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의 승리를 떠올릴 때 우리는 흔히 이순신의 제해(制海)권 장악, 의병의 봉기, 명(明)의 참전을 먼저 떠올린다. 그러나 이 전쟁을 버텨낸 또 하나의 중요한 동력은 조선 사회 내부에서 작동한 ‘전시(戰時) 신분 유연화’, 즉 천민·노비에게까지 전공(戰功)을 기준으로 보상을 약속한 면천 제도였다.
임진왜란 초기 조선의 군사 체계는 사실상 붕괴 상태였다. 군역(軍役)은 형식적으로 유지됐지만 군포(軍布) 대납과 군역 회피로 상비군의 실전 능력은 크게 약화돼 있었다. 양반층은 전투를 기피했고, 왜군은 조총과 기동전술로 기존 전투 질서를 무너뜨렸다. 유성룡이 ‘징비록’에서 “군은 있으되 싸울 자가 없고, 법은 있으되 지킬 자가 없다”고 탄식한 이유다.
이 위기 속에서 조선이 택한 현실적 선택이 바로 ‘신분보다 전과(戰果)’라는 전시 논리였다.
‘선조실록’ 권51, 선조 27년 5월조에는 군공(軍功)을 평가하는 ‘군공사목’(軍功事目)이 정비되며 “적 한 명의 목을 베면 면천하도록 규정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수급을 둘 이상 올리면 무관직을 제수하는 방안도 논의됐다. 이는 단순한 포상이 아니라, 노비와 천민에게 법적 자유와 자손의 신분 변화까지 약속한 파격적인 조치였다.
조선 사회에서 노비 신분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세습되는 굴레였다. 재산권과 거주 이전의 자유는 물론, 혼인과 자녀의 신분까지 제한받았다. 이런 구조 속에서 면천은 일시적 보상이 아니라 삶 전체를 바꾸는 선택이었다. “살아남으면 자유를 얻고, 싸워 이기면 신분을 바꿀 수 있다”는 약속은 천민층에게 강력한 동기부여로 작동했다.
이 제도의 효과는 특히 의병과 보조 전력에서 두드러졌다. 임진왜란의 전과 상당수는 대규모 전투보다 기습·매복·후방 교란에서 나왔다. 정규군의 통제가 느슨한 이 공간에서 천민·노비·백정 출신 병사들이 적극적으로 전투에 참여했다. 왜군의 낙오병을 습격해 수급을 확보하고, 군량 수송로를 차단하는 전투 방식은 면천 보상과 구조적으로 잘 맞아떨어졌다.
수군에서도 간접적 효과를 확인할 수 있다. 이순신 수군의 노군(櫓軍), 포수, 노(櫓)잡이 가운데 상당수는 천민·노비층이었다. 이들에게 전공에 따른 신분 상승 가능성은 전투 지속력을 높이는 사기 요인이 됐다.
더 나아가 임진왜란 당시에는 공사천을 대상으로 무재(武才)를 시험해 성적이 우수한 자에게 면천(免賤)을 허가하는 ‘공사천 무과’까지 한시적으로 실시됐다. 무술 연마 자체가 면천의 지름길이 된 셈이다.
물론 유성룡은 이 제도를 무조건 찬양하지 않았다. ‘징비록’에는 전공 심사의 자의성, 수급 위조, 전후에 약속된 면천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는 문제들이 함께 기록돼 있다. 전시에는 신분의 문을 열었지만, 평시 질서로 돌아오자 그 문을 다시 닫아버린 조선 사회의 모순을 그는 정확히 꿰뚫어 보았다.
또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조선 후기 면천의 주된 수단은 군공이 아니라 ‘납속면책’이었고, 군공면천은 보조적 수단에 가까웠다는 사실이다.(1662년 납속 속량가는 쌀 50석) 이는 군공면천이 제도적으로 정착되지 못한 채, 전쟁이라는 특수 상황 속에서만 작동한 임시 장치였음을 보여준다.
결국 면천·서훈 제도는 임진왜란 승리의 결정타라기보다, 붕괴 직전의 국가가 선택한 비상용 동원 장치였다. 이순신의 바다, 명나라의 원군, 일본군의 보급선 붕괴라는 큰 흐름 속에서, 이 제도는 조선의 전투력을 바닥에서부터 떠받친 숨은 축(軸)이었다.
전쟁은 이겼지만, 전쟁이 드러낸 신분제의 한계를 끝내 극복하지는 못했다는 점에서, 유성룡의 성찰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한상갑기자 arira6@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