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소환원제철과 국가 에너지 공급망 구축을 중심으로
기후위기는 더 이상 환경의 문제가 아니다. 폭염과 집중호우, 가뭄과 산불은 이미 우리 삶과 산업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세계 각국이 탄소중립을 국가 목표로 내세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최근의 탄소중립은 단순한 환경정책을 넘어 경제정책이자 산업정책으로 변화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Inflation Reduction Act)이다.
많은 사람들은 IRA를 기후위기 대응 정책으로 이해한다. 전기차를 지원하고 재생에너지를 확대하며 수소산업을 육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IRA를 설명하기 어렵다.
미국이 IRA에 막대한 재정을 투입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미래 산업의 주도권을 확보하고 제조업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다. 자동차와 배터리, 반도체, 수소산업, 핵심 광물과 첨단 제조업의 공급망을 미국 중심으로 재편하려는 전략이 그 안에 담겨 있다.
다시 말해 IRA는 환경정책인 동시에 산업정책이다. 탄소중립을 추진하면서 제조업을 육성하고 일자리를 만들며 국가 경쟁력을 높이려는 전략인 것이다. 미국은 단순히 온실가스를 줄이는 데 머물지 않는다. 국가가 방향을 정하고 정부가 투자하며 기업이 그 위에서 움직이는 구조를 만들고 있다. 탄소중립을 산업 경쟁력 강화의 기회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유럽연합도 탄소국경조정제도(CBAM)를 통해 탄소배출이 많은 제품에 새로운 무역 기준을 적용하고 있다. 이제는 얼마나 많이 생산하느냐보다 얼마나 적은 탄소를 배출하며 생산하느냐가 경쟁력을 결정하는 시대가 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대한민국에도 예외가 아니다. 대한민국은 제조업으로 성장한 나라다. 자동차와 조선, 기계와 전자산업은 모두 제조업 기반 위에서 발전해 왔다. 그리고 그 제조업의 출발점에는 철강산업이 있다. 철강은 단순한 하나의 산업이 아니다. 자동차 산업의 재료이고 조선산업의 골격이며 기계산업의 기반이다. 철강이 흔들리면 제조업 전체가 흔들릴 수밖에 없다. 그 철강산업의 중심에 포항이 있다. 포항은 지난 반세기 동안 대한민국 산업화를 이끌어 온 철강산업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지금 포항은 또 한 번의 전환점 앞에 서 있다.
탄소중립경제 시대가 철강산업의 근본적 변화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얼마나 많이 생산하느냐가 경쟁력이었다면 이제는 얼마나 적은 탄소를 배출하며 생산하느냐가 경쟁력이 되고 있다. 철강산업 역시 예외가 아니다. 그 중심에 수소환원제철이 있다. 수소환원제철은 석탄 대신 수소를 이용해 철을 생산하는 기술이다. 이산화탄소 배출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어 미래 철강산업의 핵심 기술로 평가받고 있다. 유럽과 일본, 중국도 이미 관련 기술 개발과 상용화 경쟁에 뛰어들고 있다.
하지만 수소환원제철을 단순한 기술개발 사업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많은 사람들이 철강회사의 투자 문제로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국가 산업 기반의 문제에 가깝다. 수소환원제철에는 막대한 양의 청정수소가 필요하다. 동시에 대규모 전력이 필요하다. 수소를 수입하고 저장할 항만과 저장시설이 필요하며 산업단지와 연결되는 배관망도 필요하다. 안정적인 전력 공급을 위한 송전망 역시 필수적이다.
결국 수소환원제철의 성공 여부는 개별 기업의 의지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국가가 얼마나 체계적으로 수소 공급망과 전력 공급망을 구축하느냐에 달려 있다. 고속도로를 기업이 건설하지 않듯이 철도망을 기업이 구축하지 않듯이 수소 공급망과 에너지 공급망 역시 국가가 책임지고 구축해야 한다.
바로 이것이 미국 IRA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중요한 교훈이다.
