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안 최고 염전 지금은 명성만
수십년 흥부 장터 좌판마다 사연

장날이다. 바닷가 쪽 공터 어물전에는 물 좋은 싱퉁이, 도루묵, 양미리부터 미주구리, 퉁수, 멸치등 건어물, 그리고 곰삭은 젓갈들이 나와 앉았다. 김장에 버무려 넣을 생선을 놓고 흥정하던 새댁에게 결국 아귀 사촌쯤 되는 놈 두 마리가 더 얹어 진 채 팔려 간다. 임연수 앞에 쪼그리고 앉아 몇 번이고 크기를 가늠하는 할머니의 굽은 등에도 늦가을 햇살이 올라탄다.

울진군 북면 소재지인 부구리는 흥부(興富)동과 염구(鹽邱)동의 이름을 따서 부르게 된 이름이다. 동해안 최고의 천일염 생산지였던 이곳은 6~70년 전 까지도 크고 작은 염전이 성황을 이뤘고, 간수(바닷물)를 가마솥에 끓여 얻는 `전오염(煎熬鹽)`으로 명성이 자자했다고 한다.

전국에서 때깔 좋고 맛 좋은 흥부 소금을 사기 위해 장사치들이 몰려들었고 그것은 십이령을 타고 영남 내륙 곳곳으로 실려 나갔다던 흥부장터. 이제는 염전의 흔적 조차 찾을 수 없지만, 여전히 경상도 말씨와 강원도 말씨가 적당히 버무려 지고 태백산맥 자락이 키운 산내음과 동해가 품은 갯내음이 웅성거리는 곳, 오랜 세월 낯을 익히며 살아 온 사람들의 이야기가 어울렁 더울렁 피는 오늘은 흥부 장날이다.

노충순씨(71세)의 좌판엔 신기한 물건들이 쌓여있다. 풍수가나 지관들이 가장 중요한 기구로 사용하는 패철(佩鐵)과 제사 모실 때 쓰는 검은 베로 만든 유생(儒生)의 예관(禮冠)인 유건儒巾도 있고, 먼지가 쌓인 중절모와 돋보기 그리고 더 이상 찾을 사람이 없을 듯 한 곽성냥도 있다. 노씨의 고객도 그의 물건처럼 오랜 단골들이다. 얼굴이 불그레한 그가 유건을 써 보이며 웃는다.

“장터가 면사무소 옆에서 이리로 온 지가 글쎄 한 십오 년 됐나 몰라. 지금은 1일 6일장이지만 옛날에는 3일 8일장이었지. 내가 이 장사한 지가 30년이 넘어. 그 전에는 광업소에서 석탄 캐는 일을 했지. 나는 차가 없는 사람이야. 그래서 전을 요만큼만 풀고 접으니 수월코 편치. 술도 짬짬 묵고 또 퍼뜩 와가 장사 하고 얼마나 좋누. 하루에 맥주를 열 병은 먹는다. 안주는 무신 안주? 고추장에 멸치 꾹 찍어 먹으면 그게 최고 안주지.”

장날 마다 떡을 해서 판 세월이 사십 년을 훌쩍 넘겼다는 할머니가 마수를 못했다고 발목을 잡는다. 백설기와 가래떡이 말랑말랑 따뜻하다. 빨간 스카프에 입술도 발갛게 바르고 눈썹도 곱게 그렸다. 종이상자를 깔고 앉은 모습이 소담하니 젊어 죽변 장, 흥부 장, 울진 장으로 돌아다닐 때는 곱다는 소리도 많이 들었겠다. 다음 손님에게도 마수를 좀 해가라고 소리친다. 마수라는 말에 멈추는 발길들이 인정이다. 사는 마을이 달라도 장터에서 친구가 되었다. 경조사 오가며 힘과 마음을 보태며 살았다.

