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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슨 목소리에 불을 붙이다

등록일 2026-06-16 15:29 게재일 2026-06-17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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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아 작가

내 삶에서 가장 뜨거웠던 문장이 비문(非文)처럼 흩어지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대학 시절, 교정의 가로수 사이로 터져 나오던 벨칸토의 선율은 온전히 나의 영토였다. 노래는 내게 단순한 전공이 아닌 존재를 증명하는 유일한 언어였다.

그러나 삶은 때로 가장 소중한 것을 앗아간다. 성대 수술 이후 내 안의 악기는 서서히 조율을 잃어갔다. 고음은 더 이상 매끄러운 비단처럼 뻗지 못했고, 거친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툭툭 끊어졌다. 예전 같지 않은 소리를 마주하는 일은 거울 속에서 낯선 이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는 것만큼 고통스러웠다.

그날 이후, 나는 노래를 멈추었다. 내 성대에도 서서히 시간이 부식시킨 붉은 녹이 슬기 시작했다. 소리를 내는 행위 자체가 두려움이 되었고, 그 두려움은 거대한 성벽처럼 높아졌다. 하지만 음악은 언제나 ‘첫사랑’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무리 밀어내도 우연히 들려오는 맑은 아리아 한 소절에 심장이 먼저 반응하곤 했다. 입술은 굳어 있었지만 마음의 성대는 늘 그 선율을 따라 떨고 있었다. 그 지독한 미련 속에서 찬란한 달란트는 장롱 깊숙이 넣어둔 빛바랜 훈장처럼 먼지만 쌓여가고 있었다.

그러던 내게 교회에서 독창을 할 기회가 왔다. 20년 만의 일이었다. 수많은 사람의 시선이 모이는 그 정적의 한가운데로 다시 걸어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숨이 턱 막혀왔다. 도망치고 싶었다. 내적 갈등이 깊었다. 내 안의 첫사랑이 문을 두드리는 것만 같았고 밀어내는 것도 같았다.

그날부터 20년의 침묵을 깨우기 위해 기계의 녹을 닦아내듯 성대의 녹을 닦았다. 마치 고시 공부를 하는 수험생처럼 책상 앞에 앉아 악보를 펼쳤다. 음표 하나하나의 길이를 재고, 소리가 지나가는 길을 연구하고 가사가 가진 영적인 의미를 텍스트 바깥으로 길어 올리기 위해 펜을 꾹꾹 눌러가며 공부했다.

발성 연습은 더 처절했다. 이미 굳어버린 성대의 근육을 달래고 깨우기 위해,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떨릴 줄 알았기에, 내 부끄러운 밑천이 탄로 날까 무서웠기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연습’이라는 물리적인 시간을 쌓는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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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아 작가가 연구한 악보. /김경아 제공

드디어 주일 아침이 밝았다. 무대에 오르기 전, 손끝이 떨렸다. 심장 소리가 귀를 먹먹하게 만들 정도였다. 혹여나 목소리가 뒤집히거나 떨릴까 염려되어 우황청심원까지 마셨다. 온 마음을 다해 기도했다. ‘이 소리가 나의 자랑이 아니라, 오직 선한 도구로만 쓰이게 하소서.' 최선을 다해 준비했으니 후회는 없으리라 스스로를 다독이며, 나는 드디어 회중 앞에 섰다.

전주가 흐르고 내 입술이 열렸다. 노래가 진행될수록 왕년의 그 눈부셨던 고음과 압도적인 성량은 나오지 않았다. 흔들림과 호흡의 불안정이 발목을 잡았다. 노래를 마쳤을 때 박수 소리가 들렸지만 내 마음은 차갑게 가라앉았다. ‘만족하지 못했다.’ 머릿속 완벽한 음악적 이상향과 20년 만에 터져 나온 현실의 소리 사이에는 너무도 깊은 심연이 존재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마음 한구석에 낙심과 허탈함이 밀려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저녁에 침대에 누워 가만히 오늘의 소리들을 복기해보는 순간, 내 안에서 무언가 다른 불씨가 탁하고 켜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은 ‘잘했다’는 성취감이 아니라 ‘다시 시작했다’는 엄숙한 자각이었다. 20년 동안 차갑게 식어 있던 내 성대의 제단에, 비록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분명한 ‘불’이 다시 붙은 것이다.

비록 박자와 소리는 만족스럽지 못한 무대였을지라도, 그것은 20년 동안 닫혀 있던 내 음악의 지하수를 다시 지상으로 끌어올리는 위대한 첫 투신이었다. 이제 나는 다시 슬며시 피어오른 이 불씨를 꺼뜨리지 않으려 한다. 내게 주어진 성악이라는 달란트, 잠시 녹슬었을지언정 결코 사라지지 않은 이 은사를 이제는 선하게 사용하고 싶다. 완벽한 고음으로 기교를 자랑하는 노래가 아니라, 상처 입어 보았기에 상처 입은 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질 수 있는 낮고 깊은 노래를 부르고 싶다. 마중물은 이미 부어졌다. 이제 내게 남은 것은, 그 깊은 샘에서 길어 올릴 더 맑고 선한 내일의 노래를 향해 한 걸음 더 걸어가는 일뿐이다. 

/김경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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