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탐관오리 유환보(柳煥輔)

장기면사무소 앞에 도열해 있는 수령들의 선정비. 깨지고 뜯겨나간 비석의 모습을 보면 선정비가 마치 백성들의 원망을 새긴 ‘원망비’처럼 보인다.

1788년(정조 12) 10월 말경이었다. 경상도 장기현감으로 있었던 유환보(柳煥輔)가 떠난 지 수개월 만에 다시 장기현으로 되돌아왔다. 놀랍게도 이번에는 현감이 아니라 유배객의 신분이었다. 관직은 삭탈된 채 ‘탐관오리’란 오명까지 달고 온 그를 보고 사람들은 인과응보가 따로 없다며 수군댔다.

사건의 발단은 경상도 장기현에 사는 김성걸(金聖乞)이란 사람의 격쟁(擊錚)에서 비롯됐다. 격쟁이란 조선시대에 억울하고 원통한 일을 당한 사람이 궁궐에 난입하거나, 국왕이 거동하는 때를 포착하여 징이나 꽹과리를 쳐서 이목을 집중시킨 다음, 자신의 사연을 국왕에게 직접 호소하는 행위를 말한다. 조선 전기에 있었던 신문고 제도의 뒤를 이어 이용된 것으로, 16세기 중종·명종 연간에 관행적으로 정착된 제도였다.

허나, 격쟁은 합법적인 호소 수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격쟁 사건이 일어나면 일단 격쟁인은 피의자로 간주되어 형조에서 그를 체포하여 갔다. 형조에서는 의례적으로 그에게 곤장을 친 다음, 억울한 내용을 구두로 진술하라고 했다. 격쟁인의 진술은 그 내용이 어떤 것이든 간에 빠짐없이 3일 이내에 국왕에게 전달되었다. 그래서 격쟁은 신체적 고통이 따름에도 불구하고 문자를 모르는 하층민들에게는 좋은 구제수단으로 애용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15세기 후반부터는 사소한 문제를 가지고도 격쟁이 남발되었기 때문이다. 제도의 정비가 필요했다. 그래서 생긴 게 ‘4건사(四件事)’라는 것이다. 격쟁인에 대한 처벌문제와 함께 격쟁을 할 수 있는 사유를 4가지로 제한했던 것이다. 그 4가지 사유란 형벌이 자신에게 미치는 일, 부자(父子) 관계를 밝히는 일, 적첩(嫡妾)을 가리는 일, 양천(良賤)을 가리는 일 등이었다. 처벌조항도 만들었다. 만약 격쟁의 내용이 무고(誣告)로 판명될 때는 격쟁인에게 곤장 80대를 가했다. 하지만 이런 제한과 처벌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격쟁은 더욱 빈발하였다.

1744년(영조 20)에는 격쟁할 수 있는 ‘4건사(四件事)’의 내용을 바꾸었다. 즉 자손이 조상를 위하여, 아내가 남편을 위하여, 아우가 형을 위하여, 노비가 주인을 위하여 하는 격쟁만 허용되었던 것이다. 함부로 격쟁하는 것에 대한 처벌규정도 한층 강화했다. 상습적으로 격쟁을 일삼는 자는 전가사변(全家徙邊·전 가족과 함께 변방으로 옮겨 살게 한 형벌)에 처하고, 관리를 무고한 자는 장(杖) 80을 치고, 거짓으로 격쟁한 자는 장 100에 처하는 등의 중벌을 규정하였다.

 

뇌록 채굴지. 장기면 대진리 뇌성산에 있다. 매몰사고가 빈발하여 연달아 장정들이 죽어 나갔다.  어느 날은 깊은 굴을 파내려 가다가 50명이 압사했는데, 지금도 비바람이 칠 때면 귀신이 원통해 우는 소리가 난다고 한다.
뇌록 채굴지. 장기면 대진리 뇌성산에 있다. 매몰사고가 빈발하여 연달아 장정들이 죽어 나갔다. 어느 날은 깊은 굴을 파내려 가다가 50명이 압사했는데, 지금도 비바람이 칠 때면 귀신이 원통해 우는 소리가 난다고 한다.

