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삼국시대 영일만 지역은 철기문화의 보고(寶庫)
목곽묘에서 농공구·무기 등 철제 유물 다량 출토
영일만 인근 산림지역 `제철 연료공급처` 가능성

▲ 울진 유적.

영일만 인근은 철 생산의 보고였다. 원삼국시대 이전 고대로부터 이곳은 철생산의 최적지였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 같은 사실은 문헌상으로 잘 나타난다.

문헌기록은 삼국시대부터 조선, 근대에 이르기 유적이 전해지는데 흥해읍 근처 양덕동의 조선시대 야철지, 구룡포읍 후동리의 병기를 만들던 주철장, 눌태리의 불미골, 동해면 금광리 구리와 갈탄, 백탄생산지 장기면, 죽장리 구리생산지, 흥해읍 금장동의 금생산지, 죽장면 가사리의 일제시대 백탄과 솥을 생산하던 곳 등이다. 또 구전으로 전해지는 곳은 장기읍 금오리에 쇠가 많이 남으로, 쇠골로 부른 곳이 있는데 쉬어가는 골짜기가 변하여 쇠골이 되었다는 설도 있어서 확실치가 않다. 하여간 영일만 지역에서 일어난 기록과 구전을 종합해 보면, 영일만은 입지나 기록으로 보아도 고대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철기문화의 발생지로 최적지임을 시사하고 있다.

글 싣는 순서
<1부=경북동해안 철기문화 꽃피우다>

1)한반도 철기문화의 뿌리
2)경북동해안은 고인돌 왕국
3)경북 동해안의 소국
4)동예인들의 후예
5)신라가 진한지역을 통일하다
6)철을 가진자가 세상을 지배한다
7)철기문화발전의 최적지 영일만
8)고래의 고장 영일만
9)고급철강의 비밀-고래기름
10)2천년전에 예고된 포스코신화

□철기문화 입지로서의 영일만

고대 철기문화 발상지는 철광석을 녹여서 쇠를 만드는 제련로 유적과 1차 가공한 중간소재로 공구와 무기류를 만드는 단야로 유적으로 구분된다. 제련로 유적은 온도, 목탄투입 등 노와 관련된 작업이 중심이 되다보니, 주위에 강이나 소하천을 낀 곳이 많다. 반면 단야로 유적은 주거지의 노지주변에서 작업을 함으로써 주거지에서 발견되고 있다. 그것이 고려시대 이후가 되면 단야로 유적은 단위 작업장인 소규모 공방지로 변하고 있다.

제철유적은 시대에 따라서도 입지를 달리하고 있는데 원삼국시대에서 고려시대까지는 철의 경제적 효용성과 야철장인의 사회적 지위로, 철광산에서 멀지 않은 평지나 전망이 좋은 구릉상에 자리를 잡는다. 그러던 것이 고려시대 이후가 되면 사람의 왕래가 어려운 깊숙한 산지나 골짜기로 스며들고 있다. 이에 대한 이유로 연료의 효율적 공급이란 설과 정부의 철장제 실시로 제철을 다루던 장인들에게 과다한 조세부담을 시킨 설이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

영일만은 동쪽의 장기곶을 중심으로 부근에는 해안단구가 발달하고, 행정적으로는 흥해읍, 동해면, 구룡포읍, 대보면, 장기면 등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만의 남서쪽에는 형산강과 넓은 충적평야가 있고, 만의 북서쪽은 내연산, 보현산, 향로봉, 비학산 등 비교적 높은 산들과 함께 능선사면을 따라서 울창한 산림이 들어서 있는 곳이다. 또 그곳에서 발원한 곡강천을 비롯한 여러 소하천들은 곡간평야를 거쳐서 동해로 유입되고 있다.

영일만의 이러한 자연입지는 고대 제철로의 입지조건들과 흡사하여, 제철유적이 확인될 가능성을 높여 주고 있다. 실질적으로 죽장면 상옥리 무쇠골에는 신라시대 철광산, 남구 이동의 무소마을에서는 수철이 생산되었고, 그 외 일대의 바다와 강으로 볼 때 사철 생산도 가능했을 것으로 짐작되어 향후 이 지역에서 제철유적의 발견 가능성을 더해 주고 있다. 또 영일만 근처의 울창한 산림지역은 제철 연료공급처일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이러한 제철유적 입지조건 때문인지, 영일만 일대는 제철및 기타금속과 관련된 유적이 오래전부터 기록과 구전으로 전해오고 있다. 실물기록은 포항 대보면 대보리 95호 석곽묘에서 집게, 망치, 모루 등 단야공구가 출토된 유적이 있다.

 

▲ 울진 유물 출토.

