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 닭이 알을 품은 금계포란(金鷄抱卵)의 지세, ‘십승지’ 순흥이 간직한 신비로운 기운 “남쪽에는 순흥, 북쪽에는 송도” 찬란했던 영광과 1읍 5태지가 빚어낸 도호부의 자존심 정축지변의 수난을 이겨낸 불멸의 지기(地氣), 태실이 증명하는 역설적 가치 생명의 기운이 응집된 태봉산의 전설, 영주의 문화 자산이자 민족의 영원한 길지로 부활
‘1읍 5태지(一邑 五胎地)’, 이 짧은 한 문장에는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옛 순흥도호부)이 지닌 독보적인 지리적 가치와 한국 역사를 관통하는 명당으로서의 위엄이 서려 있다.
한 고을 안에 다섯 왕실(고려 충렬왕, 충숙왕, 충목왕, 조선 문종, 소헌왕후) 가족의 태(胎)를 묻었다는 사실은 풍수지리를 중시했던 우리 조상들이 순흥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다.
이 외에도 정조대왕의 형인 의소세손의 태실도 이곳 영주에 있다. 소백산의 거대한 정기가 평지에 응집된 순흥은 고려와 조선, 두 왕조가 가장 신뢰하고 사랑했던 길지(吉地) 중의 길지였다.
순흥이 풍수지리상 최고의 평가를 받는 이유는 소백산의 지형적 특성 때문이다. 소백산 비로봉의 정기가 남쪽으로 내려와 평지에 맺힌 곳이 바로 순흥이다. 거대한 산줄기가 뒤를 든든히 받쳐주는 배산임수의 전형적인 지형을 갖추고 있다.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지세를 갖춘 순흥은 황금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인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의 명당으로 불린다. 이는 재물이 쌓이고 끊임없이 인재가 배출되는 터를 의미한다.
또, 순흥은 조선 시대 예언서인 정감록에서도 전쟁과 재앙을 피할 수 있는 십승지(十勝地) 중 하나로 꼽히며 환란 속에서도 생명을 보존할 수 있는 기운이 서린 땅으로 인정받았다.
특히 순흥은 생명의 기운이 가장 강한 곳이라 하여 왕실의 태실(胎室)을 조성하는데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왕가에서 태지를 선정할 때 적용했던 기준을 보면 돌혈(突穴) 평지나 산꼭대기에 솥을 엎어놓은 듯 봉긋하게 솟아오른 땅을 최고의 길지로 쳤다, 장풍득수(藏風得水)사방의 산들이 태봉을 감싸 안아 바람을 막아주고(장풍), 앞에는 물이 흘러 생기가 흩어지지 않는(득수) 지형이어야 하며 비룡입수(飛龍入水)산맥의 기운이 끊어질 듯 이어지며 마치 용이 하늘에서 내려와 땅에 머무는 듯한 형세를 귀하게 여겼다.
왕실의 기운을 보호하기 위해 태실 주변에는 엄격한 금기가 적용됐다. 태실에 관련 거리 제한은 왕의 태실로부터 300보(약 540m), 대군은 200보, 일반 왕자나 공주는 100보 이내에 민묘를 쓰거나 집을 짓는 것을 엄격히 금지했다, 태를 묻은 산봉우리는 태봉산이라 불리며 국가적 관리 대상이 되고 이를 지키기 위한 사찰(수호사찰)을 지정하기도 했다.
고려 시대 순흥은 왕실의 태를 안치할 때마다 행정 구역의 등급이 승격될 정도로 왕조와 깊은 인연을 맺었다. 고려 초기 ‘흥주(興州)’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순흥의 역사는 고려 후기 원 간섭기에 접어들며 절정에 달한다.
충렬왕은 자신의 태를 순흥에 안치하며 이곳을 ‘흥녕현’으로 승격시키고 충숙왕의 태실이 마련되면서 지흥주사로 제29대 충목왕은 자신의 태를 이곳 욱금동에 묻으며 순흥을 가장 높은 행정 단위인 순흥부(順興府)로 격상시켰다.
국왕의 태를 봉안한 인연으로 고을의 격이 올라가는 것은 당시로선 최고의 영광이었으며 이때 확립된 순흥이라는 지명은 오늘날까지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특히 태를 묻었던 지역은 태장, 태봉, 태산이란 지명으로 현재까지 불려지고 있다. 충렬왕(제25대)의 태실은 영주시 순흥면 태장리(胎藏里)일대(마을 이름인 태장리 자체가 왕의 태를 묻었다는 뜻에서 유래, 고려사에 충렬왕의 태를 순흥에 안치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충숙왕(제27대)의 태실은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산 165번지 태봉산 정상부, 신증동국여지승람과 고지도 해동지도 등에 충숙왕의 태를 안치하고 영주를 주지사(州知事)로 승격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충목왕(제29대) 태실은 충숙왕의 태실과 같은 부석면 북지리 태봉산 내에 있다, 고려 후기 왕실에서 부석사 일대를 얼마나 중요한 명당으로 여겼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당시 사람들은 “남쪽에는 순흥, 북쪽에는 송도(개성)”라 불릴 만큼 삼남 지방에서 가장 번성하고 문화 수준이 높은 도시 중 하나로 꼽혔다.
조선 왕조 역시 순흥의 기운을 아꼈다. 세종대왕은 장남이자 훗날 문종이 되는 세자의 태를 순흥(현 예천군 은풍 명봉산)에 안치했다. 고려의 세 왕과 조선의 왕실 가족을 합쳐 ‘1읍 5태지’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이 완성됐다.
왕실의 태지는 전국 팔도에서 가장 기운이 좋은 단 한 곳을 엄선하는 것이 원칙임을 고려할 때, 한 지역에 다섯 개의 태실이 집중된 것은 순흥이 지닌 지기(地氣)가 얼마나 독보적이었는지를 보여준다.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된 순흥도호부의 당시 경계에 따르면 동쪽으로 안동의 부곡인 소라(召羅)까지 41리.서쪽 죽령(竹嶺)까지 19리 (현 충북 단양 접경), 남쪽은 영천(榮川, 현 영주시 중심부)까지 13리, 북쪽 단양(丹陽)까지 24리로 기록 돼 있다.
그러나 순흥의 찬란한 영광은 1457년 정축지변이라는 역사적 비극과 마주하게 된다.
단종 복위 운동의 중심지였던 순흥은 거사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도호부가 혁파되고 고을 전체가 초토화 되는 수난을 겪었다.
그러나 지도상에서 사라졌던 순흥은 숙종 대에 이르러 복설되며 다시 일어섰고 태실의 흔적들은 오히려 순흥이 간직했던 고귀한 기운을 증명하는 역설적인 증거가 됐다.
오늘날 순흥은 단순한 농촌 마을이 아니다. 고려와 조선의 왕실이 사랑하며 자손의 번창과 국가의 안녕을 빌었던 성스러운 땅이다. ‘1읍 5태지’의 역사는 영주시가 지닌 문화적 자산이자 자부심이다.
생명을 잉태하고 키워내는 가장 따뜻하고 강한 기운을 품은 순흥, 이곳은 여전히 우리 민족의 영원한 길지로 남아있다.
/김세동기자 kimsdyj@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