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도장 태극기. 프랑스의 소설가 조르주 베르나노스는 이렇게 말한다. “신에게 우리들의 손만이 있을 뿐이다.” 이 말은 결국 우리들 모두의 행동만이 기적을 만들 수 있다는 말일 것이다.
▲ 손도장 태극기. 프랑스의 소설가 조르주 베르나노스는 이렇게 말한다. “신에게 우리들의 손만이 있을 뿐이다.” 이 말은 결국 우리들 모두의 행동만이 기적을 만들 수 있다는 말일 것이다.

△싫어하는 일을 하지 않는 삶

‘카모메 식당’이라는 영화가 있다. 이 영화는 사치에가 핀란드에 도착하여 카모메 식당을 열고, 이곳에서 각자의 사연을 가진 미도리, 마사코를 만나 그들과 함께 식당을 운영해 간다는 소박한 이야기다. 영화는 이들이 왜 일본을 떠났는가에 크게 주목하지 않는 것처럼 왜 하필 핀란드를 선택했는가 역시 중요하게 다루지 않는다. 그렇지만 딱 한 번 그 이유에 대해 묻는 장면이 나온다.

이 식당을 처음 방문한 마사코가 커피를 마시며 던진 질문이 그것이다. 마사코는 식당을 휙 둘러본 후, 사치에와 미도리에게 “당신들은 여기서 어떻게 식당을 하실 생각을 하셨어요?” 라고 묻는다. 미도리는 자신이 주인이 아니라서 잘 모르겠다는 식으로, 사치에는 멋진 남자를 만나기 위해서라는 반농담으로 질문을 회피한다.

마사코는 그들에게 웃음을 지어보이며 “원하는 일을 한다는 것이 정말 부럽군요.”라고 지나가듯 말을 던진다. 그러자 사치에는 마사코의 말을 얼른 받아 정정한다. “아뇨, 그저 싫어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뿐이죠.” 그 말을 들은 마사코는 순간 날카로운 표정을 짓는다. 바로 이 장면, 사치에와 마사코가 주고받는 대화가 이 영화의 가장 난해한 부분인 동시에 영화 전체의 메시지를 포함하고 있는 부분일 것이다.

‘원하는 일을 하는 삶’과 ‘싫어하는 일을 하지 않는 삶’은 동의어처럼 들린다. 그러나 그 말의 방향은 같지 않다. ‘원하는 일을 하는 삶’이란 삶에 어떤 목적이나 목표를 가지는 삶을 말한다. 그러한 목적과 목표에 자신의 삶을 맞춰 나갈 때 비로소 원하는 삶이 될 수 있다.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싫어하는 것을 해야 한다. 따라서 ‘원하는 일을 하는 삶’이란 싫은 것을 무릅쓰는 삶이며, 그 목적에 맞춰 자신의 삶을 희생하는 삶이다.

이와 반대로 ‘싫어하는 일을 하지 않는 삶’은 그러한 목적이나 목표를 염두에 두지 않는 삶일 것이다. 삶의 목적이 사라진다고 해서 이것이 곧 절망으로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목적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기 때문에 살아간다. 사치에가 말하는 ‘싫어하는 일을 하지 않는’ 삶이란 목적이나 목표가 중심이 아닌 삶이다. 삶 그대로에 열중하는 하는 삶이며, 목적이라는 것에 함몰되지 않는 자신의 삶 자체를 살아가는 삶이다. 그러할 때 피조물인 우리는 삶 그 자체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삶의 형식 속에서 납짝해지는 삶이 아니라 삶이 곧 형식이 되는 그러한 삶, 삶이 올곧이 자신의 삶이 가능해진다. 그로부터 등질적이고 균질한 삶에서 벗어나 유일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추상노동과 유용노동

문제는 이러한 반란이 왜 여기가 아닌 저기에서, 일본이 아닌 핀란드에서야 가능한 것처럼 그려지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카모메 식당’만의 문제는 아니다. 소로(Henry David Thoreau) 역시 월든(Walden)의 호숫가에서야 자본주의적 제도의 문제를 깊이 있게 통찰할 수 있었다(‘월든’). 김씨는 밤섬에 표류해서야 자본주의와 단절한 삶을 살 수 있게 되며(‘김씨 표류기’), 최해갑 역시 남쪽의 섬에 정착한 후에야 국가체제와 공권력에 맞서 본격적으로 저항하게 된다(‘남쪽으로 튀어’).

왜 여기가 아니고 저기인가.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는 이러한 변혁이, 반란이, 혁명이 가능할 수 있을까? ‘크랙 캐피털리즘’의 저자 존 할러웨이(John Holloway)는 분배된 균일한 시간을 거부하는 일은 자본의 논리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엄’을 실현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살인하기를 거부하는 병사의 저항과 같으며, 오늘 일을 쉬고 공원으로 책을 읽는 소녀의 일상적 행위와도 같다. 이들의 행동은 자본과 국가가 강요하는 ‘추상노동’이 아닌 ‘유용노동’(‘행위’)이다.

