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하늘에 떠 있던 건/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죽어버린 별들의 유서/ 그러거나 말거나 키스를 했다/ 먼 옛날 먼 바다에 누가 빠져죽을 때 태어난 파도가/ 그제야 발치에 닿기 시작했다// 너는 뭐라 말을 하는데 도무지 들리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키스를 했다/ 서로 등을 돌린 채 잠이 들었던 밤에/ 진작에 닿았어야 했을 말들은 여정을 떠났다// 숨막힐듯 느리고 낮게 말이 기어오는 동안/ 등과 등의 간격은 은근하게 멀어지고/ 그 사이로 낯선 바람이 불었다// (중략) 한참을 멍하다가 한 시절이 지나다가/ 그제야 나는 문득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 시각 먼 바다에는 또 누가 빠져 죽고/ 어느 별은 유서를 쓰고 있었다”
-(강백수, ‘레이턴시’, 시집 ‘그러거나 말거나 키스를’, 문학수첩, 2020)
레이턴시(latency)는 자극에 대한 반응이 생기기까지의 시간, 흔히 ‘지연속도’라고 일컬어지는 통신용어다. 주로 음향 녹음 시 오디오 인터페이스에서 실제 소리의 발화보다 녹음이 늦게 되거나 영상 송출 과정에서 비디오 화면과 음향 싱크가 맞지 않는 것을 레이턴시라고 한다. 시인인 동시에 싱어송라이터로 활동 중인 강백수에게 레이턴시는 무척 익숙한 현상일 테다. 위 시에서 시인은 레이턴시를 “그날 하늘에 떠 있던 건/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죽어버린 별들의 유서”라는 천문학적 상상력으로 풀어내고 있다.
밤하늘에 빛나는 별들은 사실 수억 광년 전에 소멸한 별들의 잔상이다. 그것은 실시간으로 빛나는 현재적 광채 같이 보여도 이미 죽어버린 과거의 빛일 뿐이다. 빛의 속도는 유한하기에 빛이 은하계에서 지구까지 아득한 거리를 이동하는 데에는 영원처럼 캄캄한 레이턴시가 늘 발생하게 된다. 우리가 육안으로 보는 세계의 물상들에도 레이턴시가 작용하고 있다. 엄밀히 따지면 우리 눈에 들어오는 모든 장면들은 과거의 모습이다. 가까이 있는 물상의 경우 레이턴시의 시차가 매우 짧을 뿐이다.
다시, “그날 하늘에 떠 있던 건/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죽어버린 별들의 유서”에 불과하다. 현재를 구성하는 불행의 요소들, 지금, 여기에 작용하는 온갖 불평등과 부조리들은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죽어버린 기성의 관습일 뿐이다. 강백수는 젊은 세대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해요. 너희 잘못이 아니라고, 지금의 절망은 곧 사라질 허깨비라고, 그러니 쫄지 마, 주눅 들지 마, 위의 시가 수록된 시집 제목처럼 “그러거나 말거나 키스를 하”자고!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에서 주인공 월터 미티는 일상을 벗어나는 어떤 모험도 해본 적 없는 평범한 직장인이다. ‘LIFE’ 잡지사의 사진인화기사로 일하는 그는 표지 사진으로 쓰일 필름이 분실되는 사고가 발생하자 필름을 찾으러 그린란드로 날아간다. 그저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려는 것뿐인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 생애 가장 특별한 모험에 몸을 던지게 된 것이다.
세상은 그런 그의 순정한 노력과 열정을 알아주지 않는다. 그는 이미 회사로부터 정리해고 통보를 받았다. 하지만, 곧 회사에서 쫓겨날 월터가 출장 가방을 들고 달려가는 동안 영화는 라이프지 과년호들, 공항 전광판 문구와 활주로 표지 등을 통해 인상적인 메시지를 관객에게 전한다. “세상을 보고 무수한 장애물을 넘어 벽을 허물고 더 가까이 다가가 서로를 알아가고 느끼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의 목적이다”라는.
대선이 열리는 초여름에 이 시를 다시 읽는다. 자신들이 걸어온 길을 따르라고 굴종을 강요하면서, 후속 세대가 정형화된 궤도를 벗어나 새로운 길을 만들면 바로 길을 폐쇄해버리는 기성세대의 지독한 탐욕으로 인해 오늘날 한국 사회는 계층의 양극화와 청년 세대의 절망이 극에 달한 디스토피아가 되어가고 있다.
제 자식에겐 아프지 말라고 하면서 남의 자식에겐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함부로 말하는 자들의 천 마디 ‘명언’보다 지금 이 순간 우리와 함께 쓰러지고 소리 내어 울며, 그럼에도 일어나서 바보처럼 웃고 키스하고 다시 노래하는 시인의 시야말로 격의 없이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한다. 우리와 무관한 어제로부터 비롯된 오늘의 우울과 학습된 패배감에 함몰되는 대신 너와 나, 우리, 지금 이 순간에만 집중하면서 키스를 하자고, 주어진 순간들을 그저 살아내자고, 시인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이병철(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