“우리 어릴 때부터 흥부 장이 있었어. 엄마를 따라 장에 오면 풀빵, 찐 고구마, 강냉이 빵이 얼마나 먹고 싶던고. 사달라고 막 구불며 떼를 써도 절대 안 사줬지. 사 주기는커녕 궁디고 등짝이고 두들겨 팼지. 돈이 있어야 사주지. 그 속은 어땠겠노. 아이고, 한평생에 잘난 님은 잘 나게 살고 못난 님은 못 나게 살았지. 영결종천(永訣終天) 다 잊아뿌리고 인자부터 당하는 일은 잘 하고 살아야지. 자식들에게 환영을 받고 살라는가, 자식들한테 설움을 받을랑가 아직 모르는 일이야. 내가 지금 건강하고 장에라도 다니니까 엄마, 엄마 하지만 아파 드러누우면 양로원에 끄잡아다 놓겄지. 밥 주고 물주면 받아먹다가 가는 거라. 효자 자식이 실은 없다. 돈이 있으면 좋아하지만 돈이 없으면 부모도 짐덩이 밖에 안된다.”

시장통 보리밥집은 쉼터다. 하루 세 번 버스가 다니는 금성리에서 장을 보러 나온 김분옥(84세)씨와 배추 팔러 온 이춘열(68세)씨가 마주 앉았다. 한 마을에서 평생을 형님 아우 살고 있지만 장터에서 나누는 한 끼 밥은 다르다. 무채, 미역줄기, 볶은 묵은지, 무친 배추나물을 얹어 쓱쓱 비빈 보리밥과 시래깃국을 놓고 서로 얼굴을 반찬 삼아 밥을 먹는다.

“예전에는 여자들이 장보러 오는 일이 어디 있었나. 장날이면 아침 일찍 영감은 두루마기 쪽 빼입고 안 나섰나. 그러면 뭐가 필요하니 사오라고 주문을 하지. 그러면 뭐하겠노. 장터서 형님, 아우, 사돈 할 것 없이 만나 술 한 잔 걸치면 마캐 다 잊고 마는걸. 사서 들고 오던 물건까지도 다 잃어버리고 저녁 답에 갈지 자 걸음으로 사립문짝 안 들어서더나.”

“7남매 내한테 맡겨 놓고 우리영감은 하늘나라로 돈 벌러 안갔능교. 첩첩 골짜기에서 농사 지어 장에 내다팔아 자식들 다 키웠지요. 인자는 동서남북 다 뿌려 놓고 나니 진진 밤이 길기도 깁디다만 그때는 잠 못 잘 시간이 어데 있능교. 호박덩이 하나라도 열리는 족족 내다 팔고는 커다란 항아리를 사서 토끼질 같은 30리를 걸어오면 잠이 범 보다 무섭게 쏟아지고 말고지요 ”

두 양반 이야기에 보리밥을 푸던 식당 주인 안국단씨도 살아 온 세월을 들춘다. 마흔 아홉에 돌아가신 엄마를 대신해서 여덟 동생을 먹이고 가르쳤다.

“우리 집에서도 울진 장, 죽변 장, 흥부 장이 모두 왕복 60리길이었지요. 열네 살 무렵 엄마를 따라 장작을 이고 장마다 팔러 갔었네요. 참나무 숯을 만들어 뱃사람들에게 팔기도 했지요. 무허가 벌목 단속 때문에 밤에 나가 팔고 아침에 돌아오기도 했구요.”

`미역 소금 어물지고 춘양 장을 언제가노/ 가노, 가노 언제가노 열두 고개 언제가노/시그라기 우는 고개 이내 고개를 언제가노/ 대마 담배 곡물지고 흥부 장을 언제가노`

봇짐을 지고 굽이굽이 고개 넘나들던 봉화 보부상의 노래는 들리지 않는다. 집채만 한 소금가마에 온종일 불을 지피던 여망이(소금 굽는 장인을 일컫는 울진 동해안 지방의 방언)도 먼 세상으로 돌아간 지 오래다. 실하게 키운 가을 채소와 몇 날 며칠 뒤적거리며 말린 피데기들 곁에 주름만이 앉아 놀다 저녁 보다 먼저 전을 접는다. 어슬렁 파도 소리 빈 장터로 스미는 저녁이지만 그래도 흥부 장터다.

저작권자 © 경북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