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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산골서 태어나… ‘소년공-변호사-도지사-대통령’ 신화

박형남 기자
등록일 2025-06-04 00:10 게재일 2025-06-04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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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당선자가 걸어온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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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3일 포항 유세에서 기호1번을 나타내고 있는 이재명 대통령.  /이용선 기자

“지난 이야기이긴 하지만 우리가 이길 수 있는 선거였다. 결론적으로는 우리가 더 준비했어야 한다.” 이재명 대통령은 3년만에 대선에 출마한 데 대해 이렇게 말했다. 2022년 3월 9일 대선에서 0.73%차로 낙선했던 그는 과거의 실패를 자양분 삼아 이번 대선에서 승리를 거머쥐었다. 

3년 만에 다시 도전한 대선이지만 그간 정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2023년 백현동 개발 특혜 의혹 등으로 구속 영장이 청구되기도 했다. 반복되는 영장 청구에 민주당 내에서 이탈표가 생기면서 체포동의안이 가결되기까지 했다. 이로 인해 당 안팎에서 대표직 사퇴 압박도 받았다. 내내 그를 괴롭힌 사법리스크는 여전히 완벽하게 해소되지는 않았다. 

1964년 안동서 5남 2녀 중 4남으로 출생

가난한 형편에 6년을 ‘소년공’으로 살아

현실좌절 학업 열중… 중앙대 법대 입학

1986년 사법시험 합격… 변호사의 길로

성남시민 창립 구성원 시민운동에 첫 발

정계 입문 성남시장에 경기도지사까지

19대 대선 경선·20대 대선 도전에서 고배

尹 탄핵에 빠르게 대선가도… 21대 당선

죽을 고비도 넘겼다. 지난해 1월 부산 일정 도중 60대 남성에게 피습을 당했다. 흉기에 목이 찔렸지만 다행히 치명상을 피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12·3 비상계엄을 선포하면서 계엄군의 체포 대상 1순위로 지목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대통령을 포함한 국회의원들이 우여곡절 끝에 국회 본회의에 참석해 비상계엄 해제 요구안을 가결시켰다. 이 대통령은 여러번 맞닥뜨린 죽을 고비를 이겨내고 살아 돌아왔고, 끝내 대통령직에 올랐다. 

이 대통령이 정치에 입문하기 이전의 삶도 정치 여정과 닮아있다. 고난의 연속이었고, 극복의 과정이었다. 

이 대통령은 1964년 안동 청량산 자락에 위치한 예안 도촌리 산골 마을에서 5남 2녀 중 4남으로 태어났다. 이 대통령은 선거유세 기간 “제가 경북 안동 예안면 도촌리 지통마 마을에서 태어나 안동의 물과 풀, 쌀을 먹고 자랐는데, 왜 저는 이 동네(경북)에서 지지를 못 받을까. ‘우리가 남이가’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는데, ‘재명이가 남이가’라고 얘기 좀 해달라”며 ‘경북아들’을 자처하기도 했다.

가정 형편은 어려웠다. 산골 마을이어서 5km를 홀로 걸어 안동 삼계초등학교에 다녔고, 산나물을 캐 먹으며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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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 입학 당시 어머니와 함께 촬영한 이재명 대통령. /2018년 후보시절 명캠프 제공

이 대통령 가족은 그가 초등학교를 졸업한 1976년 성남 상대원 시장 꼭대기 월세집 단칸방으로 이사했다. 이 대통령은 가정 형편상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13세 때부터 소년노동자가 됐다. 법적으로 취업이 불가능한 나이 때문에 동네 형 이름을 빌리는 등 6년을 ‘이름 없는 소년공’으로 살았다. 

노동 현장은 가혹했다. 하루 12시간씩 3개월을 꼬박 일했는데 사장이 야반도주하는 바람에 월급도 받지 못했다. 수많은 사고도 당했다. 14살에 취업한 냉동회사에서 함석판을 접고 자르는 일을 하며 수없이 베이고 찔렸다. 이 때의 상처는 지금도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다섯 번째로 취업한 스키 장갑·야구 글러브를 만드는 공장에서는 프레스에 왼판 손목 관절이 눌리는 사고를 당한 뒤 손목이 뒤틀려 평생 ‘굽은 왼팔’이 됐다. 이 사고로 6급 장애인 판정을 받아 군 복무에서 면제됐다. 