‘추상노동’이란 ‘유용노동’이 추상된 일정한 노동량으로 단지 양적으로 전이됨으로써 생겨난다. 할러웨이는 ‘추상노동’과 ‘유동노동’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나는 케이크를 굽는다. 나는 케이크를 굽는 것을 즐긴다. 나는 그것을 먹기를 즐긴다. 나는 내 친구들과 그것을 나누는 것을 즐긴다. 나는 내가 만든 케이크를 자랑한다. 그러고 나서 나는 케이크를 구우면서 살겠노라고 결심한다. 나는 케이크를 굽고 그것들을 시장에 내다 판다. 점차 케이크는 내가 살기에 충분한 소득을 얻는 수단이 된다. 내가 그것을 팔기에 충분히 낮은 가격을 유지할 수 있기 위해, 나는 일정한 속도와 일정한 방식으로 케이크를 생산해야 한다. 즐김은 더 이상 그 과정의 일부가 아니다. 얼마 후에 나는 내가 충분한 돈을 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나는 케이크 만들기가 어쨌든 하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고 충분한 돈을 벌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이상, 더 잘 팔릴 다른 뭔가를 만들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나의 행위는 그 내용과는 완전히 무관하게 되었다. 그것은 구체적 특징으로부터의 완전한 추상이었다. 내가 생산하는 대상은 이제 나로부터 완전히 소외되어서 나는 이제 그것이 팔리는 한에서는 그것이 케이크인지 쥐약인지 상관하지 않는다”(146~147면).

케이크를 굽고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이것을 함께 나눠 먹을 때까지, 그리고 이것을 팔아서 수익을 얻을 때까지도 이 노동에는 목적이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목적과 수단에 구분이 없었다. 여기까지가 ‘유용노동’(‘행위’)이라 불릴 만한 것이다.

하지만 케이크를 굽는 것이 삶에 충분한 소득을 얻는 수단으로 변해 버릴 때, 그러니까 더 많은 잉여가치를 만들어 내려할 때, 케이크를 굽고 즐겼던 그 수단과 목적의 행복한 조화는 파괴 되고 만다. 케이크를 굽는 행위와 그 행위의 내용과는 무관한 화폐가 목적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이것이 ‘추상노동’이며, 자본주의하에서 우리의 삶의 방식이다.

‘카모메 식당’의 사치에는 돈을 벌기 위해 일하지 않는다. 그들은 돈보다는 식당에서 일하는 것을 즐긴다. 이들의 삶은 ‘행위’이며 동시에 ‘반란’이라 할 수 있다. ‘추상노동’에 기반한 “자본주의는 우리에게서 기획과 수행의 통일성을, 목적과 행위의 통일성을 빼앗는다. 그러므로 그것은 우리에게서 우리의 고유한 인간성을 빼앗는다.”(‘크랙 캐피탈리즘’, 147면)

사치에, 소로, 김씨, 최해갑은 ‘추상노동’을 거부한다. 그리고 자신의 존엄을 찾기 위해 나아간다. 그런 점에서 이들의 행동은 ‘행위’이며 ‘반란’이자 ‘혁명’이다. 문제는 이러한 혁명이 나에게서 끝나지 않고 흘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혁명의 규모를 평가해서는 안 되며, 그 흐름을 인위적으로 만드는 제도를 구축해서도 안 된다.

 

▲ 공강일서울대 강사·국문학
▲ 공강일서울대 강사·국문학

△균열시키고 거부하고 창조하라

현실은 늘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다. 현실은 우리의 인식의 범주를 늘 벗어나 존재한다. 한국의 프로게이머는 프로그래머가 생각지 못한 방식으로 길을 뚫는다. 이를 테면, 프로게이머는 ‘드론 비비기’를 통해 프로그래머가 막아 놓은 길을 교묘하게 조작하여 그 막힌 부분을 투과해버린다. ‘영의 이중 슬릿 실험’(Young’s double-slit experiment)에서처럼 파동의 성질을 보이던 전자는, 관찰자라는 매개 변수가 끼어들면 입자의 성질을 보인다. 이러한 자연 혹은 사건들은 우리의 인식의 범위를 초과한 형태로 존재한다.

우리의 혁명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의 ‘존엄’은, 우리의 ‘행위’는 ‘추상노동’ 위로 흘러넘친다. 그러한 흘러넘침은 정식화될 수 없다. 혁명은 이 세계의 강렬도와 관계 맺는 방식에 따라 규정할 수 없는 형태로 분출한다. 그러니 이것을 어떻게 제도화하고 정식화할 수 있겠는가! 혁명을 제도화는 일은 사랑의 시간을 결혼의 시간으로 전이시키는 일과 같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리고 해야만 하는 일은 균열시키고 거부하고 창조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