하지만 갖은 통제책에도 불구하고 격쟁이 더욱 늘고 남발되는 추세를 보이자, 1771년(영조 47)에는 창덕궁 남쪽에 신문고를 다시 설치하여 격쟁 대신에 민원(民怨)을 수렴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김성걸에게는 어떠한 억울함이 있었을까? 그 내용은 이랬다. 병오년(1786년)에 경희궁(景熙宮)을 보수할 때였다. 장기에 살고 있던 김성걸은 궁궐 보수에 필요한 뇌록(磊綠) 500두(斗)를 납품한 사실이 있었다. 그 값으로 나라로부터 조(租:벼) 2343석(石)을 받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중간에서 관리들이 다 떼어먹고 자신은 그 값의 1/3 도 안되는 745석만을 받았던 것이다. 현청을 찾아가 따졌으나 모두 나 몰라라 했다. 분통이 터진 그는 1788년 9월 4일 장기에서 860리 떨어진 한양까지 물어물어 올라갔다. 며칠 동안 그는 궁궐 앞에서 징을 치며 없어진 뇌록 값을 찾아달라고 호소했던 것이다.

딱한 사정을 보고받은 임금 정조는 경상도 관찰사에게 명령을 내려 사실을 조사하라고 했다. 조사한 결과 당시 장기현감 유환보가 중간에서 뇌록 값을 착복했음이 밝혀졌다. 유환보는 1785년(정조 9)년 12월 27일 장기현감으로 부임하여 약 1년 6개월 정도 근무하다가 1787(정조 11)년 5월 23일 흥해군수로 영전하여 간 사람이었다. 그는 흥해군수로 있을 때도 강제로 아전의 곡식을 빼앗고 뻔뻔스레 부끄러워할 줄 몰랐다고 한다.

1788년(정조 12) 10월 19일, 임금은 유환보를 잡아다가 전에 그가 현감으로 근무했던 장기현에 물한년((勿限年·햇수의 한정이 없음) 정배를 보내버렸다. 유형은 원래 기한이 없이 종신을 원칙이었지만, 중간에 죄가 감등되거나 단순한 자리 이동으로 유배지가 옮겨지기도 하고 사면으로 형이 풀리기도 하였다. 이런 것을 아예 못하도록 ‘물한년’의 조건을 붙여 그를 유배 보낸 것이다.

‘뇌록(磊碌)’은 안료(顔料)의 일종이다. 이 암석은 어린 쑥이 올라올 때의 색보다 조금 더 진한 청록색을 띤다. 장기 ‘뇌록’은 궁궐이나 사찰의 단청(丹靑)에 반드시 필요한 귀중한 자연 광물 착색제였던 것이다. 이게 전국에서 유일하게도 장기에서만 생산되었다. 그래서 장기현감은 뇌록을 조달하는 게 가장 큰 임무였다. 실제 조선왕조실록에는 궁궐 수리에 필요한 뇌록을 빨리 올려 보내지 않았던 장기현감 신률(申嵂)을 파직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광물이다 보니 채굴량은 한계가 있었다. 천길 깊은 곳까지 굴을 파고 들어가야 양질의 뇌록이 채취되는 실정이었기에, 매몰사고가 빈발하여 연달아 장정들이 죽어 나갔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깊은 굴을 파내려 가다가 50명이 압사했는데, 지금도 비바람이 칠 때면 귀신이 원통해 우는 소리가 굴 앞에서 난다고 한다. 지역민들은 뇌록을 파내던 이 굴을 ‘매새 구디이(굴)’ 또는 ‘쉰 구디이’라고 부른다. ‘쉰 구디이’라 부르는 것은 채굴하던 인부들이 매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주민들이 가 보았더니 채굴광 부근에 주인 잃은 ‘초배기(대나무 도시락)’ 쉰 개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50명이 죽은 구덩이라는 뜻으로 ‘쉰 구덩이’라고 불러 왔다는 것이다. 그 파낸 굴의 깊이가 하도 깊어 명주실타래 서너 개를 풀어 넣어도 끝이 닿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목숨 걸고 캐낸 뇌록 값을 현감이 중간에서 착복했으니 그 억울한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유환보는 파직되어 장기로 유배를 왔지만, 그 후유증도 만만치 않았다. 먼저 장기현 이방(吏房) 정덕유(鄭德裕)가 타깃이 되었다. 격쟁을 한 김성걸이 일자무식이었던 게 화근이었다. 김성걸이 매일 관가에 나와 뇌록 값을 못 받았다며 억울함을 호소하자, 내용을 잘 알고 있던 정덕유가 그의 억울한 사정을 대신 글로 적어 줬던 것이다. 형조에서는 정덕유가 어리석은 백성을 종용하여 구관을 모함한 것이라며 먼 곳으로 유배를 보내버렸다. 당사자인 김성걸도 먼 곳으로 유배를 갔다. 격쟁의 조건으로 정해 놓은 4건사(四件事)에 해당되지 않은 일로 임금을 놀라게 했다는 이유였다.

