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무르익고 있다. 꽃들은 화려한 색을 꺼내 다투어 피고 연초록 새잎이 돋아난다. 아름답고 눈부시기만 할 것 같은 봄이지만 친구의 투병 소식에 마음이 무겁다. 한눈팔지 않고 열심히 일만 하며 살아온 그의 삶을 알기에 안타까움이 더 크다. 삶은 두 얼굴의 야누스처럼 환희 웃고 있다가도 느닷없이 불행 쪽으로 몸을 틀기도 한다. 이런 삶의 불확실성을 말하는 시를 읽어본다.
“한 살배기 아들을 안고 아버지는 하염없이 웃고 계신다 / … 나는 지금 쭉 뻗은 도로를 질주 중이다 / 눈물이 찔금 난다 // 죽은 아버지를 안고 통곡하는 어머니 곁에 젖먹이가 칭얼거리고 있다 / …노란불이다 / 심장 박동이 빨라진다 // 밑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쌀독을 보고 어머니는 행상을 나서신다 / ·빨간불이다 / 브레이크를 힘껏 밟는다 // 입 하나 줄인다고 열여섯 큰누나는 찢어진 고무신 신고 시집을 가고 / 가난한 집이 싫다며 둘째 누나는 집을 나간다 / … 파란불이다 / ‘미친년, 미친년’하다 신호를 놓친다 // 뒤차가 경적을 울린다 / 액셀러레이터 페달을 힘껏 밟는다 / 앞은 급커브이다 ”- 황봉학 시 ‘신호등’
3대 독자 아들을 얻은 기쁨으로 하염없이 웃고 있던 아버지. 탄탄대로 쭉 뻗은 도로일 것만 같은 길이었다. 곧 생의 신호가 바뀌리라고는 예감조차 하지 못한 채 무심히 달리기만 한다. 죽은 아버지를 안고 통곡하는 어머니에게서 이미 정지를 예감하는 노란불은 들어오고 빨라진 심장을 부여잡는다. 행상을 떠나는 어머니와 가난하게 시집간 누나 앞에서 신호는 자꾸만 바뀌지만 열심히 달려보아도 또 급커브가 기다리는 것이 삶이다.
위의 시에서 시인은 이 예측하기 힘든 우리의 생을 신호등을 빌려와 말하고 있다. 하나의 사건이 일어나고 차는 달리고 있다. 그다음 행에는 그 사건과 연관된 심경의 변화가 따라 나온다. 이 셋은 하나의 사건처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생이 변화하는 순간마다 신호등이 나타난다. 생의 굴곡진 순간이 도로를 달려가는 자동차의 질주와 교묘히 일치한다. 삶의 순간과 운전을 이렇게 감쪽같이 연결해서 말할 수 있는 건 시인이 자동차 운전을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어서일까. 그는 운전을 가르치며 끊임없이 생의 느닷없음을 떠올리고 있었던 걸까.
언젠가 유명 소설가에게 어떻게 소설을 쓰게 되었냐고 질문하자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노라 대답했다. 우리네 삶은 어쩌다 보니 이리로 흘러오고 어쩌다 보니 이런 사람을 만나고 어쩌다 보니 이렇게 살게 된 걸까? 과연 우리는 이렇게 눈 감고 아무것도 모르기만 한 존재일까?
아니다! 시인은 무질서하고 느닷없어 보이는 이 삶이 치밀하게 짜여진 어떤 내밀한 약속이 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 아닐까. 우리가 하나의 사회적 약속으로 신호등의 색깔을 보고 멈추고 출발하고 달리면서 마침내 목적지에 도달하듯이 우리를 조종하고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는 신호등도 결국은 내가 운전해서 원하는 곳으로 가게 해주는 하나의 도구일 뿐이라는 걸 삶과 운전이라는 행위를 교차시켜 보여주며 알려주고 있다.
대지에 봄비가 흠뻑 내린 날이다. 맑아진 세상을 바라보며 내 삶의 신호등은 지금 어떤 색이 켜져 있는지 찬찬히 살펴서 사고 없이 안전하고 평온한 주행이 이어지기를 바란다.
/엄다경 시민기자