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권리에는 책임이 따른다. 힘이 세질수록 책임도 커진다. 어린아이가 갑자기 거인의 힘을 갖게 된다면 어떨까. 무심코 흔든 팔에 크게 다칠 수도 있다. 학교 총기 사고가 잦은 미국에서 10대 청소년의 총기 소지 허용 여부가 논란인 것도 같은 맥락이다.
경주 최부잣집은 가진 것이 많을수록 책임을 크게 진 좋은 사례다. 1년에 1만 섬 이상의 재산을 모으지 말고, 흉년에 남의 논밭을 사지 말며,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가훈을 자손들에게 남겼다. 가문에 시집온 며느리는 3년 동안 무명옷만 입게 했다. 며느리에게도 가훈을 몸으로 받아들일 시간을 준 것이다.
집안 어른이 잔소리를 한마디 하면, 그것이 전달될 때는 두 마디, 세 마디로 늘어난다. 시장이 무심코 던진 한마디가 주무관에게는 엄청난 압력이 될 수 있다. 시장이 의논하려고 한마디 하면 그것을 결정 사항으로 받아들이기에 십상이다. 그래서 자리가 높을수록 알아도 모르는 척해야 할 일이 많아진다고 한다. 하물며 대통령이 하는 말의 무게는 비교할 수 없이 무겁다.
지난주 한국갤럽 조사에서 이재명 대통령이 국정 운영을 잘하고 있다는 의견이 64%였다. 잘못하고 있다는 의견은 21%에 불과했다. 덩달아 정당 지지도도 민주당이 43%, 국민의힘은 23%로 절반에 불과했다. 지역별로는 대구·경북에서만 국민의힘(41%)이 민주당(27%)을 앞섰을 뿐, 나머지 모든 시·도에서는 모두 민주당에 밀렸다. 부산·경남도 민주당이 우위였다.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홈페이지 참조) 내년 지방선거 결과가 눈에 보인다.
그러나 ‘부자 몸조심’이란 말이 있다. ‘잘 나갈 때’, ‘가진 게 많을 때’ 절제해야 한다. 민주당의 기세는 국민의힘 덕분이다. 민주당이 잘했다기보다 국민의힘이 잘못한 탓이다. 자만할 때가 아니다. 그걸 알아서인지, 이 대통령은 내년 선거에 전력을 다한다. 그는 부산에 해양수산부를 연내 이전하라고 지시했다. 부산 시장 출마가 유력한 전재수 의원을 장관으로 지명했다. 추경으로 전국민 소비쿠폰을 뿌린다.
그렇지만 정권을 장악했다는 자만심을 감추지 못한다. 언행이 거칠다. 민주당은 지난주 국회의 핵심 상임위원장을 일방적으로 선출했다. 국회 상임위원장은 야당과 협의해 온 전례를 무시했다. 국회의장과 나누어 맡던 법사위원장도 일방적으로 차지했다. 예결위원장, 문체위원장, 운영위원장도 선출했다. 김민석 국무총리 후보자의 인사청문회는 증인·참고인을 한 명도 부르지 않고 끝냈다.
야당이야 뭐라건 이번 주에 임명할 태세다. 상법·양곡관리법·노란봉투법 등 쟁점 법안을 포함해 40개 법안을 모두 밀어붙일 예정이다. 국회에서 압도적 다수다. 대통령도 같은 당이다. 거칠 것이 없다.
이 대통령은 여야 지도부를 대통령실에 초청한 자리에서 국민의힘 김용태 비대위원장에게 “젊은 비대위원장을 털면 안 나올 것 같냐”라고 말했다. 김 위원장의 김민석 국무총리 후보자 지명 철회 요청에 대한 답변이다. 아무리 젊어도 국민의힘의 대표 자격이다. 대통령 말은 야당 의원이 하는 말과 다르다. ‘제왕’이라고까지 불리는 막강한 권력자다. “너도 한번 당해 볼래”라는 위협으로 들
릴 수밖에 없다.
김민석 후보자는 주진우 국민의힘 의원을 장관으로 추천한다는 글을 페이스북에 공유하면서, “국민 검증 받으실 좋은 기회 얻으시길 바란다”라고 덧붙였다. 이 대통령과 비슷한 뉘앙스다. ‘너도 털릴 각오 해라’라고 주 의원을 위협하는 것으로 비친다. 주 의원도 그렇게 항의했다.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은 27일 금융위원회가 발표한 부동산 대출 규제 방안을 “대통령실 대책이 아니다”라고 말해 논란이 일었다. 대통령실과 금융위가 별개의 정부인가. 취임하는 순간 대한민국 정부의 조치는 모두 이 대통령의 책임이다.
역대 대통령의 지지도를 보면 모두 취임 이후 내리막이다. 취임 직후가 가장 인기를 누렸다. 내리막을 막을 수는 없었다. 추락 정도를 얼마나 늦추느냐가 관건이다. 원인은 대부분 스스로 만들었다. 실언과 실책으로 점수를 잃었다. 경계할 것은 야당이 아니다. 자신의 오만과 무절제가 적이다.
김진국 △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