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스타벅스코리아가 5·18 민주화운동 기념일에 ‘탱크데이’라는 프로모션을 진행하려다 거센 여론의 역풍을 맞았다. 한국 민주주의 역사에서 가장 민감하고 비극적인 사건을 상업적 마케팅의 무대로 끌어올린 이 황당한 사태는, 단순한 실무진의 부주의나 해프닝으로 치부하기엔 그 밑에 깔린 구조적 병폐가 너무나 깊다.
신세계그룹 정용진 회장의 잇따른 설화(舌禍)와 진정성 없는 사과, 그리고 이어진 소비자의 대규모 불매운동과 선불금 환불 사태는 한국형 ‘오너 리스크’의 정점을 보여주는 동시에, 우리 사회에 더 근본적이고 무거운 질문을 던지고 있다. 바로 “기업은 과연 사회적·정치적 가치의 심판자가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미국의 젊은 보수 정치 사상가이자 기업가인 비벡 라마스와미(Vivek Ramaswamy)는 그의 저서 ‘깨어 있는 척하는 기업들(Woke, Inc.)’에서 현대 자본주의를 뒤흔드는 가장 위험한 조류로 ‘깨어있는 자본주의(Woke Capitalism)’를 꼽았다. 기업들이 환경(E), 사회적 책임(S), 지배구조(G)라는 그럴싸한 도덕적 성적표를 흔들며 사회적 정의의 수호자인 양 행세하는 현상을 맹렬히 비판한 것이다. 라마스와미는 기업이 스스로 ‘도덕적 권위’를 칭하는 순간, 자본주의의 효율성이 파괴될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의 근간인 공적 담론의 장이 왜곡된다고 경고했다. 사실 오늘날 많은 기업이 ESG를 인류애적 가치나 숭고한 경영 철학으로 분장하곤 한다. 그러나 글로벌 무대에서 펼쳐지는 ESG의 민낯은 고결한 경영 철학이라기보다, 시장과 소지자로부터 배제되지 않고 생존을 위한‘가면무도회’에 가깝다. 이처럼 철저히 계산된 비즈니스 행위가 마치 고차원의 ‘윤리’와 ‘철학’의 탈을 쓰고 시장에 유통되는 것이 지금 ESG의 가장 솔직하고도 씁쓸한 단면이다. 이번 스타벅스코리아의 파문은 라마스와미가 경고한 그 ‘위선과 왜곡의 방정식’이 한국 시장에서 어떻게 실현되는지를 보여주는 완벽한 리트머스시험지이다.
그동안 신세계그룹과 스타벅스코리아 역시 텀블러 사용 권장, 다회용 컵 도입 등 이른바 ‘ESG 경영’을 표방하며 자신들이 깨어있는 친환경 기업임을 자임해 왔다. 그러나 가면무도회의 화려한 드레스 밑에 숨겨져 있던 날것의 민낯은 철저한 ‘ESG 워싱(위선적 가치경영)’과 도덕적 불감증이었다. 현대적 의미의 ESG는 단순히 나무를 심고 플라스틱을 줄이는 시늉의 친환경적 행동에 그치지 않는다. 조직 구성원 전체가 사회적·역사적 맥락에 대한 깊은 감수성을 공유하고(Social), 최고경영자의 독단적 판단이나 비뚤어진 가치관이 기업 전체를 파멸로 이끌지 않도록 견제하는 내부 통제 시스템(Governance)을 갖추는 것이 핵심이다. 하지만 정용진 회장의 신세계는 전혀 다른 길을 걸어왔다. 정 회장은 과거 SNS를 통해 ‘멸공’ 등의 자극적인 정치적 메시지를 쏟아내며 개인의 사상적 만족을 기업의 브랜드 이미지와 결부시켰다. 생존을 위한 가면을 쓰고 가치경영을 연기하던 조직은, 최고경영자의 독단적이고 정제되지 않은 가치관 앞에서 상식적인 리스크 스크리닝 시스템을 마비시키는 ‘ESG 워싱(ESG Washing)’이라는 민낯을 보여줬다. 아랫사람들이 오너의 눈치를 보며 상식적인 검증조차 포기할 때, 조직은 기괴한 방향으로 폭주하기 마련이다. 5·18이라는 민족적 비극의 날에 고문치사 사건을 연상시키는 문구와 ‘탱크’라는 단어를 조합한 프로모션이 아무런 제동 장치 없이 최종 승인되어 대외에 게시된 것은, 신세계그룹의 거버넌스가 오너 일가의 사유물로 전락해 완전히 작동 불능 상태에 빠졌음을 방증한다.
더 큰 문제는 기업과 거대 자본이 이처럼 가면 뒤에 숨은 채 사회적 가치나 도덕적 영역에 깊숙이 개입해 스스로 심판자처럼 행동할 때 발생하는 ‘민주주의의 위기’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사회가 무엇을 옳다고 여길 것인가”, “어떤 역사적 사실을 어떻게 평가하고 기억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권한은 오직 시민들의 자유로운 토론과 선거, 그리고 헌법이 보장한 공적 절차를 통해서만 부여된다. 그것이 민주주의의 본질이다. 그러나 선출되지 않은 CEO와 이들이 움직이는 거대 자본이 얄팍한 도덕의 기준을 재단하고, 자신들의 정치적·사상적 잣대를 소비자에게 강요하기 시작하면 민주주의는 뿌리째 흔들리게 된다. 기업이 소비자의 선택까지 정치화하는 순간, 자본주의 시장은 왜곡되고 민주주의의 다양성은 사멸한다.
결국 위선적인 도덕 경영의 끝은 처참한 재무적 파국이었다. 사건 발생 후 불과 2주 만에 스타벅스의 주간 결제액은 33% 이상 폭락했고, 분노한 소비자들이 선불 충전금 환불을 요구하면서 최대 4000억 원 규모의 자금 유출 압박이 시작되었다.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기업의 오만한 ‘도덕적 월권’과 거버넌스 실패에 대해 가장 냉혹한 방식으로 유죄 판결을 내린 것이다. 기업이 오너 개인의 정치적 신념을 전파하는 도구가 되거나 ‘윤리’와 ‘철학’으로 포장된 얄팍한 가면을 쓴 채 도덕적 마케팅으로 대중을 훈계하려 들 때 그 기업의 미래는 없을 것이다.
신세계와 스타벅스코리아가 이번 사태의 궤멸적 타격에서 벗어나는 길은 단 하나뿐이다. 시장과 소비자들은 스타벅스코리아를 운영하는 기업의 잘못된 오너리스크에 분노하는 것일 뿐, 스타벅스라는 글로벌 브랜드 자체를 싫어해서 불매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똑바로 인식하는 것이다. 경영층의 잘못을 실무자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비겁한 꼬리 자르기를 멈추고, 최고경영자의 독주를 원천적으로 차단할 수 있는 투명하고 투철한 지배구조(Governance)를 재구축하는 것이다. 기업이 도덕과 정치의 심판자 노릇을 하려는 어쭙잖은 월권을 그만두고 시장의 겸손한 플레이어로 복귀할 때, 비로소 왜곡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도 제자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이번 사태는 “E(환경)를 아무리 잘 포장해도, S(사회적 존중)에 무감각하고 G(지배구조)가 독단적인 기업은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는 시장과 소비자가 보내는 준엄한 경고이다.
/서득수 지속가능ESG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