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초여름 영덕, 풍요를 고민하며

등록일 2026-06-17 19:54 게재일 2026-06-18 16면
스크랩버튼
Second alt text
이번 여름엔 영덕의 한적한 마을에 가보면 어떨까. /필자 제공

나는 요즘 매주 어려운 고민에 빠진다. 곧 두 돌이 되는 아들과 한 주 내내 직장생활 하느라 고생했을 아내와 함께 어디서 어떻게 주말을 보낼까. 휴대폰을 쥐고 포털사이트를 검색하거나 SNS를 뒤지고, AI까지 동원하여 갈 만한 곳을 찾아보지만 쉽지 않다. 그러던 중 아기 키우는 친구들이 여럿 모여 있는 단체 톡 방에 솔깃한 제안이 올라왔다. 

 

그들 중 몇몇이 몇 년 째 러닝을 즐기고 있는데, 영덕 고래불해수욕장에 열리는 영덕해변전국마라톤대회에 참가할 겸, 친구의 어머니가 계시는 영덕의 한적한 마을에 다 같이 놀러가자는 것이었다. 예전에도 친구에게 그 동네 참 좋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기에 궁금했던 참이었다. 그렇게 모두 세 가족이 영덕으로 출발하기로 했다.

친구가 찍어준 주소를 찍고 차를 달려 영덕군 읍내에서도 한참 더 들어가야 하는 창수면 인량마을에 도착했다. 탁 트인 논마다 찰랑대는 물 위로 어린 벼포기들이 싱그럽게 고개를 든, 푸르고 예쁜 마을이었다. 논가에 난 가지런한 길 위에는 고즈넉한 고택들이 웅장하면서도 다정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그 사이 어디쯤 친구 어머님의 집도 소담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지붕과 기와는 옛 집의 것을 그대로 살려둔 채 요즘 자재들로 보강하여 불편함 없이 지낼 수 있도록 한 예쁜 집이었다. 

 

앞마당에는 갖가지 꽃들이 귀엽게 피어 있었고 뒷마당 작은 텃밭에는 농약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쌈 채소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다른 지역 출신인 어머니는 근처에 정착한 가족을 따라 여기에 내려와서 벌써 9년 째 지내고 계신다고 했다. 원래는 귀신이 나온대도 이상하지 않을 흉가를 리모델링하여 이렇게 멋진 집을 가질 수 있게 되셨다고. 먼저 도착한 친구들은 저마다 데크에서 햇빛을 쬐며 책을 읽거나 주전부리를 먹으며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친구들의 딸들도 마당에서 놀거리를 찾아 벌써 뛰놀고 있었다.

나도 처마 밑 그늘에 자리를 잡고, 어머님께서 내어주신 삶은 골뱅이와 간장게장을 두고 지역 막걸리를 따서 벌컥벌컥 마시는 호사를 누렸다. 시원한 물을 받아놓은 조립식 간이수영장에서 누나들과 함께 물장구를 치는 아들도 나 못지않게 즐거워보였다. 아내도 그런 아들의 사진을 연신 찍어대며 덩달아 신이 났다. 안주를 비우자 뒷마당에서 딴 앵두 한 접시가 나왔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붉은빛과 노란 빛이 도는 앵두를 하나씩 오물거리고 있노라니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디오니소스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디오니소스는 풍요를 관장하기도 한다는데, 풍요라. 일상을 열심히 살아가는 이유가 바로 그것을 위해서인 셈인데, 뭔가 디오니소스의 풍요라는 것은 우리가 도시에서 좇던 그것과는 조금 다른 개념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언제나 풍요에 대해 고민했다. 그것은 어떻게 풍요로워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었다. 내가 도시에서 떠올리던 풍요는 비싼 땅 위에 높은 건물을 짓고 빛나는 자동차를 타는 종류의 것인데 눈앞에는 전혀 다른 종류의 풍요가 펼쳐지고 있었다. 푸르게 펼쳐진 논을 배경으로 물장구치는 아이들과 아무런 고민도 없이 저마다 앉아 멍하니 늘어진 친구들. 

 

졸려서 낮잠을 자고 일어났더니 기울고 있던 태양. 고기가 익고 가자미조림이 끓는 냄새. 이것은 도시의 것과는 성격이 전혀 다르지만 그래도 분명히 풍요였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풍요가 있는데 나는 정작 어떤 풍요를 가져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은 채 어떻게 풍요로워질 것인가에 대해서만 골몰했던 것이 아닐까.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 바다로 향했다. 아이들과 바닷가에서 모래와 조약돌을 가지고 노는 동안 친구들은 하프마라톤을 완주하고 뿌듯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잘 뛰고 왔느냐고 물었더니 친구들은 참 좋았다고 말했다. 나는 기록이 잘 나왔느냐고 물은 것이었는데 친구들은 그 따위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는 듯 바다를 보며 뛰는 것이 참 좋았다고만 이야기했다. 

Second alt text
강백수 시인

점심을 먹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뜻밖의 사실을 발견했다. 어제부터 오늘까지 우리가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통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도시에서 나는 아직 가지지 못한 미래의 것들, 그러니까 앞으로 사게 될 집이나 앞으로 벌게 될 돈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며 산다. 아니면 이미 지나간 일들에 대한 추억이나 원망을 늘어놓곤 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틀 동안 그런 이야기를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냥 지금 눈앞에 있는 풍경을 이야기하고 지금 먹고 있는 음식에 대해 이야기했으며 지금의 기분에 충실했을 뿐이다. 마냥 신나게 놀던 아이들처럼.
/강백수 (시인)

2030, 우리가 만난 세상 기사리스트

더보기
스크랩버튼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