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광해의 경북의 멋과 맛을 찾아서
중요한 것은 ‘홍동백서’가 아닌 정성

경당종택의 경당 장흥효 선생 불천위제사 상차림. 홍동백서도 조율이시도 없다. 소박, 검소하지만 단아하고 기품이 있다.

제사는 어떻게 모시는 것이 좋은가? 결론부터 이야기하자. “정성으로, 검소하게 지내는 것”이 제사를 모시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너무 평범한, 꼰대 같은 이야기다? 과연 그럴까? 그렇지 않다. 이런 표현은 오래전에도 있었다.

조선 후기 문신이자 유학자인 갈암 이현일(1627~1704년)의 글이다. 제목은 ‘갈암집 제23권_학암처사 정달중의 묘표’.

(전략) 또 말하기를, “상례와 제례는 형식을 갖추어 잘 치르는 것보다는 슬퍼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차라리 더 낫고, 사치스럽게 하기보다는 검소하게 하는 것이 차라리 더 낫다.” 하고, 털끝만큼도 남들을 의식해서 지나치게 차리는 일이 없었다.(후략)

갈암은 영해(寧海)에서 태어났다. 지금의 경북 영덕이다. 남인계의 사대부다. 성리학을 완성한 퇴계 이황의 적통. 위 문장은, 갈암이 인척 관계였던 정달중의 묘표에 적어넣은 ‘정달중의 말’이다. ‘형식보다 슬퍼하는 마음이 앞서고, 사치스럽기보다는 검소하게’다. ‘털끝만큼도 남을 의식해서 지나치게 차리지 마라’고 했다. 조선 후기 최고의 유학자가 전하는, 제사 잘 모시는 방식이다.

제사 모시는 방식에 대한 엉터리 이야기가 너무 많다. 추석이다. 제사 잘 모시는 방식, ‘제사에 대한 엉터리 이야기’를 더불어 살펴보자.

홍동백서, 조율이시는 엉터리다

펄쩍 뛸 사람들이 많겠다. 홍동백서, 조율이시, 오랫동안 제사 모시는 금과옥조로 받아들였다.

‘홍동백서(紅東白西)’는 이른바, 제사 모실 때, 과일을 놓는 순서다. 제사 모시는 이를 기준으로 오른쪽이 동쪽, 왼쪽이 서쪽이다. ‘홍동백서’는, 붉은 과일은 동쪽에, 흰 과일은 서쪽에 놓는다는 뜻이다. 사전에도 그렇게 나와 있다. 불행히도 엉터리다. 조율이시(棗栗梨柿)는 대추, 밤, 배, 감(곶감)의 순서대로 제사상에 놓는다는 뜻이다. 역시 엉터리다.

일제강점기 이전 어떤 기록에도 홍동백서, 조율이시는 없다. 맞다, 틀렸다고 이야기하기도 모호하다. 부디, ‘홍동백서’를 이야기하는 분을 만나면 어디에 그런 이야기가 나오느냐고 여쭤보기 바란다. “옛날부터” “오래된 책에” “우리 집안에서”라는 대답이 대부분이다. 예전의 오래된 책에는 그런 이야기가 없다.

제사상 차리는 법을 그린 그림은 진설도(陳設圖)다. 진설도 어디에도 홍동백서, 조율이시는 없다.

어동육서(魚東肉西)도 마찬가지다. 물고기는 동쪽에, 고기는 서쪽에 놓는다는 뜻이다. 조선 시대 거유(巨儒) 우암 송시열(1607~1689년)이 말하는 어동육서의 유래는 엉뚱하다. 중국 기준으로 동쪽은 바다, 서쪽은 내륙이다. ‘어동육서’는 여기서 시작된 게 아닐까, 라는 추측이다. 우암도 이 문제는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왜 고기는 서쪽에 놓고, 생선은 동쪽에 놓습니까?”라는 질문에 속 시원하게 대답하는 이는 없다. 역시 예전부터 내려오는, 옛날 자료에, 라는 엉뚱한 대답이 대부분이다. 그나마 우암이 이 문제에 대해서 언급한 내용이 있다는 정도다.

세종대왕의 시대는 조선 초기다. 건국 직후, 법률을 비롯하여 사회 규범이 제대로 자리 잡지 않았을 때다. ‘세종오례의’가 나온 이유다. 우선 급하게 법령을 만든다. 이 문서에 제사상 차림이 있다. 중국 측 자료를 참고하고, 조선에 맞는 ‘공식 제사상 차림’을 만들었다.

상차림 앞줄에 ‘생율(밤), 생이(배), 실상(잣), 산자(한과, 과줄, 박산), 은행, 강정, 약과, 호도(호두), 사과, 홍시(감), 대조(대추)’ 등이 나타난다.

‘조율이시’는 어디에도 없다. 조율이시는 대추, 밤, 배, 감의 순서다. ‘세종오례의’에는 밤, 배, 감, 대추의 순서다. ‘조율이시’는 대추[棗, 조]가 가장 먼저다. ‘세종오례의’에는 대추가 가장 나중이다. 언제 변할 걸까?

또 다른 의문점도 있다. 왜 대추, 밤, 배, 감만 순서를 정했을까? 밤은 있는데 같은 견과류인 호두는 순서에 없다. ‘세종오례의’에는 호두도 있다. 마찬가지로 순서에서 빠진 잣, 은행은 어디에 놓아야 할까?

