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양의 칼날과 금성대군의 충절, 어머니의 태실 앞에서 엇갈린 두 아들의 운명 생명과 절멸이 교차하는 역사의 현장, 영주 순흥이 우리에게 건네는 묵직한 질문 소헌왕후 사후에 맞닥뜨린 골육상쟁의 비극, 순흥 땅의 아련한 슬픔과 통곡
경북 영주시 순흥면 배점리, 완만한 산등성이 위에는 조선의 국모 소헌왕후(昭憲王后, 1395~1446)의 태(胎)를 묻은 태실이 자리하고 있다.
조선시대 왕비 중 태실이 조성된 사례는 소헌왕후, 정희왕후, 폐비 윤씨 등 3곳뿐으로 매우 희귀하다. 소헌왕후 태실은 생명의 시작을 천하보다 귀히 여겼던 조선 왕실의 숭고한 정신을 오롯이 품고 있다.
하지만 이 평화로운 풍경 뒤에는 조선 왕실사에서 시리고도 비극적인 운명의 굴레가 얽혀 있다.
이곳 순흥은 소헌왕후의 태실이 있는 상징적인 땅인 동시에 그녀가 가슴으로 낳아 기른 아들 금성대군이 피를 흘리며 쓰러진 절멸의 땅이기 때문이다.
소헌왕후는 세종대왕의 정비로 8남 2녀를 둔, 왕실의 번영을 일군 위대한 어머니였다. 그러나 그녀의 삶은 늘 인고의 연속이었다.
친정아버지가 시아버지 태종에 의해 역적으로 몰려 처형당하고 가문이 몰락하는 피눈물 나는 고통 속에서도 그녀는 온화하고 현숙한 성품으로 내명부를 지켜냈다.
그렇게 스스로를 태워 세종의 성군 정치를 내조했던 소헌왕후가 세상을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남겨진 아들들 사이에서는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잔인한 골육상쟁이 시작됐다.
차남인 수양대군(세조)은 왕좌를 차지하기 위해 형 문종의 아들이자 자신의 어린 조카인 단종을 즉위 3년만에 폐위시키고 자신이 왕의 자리에 올랐다. 이에 항거하며 끝까지 신의를 지켰던 여섯째 동생 금성대군은 결국 이곳 순흥으로 유배됐다.
금성대군은 어머니의 태실이 소리 없이 굽어보는 이 땅에서 조카를 향한 충절을 지키며 복위 운동을 꾀하다 결국 형인 세조의 칼날 아래 목숨을 잃었다.
자식들의 번영과 안녕을 빌며 가장 좋은 길지에 묻혔을 어머니의 태실 근처에서 한 아들은 권력을 위해 형제와 조카를 죽였고, 다른 한 아들은 의리를 지키다 처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생명의 시작을 축복하며 따스하게 보듬어주던 어머니의 품과 같은 땅이, 아들에게는 돌아갈 곳 없는 차가운 무덤이 된 것이다.
지금도 순흥 사람들은 금성대군을 신으로 추앙하며 두레골 성황제와 금성대군 신단을 통해 봄, 가을 춘향제(음력 2월 중정일)와 추향제(음력 8월 중정일)를 지내며 그의 넋을 달래고 있다.
금성대군 두레골 신당은 당시 금성대군을 추모하기 위해 순흥 주민들이 몰래 세운 곳이다.
그가 피를 흘리며 쓰러진 자리에 바위가 붉게 물들었다는 성혈단의 전설은 수백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어머니의 태실 곁에서 아련한 슬픔으로 전해지고 있다.
소헌왕후는 사후 경기도 여주 영릉(英陵)에서 세종대왕과 함께 합장해 잠들며 ‘조선의 국운을 100년 연장했다’는 명당의 주인이 되었지만 그녀의 혼백은 여전히 이곳 순흥의 산자락을 떠돌며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아들을 보듬고 있을지도 모른다.
영주 순흥의 소헌왕후 태실은 단순한 유적을 넘어, 조선 왕실의 가장 찬란했던 영광과 가장 시린 슬픔이 교차하는 비극적인 현장으로 우리 가슴 속에 남아 있다.
/김세동기자 kimsdyj@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