 학맥을 이어간다. 퇴계의 팔고제자(八高弟子) 중에 중앙정계에 입신양명한 서애와 학봉이 합심하여 안동에 퇴계를 모시는 여강서원(1575년)을 만든다. 일종의 도산서원 분원 역할 격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서애는 전란의 영의정으로 임금을 호종하면서 전쟁과 외교를 총괄한다. 학봉은 일본 침략을 잘못 보고한 죄로 선조가 죽이려하자 서애가 기회를 주자고 하여 경상도 초유사, 관찰사로 의병을 모집하고 1차 진주성을 지켰지만, 2차전을 앞두고 진주관사에서 병사했다. 월천은 학문하는 청빈한 선비의 삶으로 동생과 두 아들을 데리고 곽제우 의병장 휘하에서 의병활동 했다. 1594년 서애의 일본과의 화친을 격렬히 반대하며 후배 서애와 갈라서게 된다. 그리고 퇴계의 문집을 발간할 때 월천은 퇴계의 전체 글을, 서애는 선택하여 만들자는 2차 충돌이 일어난다.

학봉은 1593년, 월천은 1606년, 서애는1607년 세상을 떠나고 위에서 말한 대로 1620년 퇴계 좌, 우에 학봉과 서애 중 누구의 위폐를 모시느냐의 병호시비가 시작된다. 서로 도와주던 학봉과 서애가 이제 위폐문제로 집안 문중의 자존심에다 학맥의 정통성과 관련하여 치열한 논쟁으로 죽기 살기로 싸운 것이다. 흔히 영남학파의 종장으로 점필제 김종직→회재 이언적→퇴계 이황으로 이어졌지만, 퇴계에서 봉우리가 우뚝 솟아 퇴계 학통의 적통싸움까지 복잡하게 얽혀있다. 도산서원에 유일하게 배향되었지만 집안의 재력받침과 우뚝한 제자가 없었던 예안파의 월천(月川)은 시냇물의 달처럼 사라졌고, 달마는 인도에서 선종을 뿌리내리지 못해 동쪽 중국으로 가서 1대조가 되듯이, 퇴계의 학맥 적통은 안동서쪽 서후 금계의 학봉과 풍산 하회의 서애로 이동했다. 학봉파와 서애파의 합심으로 월천의 예안파를 따돌린 두 파는 깊은 계곡의 외나무다리의 무림(武林)이 아니라 낙동강가의 백사장에서 서로 통혼도 없이 원수같이 지냈지만, 죽이지는 않는 무강(武江)의 혈투를 192년(위패모신1620~신주 갖고 간 1812년) 동안 퇴계 적통서열 싸움이 병호시비다.

 

옮겨온 호계서원 강당, 이 건물만 옛것.
옮겨온 호계서원 강당, 이 건물만 옛것.


#. 흥선 대원군과 되살아난 신묵패 호계서원 복원

세도정치에 이골이 난 흥선대원군은 상갓집 개 형세하면서 전국을 떠돌아다니면서 서원이 학풍은 사라지고 도적의 소굴이 된 것을 간파하고 있었다. 병호시비와 인조반정 이후 300년 집권한 노론에 소외된 영남 남인의 아픔도 잘 알고 있었다. 마침내 둘째아들 개통이(이재면)를 왕(고종)으로 등극시키고 첫 해에 서원에 경고문을 보낸다. 대원군의 서원철폐의지가 확고해지자 유생들은 정치적인 감각으로 흥선대원군의 직계 인평대군을 모시는 서원도 세운다. 대원군은 이것마저 철폐해버린다. 대원군이 당시 영의정 김병학에게 “서원이 온통 백성만 더럽게 괴롭히니 이게 웬 꼴이냐? 집집마다 서원을 만들고 한 사람을 대여섯 곳에서 모시는게 서원이냐? 제현을 존중한다면서 온통 지네 조상 모시는 게 서원이냐? 정말 책을 읽고 싶다면 향교 가서 읽어라. 향교는 장식이냐? 고종도 “너넨 서원이 없으면 성현을 존중할 줄 모르니?”했다.

대원군은 조선의 3대 악으로 첫째가 평안도 기생, 둘째가 전라도 아전, 셋째가 충청도 양반이라 했는데 충청도 양반은 서원의 패악을 일컬음이다. 서원은 고려 말 사찰의 부패를 극복하고자 유교국가 이념을 실천할 엘리트 양성소였는데 꼭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다. 병호시비도 양측 간 깊어진 갈등을 해소 하려고 대원군이 힘을 쏟았지만 실패하자 전국에 덜 타락한 47개만 남기고 모조리 훼철해 버릴 때 안동은 40개의 서원 중 도산서원과 병산서원만 남았다. 병파, 호파로 갈라선 블랙홀에 빠진 영남의 유림들은 어느 한쪽으로 붙어야했다. 비병비호(非屛非虎)했던 퇴계 후손들도 비양비상(非兩非商)으로 양반도 상놈도 아닌 것이 되어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했다. 퇴계도 학봉도 서애도 말이 없는데 못난 제자, 문중들이 죽은 사람 시체 가지고 싸우는 격이다.

학봉이 태어난 내앞 마을과 송림을 거처 임하댐으로 갔다. 대원군이 실각하자 헐어진 7년 뒤(1878년) 호계서원은 모실 신주도 없으니 강당만 세웠고, 1973년 안동댐 수몰로 임하댐 코밑으로 옮겼다. 호계서원 터는 잡초만 무성했다. 2013년 김관용 경북도지사와 안동시장의 중재로 서애, 학봉 문중과 40여 문중 합의 하에 호계서원 복설추진위원회에서 좌 배향에 서애, 우 배향에 학봉과 추가로 대산 이상정을 배향하기로 했다. 임하댐 여수로 물보라 습기에 견디지 못하고 국비, 도비 65억여 원 들여 국학진흥원 옆산 중턱에 옮겨 놓은 곳을 두 번째 갔다. 예전에 서원의 묵패가 관과 백성들에게 재산 갈취였다면, 지금은 국민세금(국비, 도비)을 뺏는 신묵패다. 이미 신주 없어 서원기능도 잃었고, 교육기능이 사라졌고 국가에서도 철거했는데, 예전의 90여 칸으로 “유교문화 및 인성교육의 장으로 교육생과 관광객유치로 지역경제에 큰 보탬이 된다”는 안동시라면 ‘정신문화수도’가 아니라 ‘정신문화부패수도’를 표방하는 것이다. 의미도 없지만 꼭 세우려면 문중 돈으로 해야지 국비, 도비로 한다는 것은 문중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퇴계, 서애, 학봉이 하늘에서 수치스러워 할 것이다. /글·사진 = 기행작가 이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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