배는 있는데 사과도 순서에서 빠졌다. 이건 어떻게 된 영문일까? 조선 시대 제사상에는 수박도 없다. 과일 진설 순서를 정하는 것은 우리 방식이 아니다. 1778년 궁중 장례원의 진설도에는 과일 이름이 아예 없다. 모든 과일을 ‘實果(실과, 과일)’라고 적었다. 종류나 순서는 없다.

‘홍동백서’ ‘조율이시’는 허망하다.

추석, 설날의 ‘차례’도 뒤틀렸다

추석과 설날의 ‘차례’도 엉뚱하다. 내용과 형식 모두 뒤틀렸다.

차례[茶禮]는 ‘차 한잔 올리는’ 정도로 간소한 의례다. 오늘날의 추석, 설날은 이것저것 뒤섞은 ‘짬뽕’이다.

추석은 음력 8월 15일이다. 한가위다. ‘오곡백과가 무르익는다’라고 표현한다. 2019년은 ‘이른 추석’이다. 양력 9월 13일이다. 오곡백과는 아직 무르익지 않았다. 벼는 들판에 서 있고, 과일은 익지 않았다. 늦은 추석이라도 10월 초, 중순 정도다, 한반도의 추수, 오곡백과가 무르익는 것은 11월이다. 음력 8월 15일은, 농사일이 바쁜 계절이지 오순도순 모여 앉아 한담할 때가 아니다.

한반도의 현대화는 ‘이농(離農)’이다. 농경사회는 산업사회로 바뀐다. 농촌 인구가 도시로 이주한다. 노동자, 학생이다. 고향을 떠나 도시로 갔다. 제사를 모셔도 도시로 간 아들, 딸들이 매번 농촌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 1년에 두 차례 설날, 추석이 고작이다. ‘한가위, 오곡백과’의 신화는 이렇게 완성된다. 추석날 온 가족이 모이는 ‘아름다운 풍습’이 생긴 이유다.

설날, 추석은 ‘민족 최대의 명절’이 되었다. 추석, 설날의 제사상은 기제사 상을 따른다. 기제사와 차례상이 섞였다. 차례(茶禮)와 제사는 같다. 차례상은 사라졌다.

1969년 ‘가정의례준칙’이 발표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어린 시절을 보낸 이들은 정확한 제사의 방식을 모르는 경우도 많았다. 1960년대, 이들이 대부분 제주(祭主)가 되었다. 진설 방식을 모르는 이도 많았다. 이런저런 이론들이 나타난다. 공무원이나 민간 모두 예전 자료를 뒤졌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의 자료였다. 허둥지둥 한국 방식으로 바꿨다. 뒤섞인다.

‘홍동백서’는 일본식이다?

‘홍동백서’도 이 무렵 어물쩍 끼어들었을 것이다.

우리는 ‘홍백(紅白)’이 아니다. 우리는 ‘홍청’이다. 신랑, 신부는 ‘홍실, 청실’이다. 신혼부부의 베개는 홍실, 청실로 꾸민다. 태극기도 홍과 청이다. 위는 홍, 아래는 청이다.

‘위키트리’의 어린 시절의 운동회, ‘청백전’에 대한 설명이다. ‘홍백’은 한반도로 건너온 뒤 ‘청백’으로 바뀐다.

“(청백은) 푸른색[靑]과 하얀색[白]으로 편을 갈라 싸우는[戰] 것을 의미한다. 일본에서 헤이안 시대 미나모토 가문과 다이라 가문의 겐페이 전쟁에서 유래한 ‘홍백전’ 문화가 일제강점기를 통해 조선에 넘어온 뒤 대한민국 정부의 왜색 척결 및 반공사상 강화 차원에서 이름이 바뀐 것이다.”

일본인들의 ‘홍백’은 뿌리가 깊다. 겐페이 전쟁[源平合戰]은 1180년, 원씨(源氏) 가문(흰 깃발)과 평씨(平氏) 가문(붉은 깃발) 사이의 내전이다. 이때부터 홍백이 시작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일본 NHK의 연말 가요 프로그램은 ‘홍백가합전(紅白歌合戰)’이다.

우리는 홍백을 청백으로 바꾸었지만 ‘홍동백서’는 일본식이라 여기지 않았다. 조선 시대 어느 기록에도 홍동백서, 조율이시는 없다. “언제, 누가, 왜”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도 없다. 근거가 없다. 일본 방식이라는 게 오히려 근거가 있다.

반드시 전통을 따라야 할까? 그렇지는 않다. 불가능하다. 따를 필요도 없다. 되새겨야 할 것은 제사를 모시는 정성이다. 제물(祭物)이나 형식이 전통은 아니다. 조선 시대 제사에는 반드시 생선 젓갈[醢, 해]을 사용했다. 지금 제사에 생선 젓갈을 사용해야 할까? 그렇진 않다. 형식은 변한다. 시대를 따른다. 변하지 않아야 할 것은 정성이다.

제사를 잘 모시는 방법은 무엇일까? 갈암 이현일의 글에 답이 있다. “형식보다는 진정으로 슬퍼하는 마음, 사치스럽지 않게, 검소하게, 정성스럽게”다.

그까짓 과일 어디에 놓으나 무슨 허물이랴?

/맛칼럼니스트 황광해

    맛칼럼니스트 황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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