무엇보다 이 대통령은 공장 고참들이 강제로 시키는 권투시합이 가장 괴로운 일이었다고 회고한다. 아픈 손목에도 불구하고 생존을 위해 매일같이 권투를 해야만 했다. 결국 이 대통령은 소년공 환경에서 탈출하기로 결심했다. 공장 관리자가 되기로 결심한 것이다. 이 대통령은 공장 일과 학업을 병행하며 중졸, 고졸 신분이 됐다. 그러나 다시 노동자 신세를 이어나가야만 했던 현실에 좌절감은 더욱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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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대통령이 지난달 29일 서울 송파구 잠실종합운동장 광장에서 열린 강동구·송파구 집중 유세에서 기표 모양이 그려진 야구공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이 대통령은 대학 진학을 결심했고, 1982년 중앙대 법대에 입학했다. 이 대통령은 “‘죽기, 살기로 하자!’는 각오로 몰두했다”며 “졸음을 이기기 위해 독서실 책상에 압정을 뿌려 놓고 공부를 했는데, 압정이 두어 개 박힌 채 잠들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이 대통령은 1986년 두 번째 도전 끝에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판·검사 임용을 놓고 고민했지만 사법연수원에서 당시 인권변호사였던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강의를 듣고 그의 철학에 매료돼 같은 길을 걷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노동 인권 변호사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 이 당선인은 “당시 변호사였던 노 전 대통령이 ‘변호사는 뭘 해도 굶지는 않는다’는 말에 용기를 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1989년 성남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한 이 당선인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이천·광주시 노동상담 소장 등으로 활동했다. 숙명여대 음대 졸업생이던 아내 김혜경씨를 만난 것도 이 때다. 두 사람은 1991년 결혼해 슬하에 2남을 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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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야구 글로브 공장인 ‘대양실업’ 소년공 시절의 이재명 대통령. 그해 4월 말 고입 검정고시학원에 등록해 8월 합격했다. /연합뉴스

이 대통령은 1995년 성남시민(현 성남참여자치시민연대) 창립 구성원으로 참여하면서 시민운동에 발을 들였다. 이 당시 성남 ‘분당 백궁·정자지구 용도 변경’ 특혜 의혹, ‘분당 파크뷰 특혜분양 사건’을 사회에 고발하며 부동산 부패 토건 카르텔 및 기득권과 맞섰다.

 2023년에는 성남시 종합병원 두 곳의 동시 폐업으로 의료공백이 발생하자 시민들이 값싸게 의료혜택을 볼 수 있는 공공의료기관 설립 운동을 시작하기도 했다. 

이후 열린우리당 정동영 당의장 등의 권유로 정계에 입문했다. 정치 입문 초기는 실패의 연속이었다.

 처음으로 2006년 성남시장 선거에 출마했다가 낙선했고, 2년 후 18대 총선에서 통합민주당 소속으로 성남시 분당갑에 전략공천됐지만 낙선했다. 2010년 삼수 끝에 51.2%의 득표율로 민선 5기 성남시장에 당선됐고, 2015년 재선에 성공했다. 성남시장 시절 포퓰리즘 논란 속에서 ‘3대(청년배당·교복·산후조리) 무상복지 정책’을 추진하며 이름을 알렸다. 

이 대통령이 전국구 정치인으로 성장한 것은 2016년 말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정국 때다. 그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규탄 집회에서 정치인 최초로 박 전 대통령 퇴진을 주장했다. 

이를 발판삼아 19대 대선 경선에 뛰어들었다. 당시 문재인 전 대통령, 안희정 전 충남지사와 경쟁했지만 21.2% 득표율로 3위를 기록하며 탈락했다. 당시 TV토론 등에서 문 전 대통령와 치열한 논쟁을 벌여 친문 인사들과 사이가 멀어지기도 했다. 

이 대통령은 대선 경선에 패배한 뒤 2018년 지방선거에서 경기도지사에 출마했다. 친문계 전해철 후보와 치열한 경쟁 끝에 본선에 나가 56.2% 득표율로 당선됐다. 이 대통령 취임 직후 기본소득 기본 소득제와 청년 배당을 추진했고, 코로나19 대유행 시기에는 경기도민 전체 1인당 지역 화폐 10만원의 재난기본소득을 지급하기도 했다. 

지방선거를 치르는 과정에서는 친형 강제 입원 의혹이 불거졌고 공직선거법상 허위사실 공표 등 혐의로 당선 무효형을 받았지만 대법원에서 무죄 확정 판결을 받아 기사회생하기도 했다. 

지난 대선에서는 이낙연 전 대표를 누르고 민주당 20대 대통령 후보가 됐지만 0.73% 차이로 윤석열 전 대통령에 패배했다. 이후 21대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한 뒤 2022년 8월 전당대회에서 77.77% 득표율로 민주당 당대표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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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후반 셋째형, 막내동생과 성남 자택앞에서 사진촬영하는 이재명 대통령. /연합뉴스 

당대표가 된 이후에도 계속되는 사법리스크로 인해 타격을 받았지만 법원의 구속 영장 기각 등으로 위기를 벗어나기도 했다. 이후 이 대통령은 22대 총선 당시 인천 계양을에서 원희룡 전 국토교통부 장관을 누르고, 재선에 성공했다. 총선에서 그는 친명계 위주의 공천으로 이른바 ‘친명횡재 비명횡사(비이재명계만 총선에서 불이익을 받았다는 뜻)’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그러나 민주당이 과반 의석인 175석을 확보하면서 당 장악력을 한층 높였고, 그의 리더십도 입증하는 발판이 됐다. 이를 바탕으로 지난해 8월 전당대회에서 당 대표 연임에 성공했다. 

2027년 대선을 향해 달리던 이 대통령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 선포와 이로 인한 탄핵으로 6·3 조기 대선이 확정되면서 보다 빠르게 대선 가도에 뛰어들게 됐다. 김경수 전 경남지사·김동연 경기지사를 압도적으로 따돌린 이 대통령은 민주당 대선 후보로 선출됐고, 삼수 끝에 3일 대한민국 제21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박형남기자 7122love@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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