국가는 산업의 방향을 제시하고 기업이 감당하기 어려운 위험을 분담하며 미래 산업의 기반시설을 구축한다. 그 위에서 기업은 투자와 혁신을 추진한다. 포항과 경북은 이러한 변화에 가장 먼저 대응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 포항은 철강과 조선, 자동차 산업을 연결하는 국가 제조업 공급망의 핵심 거점이며, 영일만항을 통해 청정수소 공급 거점으로 성장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
경북 역시 원자력과 재생에너지, 산업단지와 항만을 바탕으로 전력과 수소를 연계한 산업 전환의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수소환원제철은 단순한 설비 교체가 아니라 에너지·물류·인력양성이 결합된 국가 차원의 산업 전환 사업이다. 따라서 포항과 경북의 산업 전환은 특정 기업의 투자 계획이 아니라 국가 전략사업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따라서 지금 필요한 것은 단순한 탄소중립 선언이 아니다.
국가 차원의 산업전환 전략이다. 우선 수소환원제철을 국가전략기술로 육성해야 한다. 미래 철강산업의 경쟁력을 결정할 핵심 기술인 만큼 국가 차원의 지원체계가 필요하다. 둘째, 포항을 저탄소철강특구로 지정할 필요가 있다. 철강산업 전환에 필요한 연구개발과 실증사업, 규제혁신과 세제지원이 집중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이 마련되어야 한다. 포항 저탄소철강특구는 대한민국 철강산업의 미래를 시험하는 국가 프로젝트가 되어야 한다. 포항은 산업화를 상징했던 도시에서 산업 대전환을 상징하는 도시로 나아갈 수 있다. 셋째, 영일만항을 중심으로 국가 차원의 청정수소 공급망을 구축해야 한다. 수소 생산과 저장, 운송과 공급 기능을 갖춘 국가 수소허브 조성이 필요하다. 넷째, 동해안을 중심으로 한 전력망과 에너지 인프라 구축을 국가사업으로 추진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에너지다.
수소환원제철은 결국 수소와 전기가 있어야 작동한다. 아무리 우수한 기술을 확보하더라도 청정수소를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없고 충분한 전력을 공급할 수 없다면 상용화는 어렵다. 따라서 동해안을 중심으로 한 국가 전력망 확충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원전과 재생에너지, 수소 생산기지를 연계하는 새로운 에너지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과거 고속도로와 철도가 국가 성장의 기반이었다면 앞으로는 수소 공급망과 전력망이 산업 성장의 핵심 기반이 될 가능성이 높다.
다섯째, 산업 전환 과정에서 정의로운 전환 원칙이 구현되어야 한다.
탄소중립경제로의 전환 과정에서는 새로운 산업이 성장하는 만큼 기존 산업의 변화도 함께 나타난다. 따라서 노동자와 협력업체, 지역사회가 전환 과정에서 소외되지 않도록 충분한 지원과 재교육, 새로운 일자리 창출 정책이 병행되어야 한다.
탄소중립은 더 이상 환경정책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산업정책이며 에너지정책이고 국가경쟁력의 문제다.
오늘날 세계는 기후위기 대응과 산업 경쟁력 확보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 저탄소 산업으로의 전환 자체가 새로운 성장전략이 되고 있다. 미국 IRA가 보여 주듯이 탄소중립은 규제가 아니라 새로운 산업 질서를 만드는 과정이다. 누가 먼저 기술을 확보하고 공급망을 구축하느냐에 따라 미래 산업의 주도권이 결정된다. 포항과 경북은 탄소중립을 새로운 산업 질서를 선도할 기회로 활용해야 한다. 철강산업의 전환은 새로운 도약의 계기가 될 수 있다. 포항과 경북은 대한민국 산업 전환의 시험장이자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철강산업의 탄소중립 전환과 청정수소 공급망 구축, 동해안 에너지 인프라 확충이 성공한다면 대한민국 제조업의 새로운 성장 모델이 될 수 있다. 결국 수소환원제철은 철강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에너지 인프라의 문제이며, 결국 국가 산업정책의 문제다.
/유성찬 포항환경연대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