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의 시 연작 ‘오감도’를 읽기 전에

이상 김해경의 친구였던 한국의 야수파 화가 구본웅이 그린 이상의 초상화.

그래도, 여전히 한국 문학에서 ‘이상(1910~1937)’이 갖는 의미는 각별하다. 지금은 조금 퇴색한 것이 되고 말았을 지도 모르겠지만. 분명 중고등학교 문학시간에 이상이라는 천재의 시와 소설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며, 그래서 독해 불가능한 것인가 하는 점에 대해 열렬하게 강조하시던 문학 선생님의 목소리를 기억하시는 분도 계실 터이고, 난해하기로 악명 높다던 시 연작 ‘오감도(烏瞰圖)’를 두고 내가 그것을 해석해 보겠노라 호언하셨던 분도 계실 것이다. 아마도 한국 문학 작가들 중에서도 이상만큼 많은 독자들의 마음속에 예술적 파문을 남겼던 인물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감수성이 예민했던 어린 시절 한번 들여다보고 매혹된 예술적 대상이 그 사람의 평생을 좌우하는 것처럼, 우리가 어느 시기 접했던 어떤 언어는 우리의 주의를 끌고, 예술적으로 매혹한다. 우리를 매혹하는 언어들은 이미지와 달라, 그 언어를 품고 있는 소리나 문자가 우리 앞에서 사라지더라도, 훨씬 오래 동안 우리의 마음에 각인되어 어딘가에 남아 있다가 의도치 않은 어떤 순간에 나타나 우리의 마음을 잠식한다.

어린 시절, 나 역시 이상의 그 ‘악명 높은’ 시 연작 ‘오감도’를 열어 보고 그만 그 낯선 언어에 매혹되었다. 그 속에는, 그 무렵의 어린아이 치고는 책 좀 읽어 보았다는 나의 자만을 깨어버릴 만큼의 낯선 언어들이 천연덕스럽게 들어 앉아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불안을 일으키는 언어이면서 한편으로는, 갇혀 있는 의식을 해방하는 언어였다. 그렇게 나는 이상이라는 낯선 언어에 매혹되어 버렸다. 그 매혹의 경험이 나로 하여금 지금까지 문학에 대한 기대감을 못내 거두지 못하게 하는 원천일 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시 연작 ‘오감도’는 조선중앙일보에 1934년 7월 24일부터 8월 8일까지 15호가 연재됐다. 원래는 30호의 기획이었으나 중도에 독자들의 비난이 빗발쳐서 그만뒀다. 이상은 정지용, 이태준과 함께 구인회 활동을 함께 했는데, 이 때의 인연으로 그들의 도움을 받아 이태준이 학예부장으로 있었던 조선중앙일보에 시 연재를 하게 됐다. 정지용은 분명 당시의 식민지였던 조선에서도 이러한 정도의 시는 발표되기에 충분하리라 생각했겠지만, 의외로 반발이 대단했던 것이다. 아마도 추천을 한 쪽이나 받은 쪽이나 당황스러웠을 터였고, 나중에 이상은 다른 지면에서 당시 ‘오감도’의 연재를 중단하게 된 경위를 밝히며 그 몰이해를 한탄하기도 했다.

당시 ‘오감도’에 대한 독자들의 반발이라는 것은 사실 지금 생각해도 독특한 현상이었다. 그것은 좋고 싫음 같은 취미의 차원이나 이념적 분쟁의 차원이 아니라 그야말로 이 세상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언어가 버젓이 신문에 실려 있는 것에 대한 집단적 불안 반응에 가까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연재 당시 이상이 원고교정과 인쇄를 살피기 위해 신문사에 왔을 때에는 신문사의 모든 이들이 도대체 이상이라는 존재가 어떻게 생겼는가 구경하기 위해 나왔다고 하니, 당시의 독자들은 그의 언어가 싫어 그를 반대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모두 그의 언어에 매혹되어 불안의 상태로 빠져버렸던 셈이었다. 마치 우리가 한 번도 보지 못한 생물을 보거나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현상을 경험하게 되면 판단 이전에 겁부터 집어먹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가장 이상다운 파문을 일으키며 문학계에 등장한 이상은 그 뒤로 한참 동안 한국 문학에서 가장 특별하고 독특한 자리를 차지했다. 매혹의 순간에 대한 경험은 그것을 언어로 설명할 수 있게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 설명할 수 있는 만큼 그 경험은 빛을 잃어버린다. 내 주위를 둘러싼 언어들이 더 이상 빛나지 않을 때, 이상의 시 연작 ‘오감도’의 15편을 다시 열어보시기를. 그 속에는 새로운 매혹의 계기들이 들어 있을 지도 모르니 말이다.

/송민호 홍익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