□실체적 영일만의 철기문화는

영일만은 이처럼 북서쪽의 능선과 형산강변의 충적평야를 배경으로, 일찍부터 고대인들이 철기문화와 그와 관련된 유적들을 곳곳에 남기고 있다. 철기문화와 간접적으로 관련된 청동기유적으로는 주거지, 지석묘군을 들 수 있다. 이 가운데 지석묘유적은 당시 지배자 계층의 묘로 회자되고 있는데 그곳에서 출토된 홍도, 마제석검, 석촉 등은 당시의 높은 기술수준으로 제작된 유물임을 말해준다. 이러한 높은 수준의 기술을 가진 영일만의 청동기시대 유적은 대보면, 구룡포읍, 동해면 등에서 확인되며 이 지역은 그 다음 시대인 초기철기문화의 태동지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초기철기시대의 영일만에는 만에서 멀지 않은 흥해 학천리와 마산리 등에서 이 당시의 무덤인 석관묘가 발견되었다. 이 무덤의 특징은 암반층을 파고 판석과 할석으로 조립한 석관을 만들고 그 위에 뚜껑돌을 덮는 것이다. 석관묘 유물로는 검파두식, 동검, 동경, 석촉, 석착 등으로 청동기와 함께 석기가 부장되던 무덤이기도 하다. 석관묘를 만든 사람들은 청동기시대 석기와 토기를 제작하던 높은 기술 수준을 배경으로, 청동광석을 녹여서 청동기를 제작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기술을 가진 사람들은 철기제작도 가능했음을 시사한다. 실제 동해안 지역을 제외한 타지역에서는 석관묘 단계부터 청동기와 함께 철물도 부장되고 있다.

초기철기시대 이후인 원삼국시대부터는 영일만의 철기문화가 보편화되고 있다. 그것은 당시 성행한 목곽묘와 그 무덤에서 출토되는 많은 철제유물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목곽묘는 판재형 목곽에 장신구를 장식한 주인공과 토기류, 철제유물을 함께 묻고 있다. 장신구류는 금 은, 비단은 아직 사용하지 않았지만, 수정, 마노, 호박과 같은 옥과 구슬은 옷에 궤메거나 귀걸이, 목걸이 등으로 장식한 유물을 가지고 있었다. 토기류도 특이한 기형들이 묻혔으니, 주머니호와 양쪽에 손잡이가 달린 장경호, 화로형 토기 등이 대표적 유물이다. 철기류는 농공구류와 무기류가 주류를 이루는데 농공구류는 다비, 보습, 쇠스랑, 낫, 괭이 등 농어업과 관련된 유물이다. 이에 비하여 무기류는 철검, 대도, 쇠창(철모), 철촉 등 실제 전투에서 사용한 유물들로서 당시의 전쟁상황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무덤과 유물들은 영일만 주변인 흥해 옥성리, 마산리, 학천리, 성곡리 지역에서 확인됨으로, 원삼국시대의 영일만 지역은 철기문화의 보고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 고총고분인 16호 적석목곽분(주곽)전경.

□삼국시대 보편화하는 철기문화

삼국시대에 들어오면 영일만의 철기문화는 대보면 대보리를 비롯한 대각리, 도구리 등의 무덤에서 발굴된 자료들이 다량으로 확인되고 있다. 무덤의 모양은 비록 소형 석곽들이지만, 무덤마다 경질의 토기류, 장신구류와 철기류가 들어 있었다. 이 가운데 철기류는 농공구류, 마구류, 무기류, 생활용구 등으로 재구분할 만큼 다종다양해졌다.

토기류는 고배류, 호류, 장식류 등이 묻혀서 그 당시의 생활상과 정신세계를 들여다 몰 수 있다. 철기류는 앞시기의 다비, 보습, 쇠스랑에 이어서 쇠도끼(철부), 쇠낫(철겸), 도자, 철착, 꺾쇠 등 농공구류와 재갈, 등자 등 마구류, 대도, 철검, 철모, 철촉 등 무기류 등이 무덤마다 빠지지 않고 묻히고 있다. 이처럼 삼국시대 영일만 철기문화가 소형석곽에도 묻힐 만큼 보편화된 것을 보면, 이 지역이 철기문화의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다.

영일만의 고려, 조선시대 철기문화는 삼국시대에 이어서 계속된 흔적이 곳곳의 야철지와 목탄지 등에서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유적 주변에서는 목탄편과 불을 맞은 돌, 슬레그 등도 수습됨으로 이 지역이 철을 다룬 곳임을 증명한다. 그런가하면 영일만 주변인 기북면 성법리는 일제강점기까지 주물소로 운영된 곳이라써 영일만의 철기문화가 주변으로 확산되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영일만은 시대별 철기문화의 상황에서도 고대로부터 철기문화가 발전하기에 최적지였음을 입증하고 있다.

□특별취재팀 = 이준택, 정철화, 이용선(이상 본사 기자), 김용우 향토사학가, 장정남 한빛문화재연구원 전문위원.

    이준택, 정철화, 이용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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