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편의 시 하나의 풍경
몽골 초원과 김수영 시인

몽골 울란바토르 외곽에 세워진 칭기즈칸의 거대한 동상.

울란바토르는 몽골의 수도다. 나라 인구의 1/3이 그 도시에 산다. 20세기 초반 사회주의 혁명에 성공한 소비에트 연방은 국경을 맞댄 몽골에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물론, 경제적 지배까지 면밀하게 계획했다.

소련에서 생산된 석탄이 울란바토르로 대량 유입됐고, 몽골은 아직까지 그때 만들어진 난방 시스템으로 겨울을 나고 있다. 1~2월 울란바토르의 기온은 영하 20℃를 밑돈다. 숨을 들이쉬면 코로 들어가는 공기 중 습기가 얼어붙어 콧속이 쩍쩍 달라붙을 정도의 추위다. 직접 느껴보면? 끔찍하고도 재밌다.

독한 술 보드카와 달군 돌에 구운 양고기만으로는 달랠 수 없는 차가움.

그래서다. 몽골을 여행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석탄 연기 가득한 갑갑한 공간 울란바토르를 빠져나와 초원을 달리는 것에서 즐거움을 찾는다. 기자 역시 그러했다.

도심 한복판에서 겨우 1시간 남짓 차를 타고 막막한 초원 위를 내달렸을까? 함께 한 일행 모두가 입을 모아 외쳤다.

“저게 뭐야?”

야트막한 산과 기암괴석, 향기로운 들꽃이 아름다운 몽골 테렐지 국립공원(Gorkhi-Terelj National Park)엔 인공적으로 만든 조형물이 거의 없다. 그런데, 그곳에 아파트 20층 높이는 족히 될 것으로 보이는 거대한 동상이 번쩍이며 모습을 드러냈다. 칭기즈칸(1162~1227)이었다. 아니 칭기즈칸을 형상화한 조형물이었다.

높이 40m, 무게 250t의 어마어마한 크기. 그 앞에선 입을 딱 벌리고 놀라는 것 외에는 별로 할 게 없었다.

 

말에 오른 몽골 황제 칭기즈칸을 형상화한 높이 40m의 조형물.
말에 오른 몽골 황제 칭기즈칸을 형상화한 높이 40m의 조형물.

▲장쾌한 왕의 삶 앞에 바쳐진 거대한 동상

칭기즈칸이 황금 채찍을 들고 말에 오른 모습을 재현한 기마상(騎馬像)은 아시아와 유럽을 포함해 지구 위에 존재하는 동상 중 가장 거대하다고 알려져 있다.

사실 칭기즈칸은 제 나라에선 ‘신(神)’으로 추앙받는다. 죽은 지 800년이 가깝지만, 그 이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칭기즈칸의 시대처럼 넓은 영토와 강한 국력을 가져보지 못한 몽골 사람들은 ‘좋았던 그 옛날’을 빛나는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칭기즈’는 위대한, ‘칸’은 황제로 번역되니 그 이름에서부터 존경을 바치고 있는 것이다.

몽골인들은 말한다. “칭기즈칸이 없었다면 누가 힘없고 인구도 적은 우리나라를 제대로 기억하겠는가?”

그랬다. 13세기에 주위 부족들을 하나로 통합해 거대한 제국의 기틀을 닦은 칭기즈칸은 비교적 합리적인 법률을 제정하고, 고유의 문자까지 만들었다.

그의 손자 쿠빌라이칸(1215~1294)은 할아버지가 닦아놓은 길 위를 종횡무진 달려 더 넓은 땅을 몽골의 것으로 만들었다. 지구 면적의 30%에 해당했던 원나라의 영토. 그때까지 어떤 국가도, 어떤 왕도 가져보지 못한 방대한 넓이였다.

겨우 수십 마리의 양이나 키우며, 물과 가축의 먹이를 찾아 거친 벌판을 헤매던 오합지졸 같은 사람들을 모으고 통합해 ‘잘난 체 하는’ 유럽 사람들을 벌벌 떨게 만들었던 동양의 황제.

물론 당시 원나라 기병대에게 짓밟힌 아시아와 중동, 유럽 일부 국가에선 ‘잔혹한 정복자’로 칭기즈칸을 폄훼하기도 한다.

인간에 대한 평가는 시간과 공간에 따라 천차만별로 달라지는 게 세상사 이치. 칭기즈칸 역시 몽골 사람들에겐 영웅이지만, 정복지의 국민들에겐 ‘무서운 악당’으로 생각될 수도 있는 법이다.

몽골인들의 칭기즈칸 사랑은 유별나게 느껴질 정도다. 랜드마크가 될 만한 건물과 광장의 상당수에 ‘칭기즈’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뿐인가. 몽골에서 가장 비싼 보드카의 명칭도 ‘칭기즈칸’이다.

그러니 ‘장쾌한 삶’을 살았던 자신들의 왕을 추앙하며 세계에서 가장 큰 조형물을 만든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였을까? 기자는 무시무시한 크기의 황제 동상 앞에서 ‘작고 사소한’ 절망과 슬픔을 노래한 시인 김수영(1921~1968)의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를 떠올리고 있었다. 몽골 초원의 보잘것없는 풀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며.

 

몽골 테렐지 국립공원의 아름다운 풍광.
몽골 테렐지 국립공원의 아름다운 풍광.

▲‘거대함’과 ‘사소함’ 사이에서 살아가는 인간들

김수영은 민감한 문학적 촉수를 통해 20세기에 살면서 21세기를 예언한 작가다. 그는 그것이 권력이건 자본이건 ‘거대한’ 힘 앞에서는 한없이 무력하면서, 힘없고 가난한 이들에게 화풀이나 해대는 ‘사소한’ 소시민의 모습을 아프게 그려냈다. 이미 반세기 전에.

‘왕궁의 음탕’이 아닌 가진 것 없는 허름한 ‘설렁탕집 주인’에게, ‘구청 직원’이 아닌 만만한 ‘야경꾼’에게 자신의 스트레스를 풀며 욱대기는 김수영의 작품 속 인물은 2020년을 사는 우리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한 달 내내 말을 타고 휘몰아쳐 달려도 다 돌아볼 수 없는 ‘광대한 영토’를 욕망했던 칭기즈칸, 이와는 반대로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라고 노래하며 ‘사소한 서러움’을 속을 살았던 김수영.

두 사람 중 누가 더 행복했을까? 답변을 내놓기가 몹시 어렵다. 본디 인간이란 거대함과 사소함의 경계에서 살아가는 존재이기에. 당신도 그렇지 않은가?
 

몽골 초원에 유목민들이 거주하는 ‘게르’가 펼쳐져 있다.
몽골 초원에 유목민들이 거주하는 ‘게르’가 펼쳐져 있다.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이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에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하여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30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로
가로놓여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 제14야전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 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 위에는 서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 주인에게는 못하고
구청 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 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20원 때문에 10원 때문에 1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1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사진제공 구창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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