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종흠 시사칼럼니스트

“한국은 문명국가인가?” 묻는다면 자신있게 그렇다고 대답하기가 어렵다. 명색이 우리가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이고, 2차대전후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달성한 나라라고 뽐내지만 아직도 사회전반의 윤리와 인권의 측면에선 문명국가라고 하기엔 부끄러운 수준이다. 2천년대 이후 본격화되고 있는 고위직 공직자에 대한 청문회를 보면 힘없고 배움이 적은 서민들은 도저히 빠져나갈 마음조차 낼 수 없었던 병역과 납세 등의 의무를 많은 후보들이 그렇게 쉽게 면탈하고도 그만한 지위에 오른 것을 보고 새삼스럽게 놀라게 된다. 우리나라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세계적 기업인이 탈세 횡령 등 천문학적 금액의 엄청난 불법 부정을 저질러 놓고도 어떻게든 법망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보고 과연 이 나라가 법치국가이며, 법앞에서 모든 국민이 평등한지 의문을 가질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최근에는 그렇게 많은 국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명박 대통령의 특별사면으로 풀려난 권력형 비리 인물들은 우리 사회에 절망감을 안겨주었다. 우리나라의 부패지수는 2010년에 세계 43위로 2009년의 39위보다 더 떨어지고 있어 국가위상의 안과 밖이 엄청나게 다른 사실을 실감한다. 돈과 권력이 있는 사람은 보통국민과 다른 초법적 지위를 누리게 되는 이중적 사회라면 과연 문명국가라 할 수 있을 것인가. 윤리의식이 실종된 상당수의 지배층이 유전무죄로 존재하는 사회구조가 지속되는 한 우리는 스스로 `선진국`,`문명국`이라고 입도 벙긋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난달말, 465억원을 횡령한 혐의로 국내 굴지의 재벌총수인 SK그룹 최태원 회장이 1심 법정에서 징역4년의 실형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된 사건은 유전무죄 사회가 청산되는 신호탄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법원이 검찰의 수사를 뒤집어가며 1심에서 법정구속까지 시킨 것은 재계에 큰 쇼크를 준 모양이다. 재벌총수들의 사법처리 문제가 생길 때마다 경제발전에 끼친 공로를 들먹이거나 국민경제에 영향을 주는 사업의 차질 운운 하며 봐주기식 판결을 해 온 선례에 비추어 제대로 된 법치가 이뤄지는 데 대한 반응인 것이다. 물론 이에 앞서 이호진 태광그룹 전 회장과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에 대한 실형선고와 법정구속이 있었다. 그러나 지난 대선 당시 경제민주화와 법치주의에 대한 국민적 요구가 분출한 이후 최 회장에 대한 이같은 사법처리는 지금까지의 재판관행이 국민들의 요구수준에 맞추는 방향으로 선회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특히 박근혜 대통령당선인도 이명박 대통령의 최근 특별사면과 관련해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관행을 이번 기회에 확실히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한 것은 새로운 법질서확립에 대한 기대를 갖게 했다.

그러나 법원의 재판성향 변화가 발전적으로 지속될지는 미지수다. 유전무죄의 사회구조는 어느 한쪽만의 변화로 바뀌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금력과 권력이 있는 계층이 빠져나가기 쉬운 허점이 방치된 법제도의 정비다. 이것은 재판관행보다 더 중요하다. 법제도의 정비를 통해 변호사의 전관예우를 없애고, 양형의 재량권을 축소하는 등 힘있는 사람들에 대한 봐주기식 수사나 재판의 소지를 막아야 할 것이다. 이같은 법제도를 정비하려면 정치인들의 의식이 공정하고 윤리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국회에는 사법제도와 관련 이해관계 당사자라 할 수 있는 법조계 인사들이 대거 진출하고 있어 법제도의 정비가 만만치 않다. 이 때문에 정치쇄신을 요구하는 국민여론 속에는 국회의 직업이기적 특혜구조를 혁파하라는 내용이 포함돼 있고, 국민들은 이에 대한 여야정당의 실천의지를 예의 주시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적으로도 지난해 3월 160개국가와 EU는 부패에 관한 국제협정을 비준하고, 정의의 행동규칙 확립에 대한 법적구속력을 가지게 했다. 우리 정치권도 지난 대선 때의 초심으로 돌아가 법원의 변화에 맞추어 유전무죄의 사회구조를 청산하는 일에 함께 진력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