뇌록. 인근 주민이 흩어진 뇌록덩어리를 모아 두었다. 이 뇌록은 국가 중요 건물이나 사찰에 단청(丹靑)을 할 때 사용하던 안료(顔料)로 필수적 재료였다. 70년대 초반까지도 이 돌을 주면 엿장수들이 엿과 바꿔 주기도 했다.
뇌록. 인근 주민이 흩어진 뇌록덩어리를 모아 두었다. 이 뇌록은 국가 중요 건물이나 사찰에 단청(丹靑)을 할 때 사용하던 안료(顔料)로 필수적 재료였다. 70년대 초반까지도 이 돌을 주면 엿장수들이 엿과 바꿔 주기도 했다.

조선 500년 동안 장기현에는 270 명이 넘는 현감들이 부임했다. 그중 선정을 베푼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대부분 관리들은 일부 아전들과 결탁하여 주민들의 삶을 핍박하게 만들었다. 세조 때는 이의돈(李義敦)이란 자가 부임해 왔다. 이 사람은 고을 사람들에게 선정을 베풀 생각은 하지 않고 오히려 공물로 거두어 둔 건어(乾魚) 50마리와 녹포(鹿脯:말린 사슴고기) 1속(束)을 대신(大臣)의 집에 뇌물로 바친 일이 들통 나 사헌부에 불려가 조사를 받고 탄핵되었다. 선조 때 현감으로 온 정응정(鄭應井)이란 자는 더했다. 인품이 외람된 것은 차치하고, 도임한 이후 재물을 침탈하는 것만 일삼다가 결국 임금에게까지 그 사실이 알려져 파직 당했다. 광해군 때 현감으로 온 신방로(辛邦櫓)란 자도 마찬가지였다. 부임한 후로 백성을 수탈하여 자신을 살찌우는 것만을 일삼아 연해의 잔약한 고을이 날로 형편이 없어지고 있었다. 사헌부에서 이런 사실을 알고 광해군에게 파직을 명하라고 하였으나 어떻게 된 일인지 임금은 천천히 결정하겠다며 뒤로 미루었다. 그가 왕실과 어떤 연이 닿아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후 백성들의 삶이 어떠했으리란 것은 상상이 가고도 남는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암행어사도 여러 차례 다녀갔다. 현종 때는 장기현감 손흠(孫欽)의 비위사실이 암행어사에게 적발되어 추문(推問)을 당했으며, 효종 때는 장기현감 김양국(金樑國)의 범법사실이 적발되어 의금부 나장이 직접 와서 잡아가기도 했다. 숙종때는 암행어사 이언강(李彦綱)이 장기현감 박첨단(朴燂段) 등을 암행감찰하고 그 결과를 임금에게 보고한 문서도 조선왕조실록에 실려 있다. 암행어사 박문수(朴文秀)도 왔다 갔다. 그가 이곳의 실상을 파악하여 임금에게 올린 보고문은 당시 피폐했던 지역의 사정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게 한다. 그는 이곳 고을의 힘이 지극히 가난한 까닭은 한양에서 거의 천리나 되고, 또 능력 있고 세력 있는 자는 본래 현감으로 오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처럼 탐관오리들이 제멋대로 평민을 토색하는 일이 날이 갈수록 심해져서 먼 연해고을의 힘없는 백성들은 사는 것이 곧 고난이었다. 비록 억울한 일이 있더라도 한양의 대궐이 높고 멀어서 하소연할 수도 없었다. 이런 고을의 실상은 신유박해로 이곳에 유배 온 다산 정약용의 글에도 면면히 묘사되어 있다.

‘민의창달(民意暢達)’의 기치를 내세운 정조의 애민(愛民)정책을 적극적으로 내세운 격쟁제도마저도 이곳 민초들에게는 빛 좋은 개살구였다. 후환을 알면서도 이들의 애환을 대변하고 차라리 유배형을 택했던 장기사람 ‘정덕유’ 같은 하급관리가 그들에게는 그 어떤 고관대작들보다 더 우러러 보였을 것이다. /향토사학자 이상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