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자생존 단상
적자생존 단상
  • 등록일 2020.03.31 20:03
  • 게재일 2020.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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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화진영남대 객원교수·전 경북지방경찰청장
박화진
포세이스트·전 경북지방경찰청장

코로나19 사태로 2020년 봄의 모든 일상이 우선멈춤 표지판 앞에 섰다. 화사한 봄꽃 향기도 우울감에 휘청거린다. 부대끼며 정 나누고 살아가기 좋아하는 우리 이웃들에게 ‘거리두기’는 고통 아닌 고통이다. 집에 있는 시간이 많다보니 집안 구석구석 묵은 때들이 눈에 들어온다. 이참에 봄맞이 집안 대청소를 해본다.

책장 한쪽에 종갓집 된장독마냥 의뭉하게 떡 버티고 있는 것들이 보인다. 35년 공직생활 내내 아귀처럼 붙어 다니던 업무수첩 뭉텅이다. 1년에 한두 권 쓰게 되니 줄잡아 50여권이 된다. 입직한 첫 해인 ‘1986년’ 이라고 표시된 빛바랜 업무수첩 한 권을 집어 들고 슬며시 겉장을 넘겨봤다.

사회 초년병으로서 다짐의 글을 시작으로 빼곡히 받아쓴 상사들의 지시사항, 처리할 업무, 군데군데 일상의 고단함을 푸념하며 내뱉은 낙서 조각들이 낯설지 않다. 세월의 편린들이 돌탑처럼 하나둘씩 위태롭게 쌓여 있다. 반평생 삶의 찌든 때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다.

전근으로 이사를 다닐 때나 해외근무를 하면서도 귀한 골동품처럼 한 권도 빠짐없이 가지고 다녔다. 구닥다리 같은 짐이라며 폐기하거나 스캔하여 보관하라는 가족들의 타박에도 아랑곳 않고 지금까지 소장(?)하고 있다.

역사라는 소명의식도 한 몫 했다. 직장인들의 업무수첩은 적자생존(適者生存이 아닌 ‘적는 자가 살아남는다’)의 치열한 도구다. 상사의 지시나 해야 할 업무를 적지 않고 있다가 깜박하고 놓친다는 것은 스스로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일이다. 적어도 내가 경험한 바로는 공직자들은 유난히 열심히 적는 편이다.

상사의 입이 구동되면 바로 적기모드에 돌입한다. 적지 않고 머릿속에 저장한다는 것은 심히 불경스러운 일로 간주될 수도 있다. ‘네가 내 말을 가볍게 생각하는 거지?’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간 큰 부하가 되기 때문이다. 상사의 시선 회피용으로 맹렬한 눈빛을 업무수첩에 쏟아 붇기도 한다. 경쾌하고도 꼼꼼한 손놀림은 당연히 보조 작동한다. 반도 위쪽 땅에서 나이 어린 최고 존엄의 말을 한 단어도 놓치지 않겠다며 메모장을 들고 따라 다니는 노구의 모습이 겹쳐져 괜한 웃음이 돈다.

잘 나가던 적자생존의 법칙이 철퇴를 맞은 적이 있다. 고위공직자 메모수첩이 형사사건의 결정적인 증거물로 되었다. 적자생존 법칙이 적자창살 법칙으로 변질되었다. 이후 공직자들이 업무관련 된 일을 잘 적지 않는다고 한다.

머릿속의 기억으로 남기든 적더라도 일을 처리하고는 바로 폐기한다고 한다. 아예 시비 거리를 남겨두지 않으려는 풍조가 된 것이다. 공직자의 업무수첩은 개인사이면서도 역사적 기록이 될 수 있다.

비록 비공식적 개인기록일지라도 사료적 가치가 있을 수 있다. 기록을 하지 않는 민족은 역사가 없다고 하는 데 안타까운 현실이다. 막연한 두려운 생각으로 기록을 주저하거나 폐기하는 일은 말았으면 한다.

나의 저 의뭉한 뭉텅이들도 이번 기회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시대 상황에 맞게 스캔해서 디지털 기록으로 보관해야겠다. ‘한쪽 귀퉁이에 적자망신살만한 흔적들이 보이면 지워야 되나? 문화재 훼손은 처벌받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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