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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교육, 그 폭력에 대한 선망

등록일 2026-06-18 17:50 게재일 2026-06-19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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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민 문학연구자

넷플릭스 드라마 ‘참교육’이 연일 화제라지만 나는 한 회를 채 보지 못했다. 문제 많은 학생을 바로 잡겠다는 구실로 무자비하게 패서 교화한다는 구도가 과거 학창 시절을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사실 이 작품에서 그려지는 선생의 구타는 꽤 익숙한 편이기도 했다. 그보다 더 심한 체벌과 가혹 행위를 겪으며 중고등학교를 보냈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예전처럼 ‘사랑의 매’를 휘두르면 학교가 더 나아질까? 당연히 그렇게 해결될 리가 없다.

그럼에도 이 드라마는 꽤 잘 팔리나 보다. ‘참교육’에 열광하는 시청자들조차 폭력만으로 교권이 회복될 거라고 믿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나쁜 학생이나 개념 없는 학부모에 대한 응징이 필요하다는, 그 즉물적인 감정을 배설할 창구가 필요한 것 아니겠나. 그러다 보니 학교에서 벌어질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해악을 나열해 놓고, 이를 통해 마음껏 패도 될 권리를 확보하는 방식의 서사가 익숙하면서도 여전히 먹히나 보다. 더구나 그 폭력에는 교권 보호라는 명분도 있으니, 죄의식 없이 ‘참스승’의 주먹질을 소비해도 된다고 여겨지게 된 것일까.

폭력의 주체는 자기 행동을 정당화하면서 폭력을 이어가기 마련이다. 이때 그 정당화의 기제로 정의가 동원될 때 법의 가치와 윤리의식은 소실될 수밖에 없다. 교육과 제도, 그러니까 사회 자체가 이미 각종 패악질로 얼룩져버렸다는 판단을 전제로 할 때에만 허용가능한 ‘합법적 폭력’이 있다는 것이다. 개봉할 때마다 1000만 관객을 동원하는 ‘범죄도시’ 시리즈를 상기해 봐도 좋다. 한국형 슈퍼 히어로라고 칭할만한 괴물형사 마석도의 무지성 ‘복싱’을 지지하는 심리의 배후에는 세계에 대한 비관이 놓여있다. 정의와 불의 간의 균형과 긴장이 무너져버렸다는 의식의 확산이 폭력에 대한 선망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폭력에의 선망은 권위에 대한 희구이기도 하다. 민주적 절차는 너무 느리고, 법과 인권은 힘 있는 악인을 보호할 뿐이며 선한 폭력이 요구될 때도 있다는 징벌적 포퓰리즘 세계관이 변용‧확장되고 있다. ‘참교육’에 등장하는 ‘교권보호국’은 민주적 통제 바깥의 초법적 기구에 가깝다. 권위주의적 상상력이 현실에서 힘을 얻기 위해서는 악이라 여겨지는 무수한 개인들에 대한 분노가 공유돼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참교육”은 악에 대한 응징이라기보다는 사회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는 문화적 장치가 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학생의 인권과 선생의 교권을 대립적인 관계로 사유해선 안 된다. 만약 누군가가 학생 인권 보호하려다 교권이 추락했다는 식으로 말한다면, 그를 의심해 보기 바란다. 교권을 겨우 ‘때릴 권리’ 정도로 축소하면 되겠나? 솔직해지자. 우리는 과거 어떻게 맞아 왔나?

종아리나 허벅지, 손바닥이나 손등을 맞는 경우는 젠틀한(?) 편에 속했고, 따귀와 차이는 것도 예사 아니었나. 반 성적이 떨어지면 단체로 벌을 서기도 했으며, 그 과정에서 ‘선착순’도 알게 됐다. 그렇게 맞고 자란 세대가 오늘의 현실에 일조한 것 아닌가? 남학교를 나온 나만의 기억이길 바라지만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부른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참교육’을 보더라도 폭력으론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지난 시절의 ‘참경험’만은 잊지 말자.

/허민 문학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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