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오토의 ‘최후의 만찬’
지오토의 ‘최후의 만찬’

서양미술사의 지각변동을 일으킨 가장 위대한 거장들을 꼽는다면 의심의 여지없이 화가 지오토 디 본도네(Giotto di Bondone·1266∼1337)의 이름이 거론될 수밖에 없다. 어떤 미술사 책을 열어보더라도 이구동성으로 그의 업적을 칭송한다. 중세를 살면서 중세를 극복했기 때문이다. 지오토의 위대한 회화적 발견이 있었기 때문에 르네상스가 꽃피울 수 있었다고 말하더라도 전혀 과장이 아니다.

지오토가 남긴 수많은 작품들 중에서 베네치아에서 그리 멀지 않은 북부 이탈리아 파도바의 스크로베니 예배당 벽화가 그야말로 일품이다. 이 예배당을 건립한 사람은 엔리코 스크로베니인데 아버지 레지날도 스크로베니는 아주 유명한 고리대금업자였다. 얼마나 유명했으면 단테의 신곡 지옥편에도 등장할 정도였다. 아들 엔리코는 아버지로부터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았지만 불안했다. 혹시라도 아버지가 지옥에 떨어졌다면 조금이라도 지은 죄가 감해지기를 기원하면서 예배당을 지었다. 그리고 최고의 화가 지오토를 초빙해 내부 전체를 프레스코화로 장식하게 했다.

지오토는 서로 마주하고 있는 양 측면의 벽면을 각각 네 개의 구획으로 나눴다. 상단부에는 마리아의 일생을 중간과 그 아랫단에는 그리스도의 일생을 그리고 가장 낮은 단에는 미덕과 악덕을 상징하는 알레고리를 그려 넣었다. 가장 인상적이면서 화가의 상상력이 돋보이는 부분은 출입문 상단에 그려진 ‘최후의 심판’이다. 이 작품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미술가들이 적지 않은데 미켈란젤로가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에 최후의 심판을 구상하면서 지오토를 인용한 사실이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최후의 심판’
‘최후의 심판’

스크로베니 예배당 벽면을 장식하면서 화가 지오토는 ‘마리아의 일생’과 ‘그리스도의 일생’을 큰 주제로 택했다. 넓은 벽면을 구획 짓고 어떻게 화면을 채울지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성서나 문헌이 전해주듯 시간적 순서에 따를 것인가? 아니면 특정한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몇몇 장면들을 부각시킬 것인가? 지오토의 그림이 장식할 공간이 다른 곳이 아닌 교회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화가도 그것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목적성이 분명한 공간에는 분명한 목적성을 띤 작품 구성이 요구된다. 수직 4단으로 구성된 스크로베니 예배당의 측면 벽면에 그려진 상하 그림들 간에는 흥미롭게도 주제의 병렬적 관계가 숨어 있다. 쉽게 말해 벽면에 들어갈 장면을 선택하면서 화가는 의도적으로 의미상 서로 연결되는 장면들을 위아래로 배치한 것이다. 예컨대 ‘최후의 만찬’ 바로 위에 ‘예수의 탄생’이 나타난다. 둘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을까? 예수는 말구유에서 태어났다. 하늘의 영광을 다 버리고 가장 낮게 인간으로 이 땅에 왔다는 뜻이다. 예수의 이러한 탄생은 미래에 겪게 될 십자가의 고난과 희생을 예견하는 것이다.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한 마지막 저녁 식사 이후에 그 험난한 고난이 시작된다. 두 그림 사이에는 이러한 의미적 관계성이 존재한다.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예수의 탄생은 신의 ‘성육화’(incarnation)를 뜻한다. 신이 인간의 몸을 입고 태어났다는 말이다. 일종의 변용이라고 할 수 있다. 유사한 변용이 최후의 만찬에서도 일어난다.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성찬식의 종교적 의미를 떠올려 보면 된다.

지오토가 서양미술사를 움직인 가장 영향력 있는 화가로 손꼽힐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단순히 자연을 모방하는 탁월한 기술력 때문은 아니다. 주어진 텍스트를 시각화하면서 서로 간에 흐르고 있는 내적 관계성을 만들 줄 알았기 때문이다. 미술이 기술이기만 했던 시대에 미술을 정신작용으로 상승시켰다는 것이 다른 미술가들과 견줄 수 없는 지오토 디 본도네의 탁월함이다.

/김석모 포항시립미술관 학예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